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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선지자가 성전을 통해 본 메시아(학2:20-23)-2024.2.4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통해서 성전의 주인이신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보이는 성전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의 주인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성전을 통해서 참된 성전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것이지요. 분명히 학개는 성전을 통해서 메시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참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지요.
학개 선지자의 선포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1장12절을 보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물론 선지자의 학개의 말을 청종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학개를 자기들에게 보내주셨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한 것입니다(1:12). 그러면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 무엇일까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외쳤던 선지자들의 선포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학개 선지자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들이 학개의 책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지요. 사실 작은 변화이지만 매우 고무적인 변화입니다. 그러자 하나님도 즉시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13절).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반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성령을 그들의 마음에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신 것입니다(1:14절). 여기서 흥분시키심은 일시적인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그들의 마음에 안개처럼 드리워진 의심과 근심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집단으로 흥분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 역사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성전건축을 반대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신 것이지요. 사랑의 띠로 하나되게 하신 거예요. 때문에 이스라엘이 좋은 방향으로 흥분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로 흥분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적인 일에 흥분케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드디어 그들이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에 성전재건 사업에 착수한 것입니다(1:15절). 말씀을 들은 지 불과 3주 만에 일어선 것입니다.
그동안 십 수 년 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불과 3주 만에 들불처럼 일어난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만지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흥분케 하심으로 인하여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흥분시키시면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만 예전에 자기 조상들이 세웠던 화려하고 웅장한 솔로몬의 성전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자신들이 건축할 성전은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성전을 건축하는 의욕이나 동력이 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불과 한 달 만에 말입니다(2:1).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이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2장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너희가 지을 성전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고 질문하십니다. 당시 그들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보신 것이지요. 아마도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전을 지을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기쁨이나 감동이 있었겠습니까?
하면서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도 마음을 굳세게 하여 일하라고 당부하지요(2:4).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창한 집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전을 건축하라 하심은 예전성전의 화려함을 복원하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차 우리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세워질 심령성전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성전을 건축하라는 거예요.
(1)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성전
장차 지어질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에 비할 바가 못되는 매우 초라한 성전인 것을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그것은 바로 그 성전에 하나님의 신이 머물 것이기 때문입니다(2:5).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언약하셨던 말씀이 그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언약하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언약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출애굽 때 하신 가장 확실한 언약은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서 축복을 주신다는 언약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언약보다 중요한 언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약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언약입니다. 이른바 임마누엘 언약이지요. 실제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언약을 수없이 하셨습니다(출19:5,6; 34:10,11 신12:5,11, 21; 14:23; 16:6등).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보면 임마누엘 언약보다 더 위대한 언약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 약속을 해주신 것이지요.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보다 복된 언약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언약은 뭐니뭐니해도 임마누엘 언약입니다. 그 언약만 있으면 우리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사실 나머지는 임마누엘의 언약을 통해 주시는 부수적인 선물들인 셈이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은 모든 언약의 기본이요, 모든 언약의 총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언약만 있으면 우리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언약만 있으면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 언약이 언약 중에 언약이요, 최고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언약은 성전언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함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거든요. 마태복음1장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내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지요.
내가 성전된 것이 임마누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에게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스룹바벨 성전이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성전에서 당신의 언약을 보존해 주실 것이며, 성령이 그곳에 머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2:5). 때문에 성전이 초라하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성전이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요, 웅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가치는 크기나 위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의 가치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스룹바벨에게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촉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룹바벨 성전은 법궤도 없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법궤도 없는 성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건축을 독려하시는 것일까요?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6-9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성전을 건축할지라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건축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엄청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실 스룹바벨 성전은 법궤가 없습니다.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에서 메시아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 성전으로 만국의 보배가 들어오신다는 말입니다. 만국의 보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또한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국이 진동하는 대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큰 진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샤 제국이 헬라제국으로 넘어가고, 다시 헬라는 분열이 일어난 후 로마제국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염두해 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십자가의 사건은 만국을 진동시키는 가장 큰 사건이지요. 역사이래로 그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없고, 그 사건보다 위대한 사건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 땅에서는 가장 큰 사건이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이거든요.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사건이지요.
십자가 사건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성전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2장19절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성전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모신 내가 성전인 것이지요. 그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이 성전을 통하여 엄청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비록 스룹바벨 성전이 초라할지라도 성전자체를 의지하기 보다는 장차 만국을 다스릴 자 보배이신 주님이 성전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비록 스룹바벨 성전이 지상에 세워질지라도 외적인 모습에 매료되지 말고 그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솔로몬의 성전에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솔로몬의 성전이 화려하고 웅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스룹바벨 성전이 영광스럽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하나님의 계시가 더욱 선명해졌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계시의 점진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에서 솔로몬의 성전이 외적인 가치를 존귀히 여기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면, 스룹바벨 성전은 내적인 가치를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가치가 보이는 가치보다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히 여기는 수준으로 발전이 된 것이지요. 이른바 계시의 발전인 셈이지요. 계시도 발전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부분의 계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선명해지는 수준으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무엇보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의 점진성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전의 가치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 성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광을 스룹바벨 성전을 통해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2:9절). 하나님이 스룹바벨 성전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방편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님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깨트리셨습니다. 깨어진 성전이 된 것이지요. 다만 깨어진 성전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다시 사신 것입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신 것이지요.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습니다.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입니다. 십자가의 두 축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다시 살으심으로 의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의의 문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함은 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되었다고 복음인 것은 아닙니다. 죄의 문제 해결은 완성이 아닙니다. 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의의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죗값이 지불되고,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마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의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동일한 것처럼 말입니다. 결코 내안에 있는 죄의 문제가 처리되었다고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집안에 더러운 것을 청소했다할지라도 깨끗한 것으로 채우지 아니하면 누리지 못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비웠으면 채워야 합니다. 육의 것을 비웠으면 영의 것을 채워야 합니다. 죄를 회개했으면 의를 채워야 합니다. 사망을 이겼으면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이 지불했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의로움으로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얻되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간신히 산소 호흡기를 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삶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숨을 쉴 수 있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 안에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를 살리신 일에 참예하는 것이지요. 부활의 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체가 누구신줄 아십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비록 지상에 세워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일지라도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에 세워지는 성전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상성전일지라도 그 성전을 건축하라고 고집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2:9).
사람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의도인 것입니다. 얼마든지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의 가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3) 메시아를 통한 성전의 영광(22-23절)
또한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통해 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인 맞은 자였습니다(23절). 하나님의 인 맞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인 맞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셈이지요. 그분이 성전의 주인됨으로 말미암아 성전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성전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보이는 성전은 몇 번의 파괴됨으로 수난을 당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워진 성령의 전은 결코 파괴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방해하는 모든 열방과 열국은 해를 받을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다. 성전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가 열국의 보좌를 엎으실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엎드러뜨리실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열방의 말탄 자들이 무너뜨림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학개 선지자기 성전을 통하여 보게 될 메시아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과 열방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메시아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가 온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스룹바벨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스스로 성전을 건축할 주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외세의 간섭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바사제국의 통제아래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사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입국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고소를 당한 후 성전건축 중단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 마음대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어떤 자율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비록 그들이 성전을 건축한다 할지라도 무슨 권한이 있을까라는 자괴감이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부질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스룹바벨을 취하여 인을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3절). 하나님이 지명하여 택하신 자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도장을 찍어주신다는 말이지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당신의 인을 찍어주시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안전을 보장해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인을 찍어주시면 세상 어떤 것도 해할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히 보장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성전된 우리 안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성전을 파괴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얻고 인 맞은 자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성전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지금 우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을 지키실 것이며, 당신의 영광을 성전을 통해 받으실 것입니다. 그 성전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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