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지나기 전에 꼭한번 만나야지 하고 벼르던 사람이 있었기로
아침일찍 춘천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변을 거닐다가 소주몇잔을 주고받을 요량이니 차를 두고 가는 것도 마땅한 일이고
날씨가 꾸물꾸물한데다 일기예보도 오후늦게는 비가 온다하니
우산을 챙겨들고 나온 것도 썩 잘한 일인듯 싶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우산을 잃어버리고 집에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그동안 지독스런 건망증으로 세상에 흘려 보낸 우산이 몇개런가!
특별히 오늘은 우산함에서 제일 깨끗하고 값져보이는 놈을 골라들고
나왔으니 제발 이번 만큼은 실수 없기를...
어린시절, 우리는 웬만하면 비닐우산이거나 콩기름메긴 종이우산으로
장대비를 헤짚으며 학교엘 다녔다. 어쩌다 누군가 검은색 천우산을
들고 오기라도 하면 그 것만으로도 부잣집자식처럼 보이기도 했을 터이다.
시절이 좋아진 것인지 요즈음은 잔칫집 하객에게 주는 답례품이나
회사창립 기념일에 사원들에게 주는 기념품도 고급우산인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구경을 가도 골프채만한 우산을 주니
이제는 우산 하나쯤 잃어버리거나 주워온 들 그게 무슨 일이겠는가.
춘천의 강변은 역시 화사하였다.
비가 오기는 커녕 쨍쨍한 햇살에 볼이 따가울 지경이다.
모처럼 가져간 우산이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지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하는 나의 결심은 흐뜨러지지 않았다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을 때는 물론이고
황혼을 배경삼아 소줏잔을 기우릴때에도
나는 회색줄무늬 고급우산을 신주단지처럼 보호하였다.
중학시절인지 고교시절인지 여하튼 영어공부에 녹아나던 때에
short storys 라는 제목의 영문단편소설집을 교재로 쓴적이 있었다.
전문을 몽땅 외우도록 득달치던 선생님덕분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몇몇 이야기의 줄거리가 생생하다.
그중에 ‘umbrella moral' 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었다.
‘우산윤리?’ 혹은 ‘우산양심?’ 정도로 번역 될법한 짤막한 얘기다.
비오는 날, 호텔이나 백화점입구의 우산꽂이에 우산을 꽂아놓고 들어갔다가
나올때 자기것을 되찾아가는 경우, 낡은 자기우산을 제치고 슬그머니
깨끗한 남의 우산을 들고나오는 심리에 관한 얘기라고 기억하고 있다.
주인이나 벨보이에게 들키지 않으면 횡재이고,
행여 들키면 “ 앗! 실수, 남의 것을 잘못집었군!”하면 그만이라는,
그야말로 크게 문제삼기는 껄적지근하면서도
실은 얄팍하고 얄미운 '실수로 포장된 고의'를 예리하게 풍자하는 내용이다.
‘umbrella moral'
어찌보면 성숙한 시민사회의 기본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작은 약속과 작은 신뢰와 작은 신의가 존중되고 중요시 되는 사회...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오늘 이 만큼이나마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이웃들이 바로 그 ‘우산양심’으로
나를 보듬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춘천여행의 끝은 술판이었다.
만취한 나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우산사수’의 사명을 다시한번 확인하였다.
‘회색줄무늬 고급우산’이 단검처럼 왼쪽 겨드랑이에 당당하다.
‘으음...이번 만큼은.......’
회심의 미소사이로 창밖의 가로등마저 찬연하다.
춘천발 고속버스는 천천히 서울 강변역 동부터미날에 나를 내려주었다.
“내 우산!”
"옳지, 꼼짝없이 붙어있군!"
나는 그놈을 꼭 끌어안고 덕소행 좌석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25분후면 우리집에 당도하리라.
오늘은 야아! 강변의 바람도 좋고, 술도 좋고, 묵은 벗님도 좋았어라.
그 뿐이랴, 회색줄무늬 우산도....흐흐흐 오늘 만큼은! 오늘 만큼은!
직장을 은퇴하고 최근에 내가 운영하던 검도장 사무실에는 언제나 20여개의 우산들이
넘쳐났었다. 특히나 여름장마를 지나고 나면 우산가게인지 검도장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들의 건망증이야 다를바 있겠는가마는 집집마다 흔해터진 것이 우산이니
버리고가면 그뿐, 도대체 찾아가는 사람이 없다.
그리보면, 요즈음 세상에 굴러다니는 우산치고 원래의 제 주인손에서 끝까지 봉사하다가
운명을 다하는 것이 몇개나 될까?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요 돈이라더니 이제는 우산도
돌고 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집의 우산치고 내돈주고 산 것이 거의 없듯이
남들도 사정은 비슷할 터이니 이 세상의 모든 우산들이 어찌 아니 돌고 배기겠는가.
덕소행버스가 우리집 앞에 멈추었다. 기분좋은 춘천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꿈이었다.
“어? 회색빛 줄무늬..... 버스!.. 스톱! 스톱!....”
나의 처절한 절규를 뒤로한채
버스는 또 한개의 외로운 우산을 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다.
“오늘 만큼은.. 오늘 만큼은..”
오오 애절타! 순간의 끝을 그렇게 견디지 못하고
굳디 굳은 맹세가 망사에 오줌새듯 스러지는 순간
정말로 오늘 만큼은 나의 사랑같았던 '회색빛 줄무늬 고급우산'은
또다른 주인의 품을 찾아 좌석버스의 빈자리에서 목놓아 울리라..........
(淡虛堂)
첫댓글 '으음 ...이번 만큼은......' 단단히 맹세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순간의 방심으로 작별하고만 '회색빛 줄무늬 고급우산' 지금은 어느 품에서 영원을 약속할까 싶네요. 햇빛 내려쬐는 날엔 햇빛 가리개로 펴도 좋을 우산.... 손수건 한 장. 볼펜 한 개를 잃어버리면 맘이 짠한 것은 아깝기도 하지만 내 손에 남은 정 때문이지요. 우산 에피소드 잘 읽었습니다. 건강한 여름 나기 하세요.
정말 막판에 너무 약이 올랐어요. 다 된 밥에 코빠뜨리고, 국끓여서 발등에 쏟은 기분이었답니다..^^*
아아, 웃음이 나오는데....저도 그런 기억있답니다. 어린시절 전 몹시 맹해서 우산만 들려보내면 반드시 잊고 옵니다. 비오는 아침 엄마가 다짐을 놓지요 ' 오늘도 우산 잃어버리고 들어 오는날엔 혼날줄 알아." " 네~~" 대답은 맹꽁이처럼 하고 집을 잘 나섰답니다. 오후 하교길 단숨에 오르기엔 좀 가파른 미아리고개 중턱쯤...고운 모래 무더기....친구들과 함께 그 모래를 그냥 못지나치고 모래장난....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근데 어쩝니까 우산을 버리고 온거에요 되돌아서서 모래더미로 달려갓더니..간곳없는 내우산....우산때문에 집에 못들어 가고 남의집 대문깐에 세워둔 리어카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지지리궁상 날이
어두어지자 엄마랑 언니가 저를 찾아....못이기는체 기어나와 집에돌아오니 엄마는 무우국에 밥을 말아 먹이면서" 그래 또 잊어 버렸드나?" ......그래서 우산 귀신이라는 별명이 오랫동안....아직도 이따금 엄마는 우산 귀신 이야기를 하십니다. 듣다가는 빙긋이 웃습니다 잊어버린 우산보다는 그 무우국 기억으로.....근데 이제는 왜 그런맛이 안날까요? 참 맛있었는데....덕분에 옛기억을 찾아 웃어 봅니다.^^
어렸을 때는 산만해서 그렇고, 나이 들어서는 잡념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잃어버리고 가는것이 우산이라고 생각 하지만 가방도 전철.아님 버스에 그냥 두고 내린 답니다~~담허당님!!우산은 또 다른 주인을 만나게 될거예요~가방은 가지고 가신거죠~~
그 우산도 고만큼만이 나와 인연이었나 봅니다...^^*
안타깝지만 누군가에겐 도움이 된다 생각하면 좀 기분이 나아질련지요. 웃음도 나오고 저도 저리 되겠지 싶은 생각에 한참을 숙고하고 갑니다.
네, 누군가에게 보시했다고 생각해야지요. 어차피 영원한 내 것은 없으니까요..^^*
ㅎㅎㅇ 읽어내려가는 중에 서너번은 웃음이 나와 혼자 웃었습니다.
참 재미있네요..
근데 저는 여간해서 무엇을 잊어버리는 수가 극히 드물게 있습니다. 가죽장갑도 한번 산것이 2 30년이고
낡아서 바꿨지만 그건 버리지도 않고 지금도 있습니다.
근데 우리 친구 하나는 양산을 수도 없이 잃어버렸답니다.전철에다 버스에다. 그저 앉는 곳마다 놓고 온답니다.
아주 좋은 선물받은 놈들로 말입니다. 위 보은님 댓글도 읽으며 웃음이 나오고 .....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하시던 담허당님 끝까지 겨드랑이에서 완벽 하셨어야지요..
아마도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저도 그런 사실이 있어서 인가봅니다. 잘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늘순수님은 침착하고 차분하신가봐요. 분실을 잘 안하신다니 부럽습니다.......^^*
넘 잘읽었습니다 표현을아주재밌게하시네요 많이웃었습니다 누구나 그런실수는하지요 언젠가는 그 우산이 주인님께올수도있겠죠 돌고돌아서요 건강하세요
일산장미 님 안녕하세요? 저도 일산 사는 따오기입니다. 같은 곳에 거주해서 반가워요. 수필방 사랑 고맙습니다.
일산장미님, 일산사세요? 저도 일산신도시 첫입주시기에 6년이나 거기서 살았어요. 참 편리한 곳이지요...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저도 일산 사는데...
일산 사는 분들이 많이 모였네요....
호수공원에 잘나가시는지요.
담허당님 글읽으니 우리남편 생각납니다..
이젠 우산 잃어버리고 와도 모른척 할랍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