偶吟(우음)
홍귀달(洪貴達:1438~1504)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겸선(兼善),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1469년(예종 1)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481년(성종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3년 『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좌천되었다.
1504년 손녀(홍언국(洪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격이 강직하고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중종반정 후 신원 되었다.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한가로운 창가에서 날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를 짓고
閑窓日日臥題詩 한창일일와제시
문 앞 골목에는 스산하게 수시로 객들이 흩어지네
門巷蕭條客散時 문항소조객산시
이 고을에서 취하지 않으면 마음 둘 곳이 없으니
除却醉鄕無着處 제각취향무착처
이제부터 내 안위는 상관하지 않으리
從今身不管安危 종금신불관안위
*
시의 배경은 아마도 귀양 가서 지은 시가 아닌가, 싶다.
할 일 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것도 그렇고
배운 것이 글뿐이니,
한가하게 창가에 기대어 시를 짓는다
문밖출입이 끊어진 한적한 시골
문 앞에는 사람의 인기척도 없이 적막하다.
취하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일 곳도 없고
자신의 생사에도 이제 마음이 덤덤해진다..
결국, 경원으로 귀양 가던 도중 단천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絞殺:목 졸라 죽임) 당하였다.
“ 내가 국은(國恩)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그의 기개가 새삼 느껴진다.
*문경시 영순면 의곡리에는 선생의 종택(宗宅)과 재실(齋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