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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서방(郭書房)
전 광 용
다도해(多島海)!
그 음향 속에는 미지의 신비와 꿈이 서리는 낭만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이름 그대로 몇백 몇천의 섬들이 이마를 맞조이듯 비비고 복닥거리면서도 옹기종기 의좋게 제자리를 지키며 거센 태풍과 해일에도 끊임없이 버티어온 남쪽 바다.
백만분지 일의 지도를 펴면 땅콩·팥·보리·수수·벼·조…… 온갖 낟알을 되는대로 뿌려놓은 것만 같은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가물거리는 해역(海域).
그러나 아직 그 누구도 이 섬들의 수효를 정확한 낱셈으로 헤아려내지 못하듯이, 이 섬들은 또한 고을[郡]을 이루는 큰 섬에서부터 이름 없는 무인도(無人島)에 이르기까지,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숨은 이야기를 흘러가는 역사 속에 파묻어가면서 새로운 아침의 사연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속에서도 파 씨만큼 한 점으로밖엔 나타날까 말까, 짐짓 그 지도상에서 묵살되어버린 섬 경도(鏡島).
밖은 아직 완전히 동이 트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베잠방이에 습기가 기어들고 덜미가 선뜻했다.
‘이젠 좀 비가 오려나…….’
곽 서방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농구(農具)가 담긴 지게를 지고 개펄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야 보얀 안개의 장막, 몇 발자국 앞쪽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풀잎의 이슬이 정강이에 감아붙었다.
그는 시들어 말라가는 보리밭께로 돌아서서 자고 난 오줌을 줄기차게 내갈겼다. 등골이 오싹했다. 붙은 김에 두 손가락으로 바꿔 눌러가며 코를 풀어젖혔다. 온몸이 거뜬해짐을 느꼈다. 그제서야 큰기침에 가래침을 실어 내뱉으면서 바지 허리춤을 추스렸다.
곽 서방은 간척지(干拓地) 갯둑에 지게를 내려놓았다. 햇부리가 올려 미는지 주위가 환해왔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다만 자기 자신이 깊은 안개의 숲 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고 지질려 있는 것 같은 답답증을 느낄 뿐이었다.
물때가 되어 밀려들어오는 밀물 소리가 회색 장막의 숨 죽은 개펄을 스쳐 발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게 느껴졌다.
둑에서 내려선 곽 서방은 논두렁을 으스러지게 밟으며 벼 묘판(苗板) 머리에 다다랐다.
안개 속을 거쳐 눈이 닿는 끝까지 누벼보아야 이젠 발자국에 교인 한 움큼의 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대로 팽개치면 며칠이 안 가서 갈라질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권 노인(權老人)의 선산(先山) 골짜기에서 실오라기만큼 흐르던 도랑물은 이미 말라붙었고, 저 건너 당산(堂山) 밑 습지에서 솟아 나오던 샘물도 아주 밑창이 났다.
주위를 한 바퀴 돌래야 한나절 남짓 걸리는 작은 섬, 물줄기를 대어줄 만한 깊은 골짜기 하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나무라고 이름이 붙는 것은 모조리 비로 쓸다시피 할퀴어 갔으니, 내린 빗물이 고이기는커녕 지하수가 솟을 바닥까지 훑어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간밤의 이슬을 맞은 볏모는 잎에 구슬을 담고 아침 한때만이라도 싱싱한 것이 적이 마음에 윤기를 부어주었다.
곽 서방은 여기저기 내솟은 돌피¹에 눈이 갔다. 그러나 벼 잎에 해갈도 안 될 이슬방울 그것마저 떨어질까 아쉬워 논바닥에 들어서지 않고 두렁을 돌면서 허리를 길게 빼고 손 닿는 것만 골라 뽑아갔다.
물 없는 바닥, 끈질기게 내린 뿌리가 굳어가는 땅에 감아붙어 빠지지 않고 대궁²이가 끊어질 뿐이었다.
“젠장……”
곽 서방은 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신문에서는 양수기(揚水機)라도 써서 빨리 제때에 모를 심으라고 야단들이지만 이런 콩알만 한 섬에 그런 기계가 차례에 올 리도 없었지만, 설령 온다손 치더라도 밑물이 없는데 무엇으로 퍼올리느냐는 생각이 앞섰다.
우물을 파서라도…… 곽 서방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어림 반푼어치 없는 일이었다. 이 섬에 벼 심는 논이라고는 고작 권 노인의 재 너머 한 섬지기 그리고 여기 곽 서방의 아직 소금기가 다 빠지지도 않은 간척지 닷 마지기가 있을 뿐이다.
곽 서방은 허리를 펴며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안개가 훨씬 엷어져서 동녘 수평선에 동그란 윤곽이 붉게 물들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에익 또 틀려먹었군.”
그는 맥 빠진 소리를 홀로 내었다.
“농사야 아무래도 사람 힘보다 하늘 덕이 더 크게 마련이지!”
곽 서방은 언젠가의 권 노인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이것은 권 노인뿐만 아니라 천수(天水)³만을 태산같이 믿고 땅을 파온 이 섬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 이었다.
그러나 그때 김운산(金雲山)은 그것을 끝내 반대하지 않았던가. 권 노인의 발의로 마을 사람들이 정성들여 당산에서 부친 기우제(祈雨祭)에 고축(告祝)⁴만이라도 해달라고 그렇게 간구하는데도 끝까지 거절한 그가 아닌가. 이제는 권 노인의 눈에 거슬리던 운산마저 가고 없다.
며칠 전 집집마다 독 밑을 긁어모은 추렴⁵ 쌀로 돼지를 바꾸어 치성을 올렸건만 아직도 비 올 기색은커녕 하늘은 심술궂게 더 말똥하기만 했다.
“땅 위에는 저수지가 생기고 하늘에서는 인공 강우(人工降雨)를 퍼붓게 하는 과학 시대에 그깟 기우제 같은 미신이 될 말이오.”
분명 운산은 그때 이렇게 서술을 돋쳐 외쳤었다.
곽 서방은 그때에도 우리네 살림에야 언제 인공 강우며, 이런 손바닥만 한 섬에 어디 저수지 막을 데나 있느냐고 속심 찬동은 안 갔었다. 다만 운산이 이 섬살이 몇 해 동안에 남겨놓은 채소(柰蔬)의 새로운 재배법에 영향 된 바 컸기에 그의 주장에 그럴듯한 점이 없는 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곽 서방은 당장 목이 타게 말라가는 못자리에서 시선을 돌려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곽 서방은 갯둑으로 돌아왔다.
초갈이⁶한 논바닥은 습기를 잃어 소금기가 보얗게 내돋고 있었다.
이 둑에만 나오면 그는 ‘사라’호 태풍을 연상하게 된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이 조그만 마을에도 예상 외로 피해가 컸었다. 논밭이 흘러 나가고 배가 깨뜨러지고…… 그뿐인가, 순돌네 부자는 배와 더불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나 곽 서방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떡이 굴러들어온 경우였다.
순돌네는 몇 해를 온 식구가 씨름하여 제방을 쌓아 갯논 다섯 마지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겨우 소금기가 빠져 이제부터는 얼마간 수확을 내겠다고 웃음 짓던 바로 그해에 태풍으로 둑이 터졌다. 푸른 논벌은 하룻밤 사이에 송두리째 물에 잠겨 옛 개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을 몇 푼 안 주고 넘겨받은 것이 곽 서방이었다. 그는 품을 사가면서 끊어진 제방을 다시 쌓아 올렸다. 집안 식구들은 한겨울을 그 일로 몽땅 바쳤다.
논을 처음으로 소유한다는 심정, 그것은 곽 서방 자신밖에 모르는 숨은 기쁨이었다.
둑이 다 된 날 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마누라와 둘이서 돼지 두 족을 사다가 고사를 올렸다. 그들 부부는 몇 번이고 바다와 둑과 당산을 향하여 절을 했다. 당산에 모신 용왕(龍王)은 이들에겐, 우주 만상(萬象)을 섭리하는 절대적인 대상으로 믿어졌다. 농사가 잘되는 것도, 바다의 노여움도, 모두 여기에 달렸다고 여겨졌다. 이 치성이 있기 전에는 물론 그 후로 얼마 동안 곽 서방은 부정(不淨)을 꺼려 마누라의 옆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꼭 갯둑을 한 바퀴 돌고야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바람이 거세거나 비 오는 밤에는 몇 시간이고 바다 쪽에 눈을 박고 둑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성 (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이것은 평생 일하는 것밖에 자기 직분은 없다고 생각해온 그에게 삶의 철칙이요 신조였다.
그는 새해의 논갈이 철을, 첫아들 기다릴 때보다 더 초조하고 희망에 차 고대 했었다.
뱃사공인 아버지가 환갑이 넘을 때까지 배를 타다가 이 섬에 정착하여 자기에게 남겨준 것은 조그마한 전마선⁸ 한 척, 그것도 언젠가의 폭풍에 파선을 당하고, 겨우 생명만 부지하여 맨손으로 나앉게 되었다.
배꾼, 머슴살이, 몸을 아끼지 않고 손톱이 닳게 일해온 보람으로 장가를 들고 얼마 안 되어 산비탈의 박토 나절갈이를 얻게 되었다.
처음으로 밭을 내 것으로 소유하던 때의 기쁨,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자다가 이불을 차 던지며 뛰어 일어나고 싶은 격한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새로 논을 장만하게 된 것, 그것도 이 섬에서 두 뙈기밖에 안 되는 것 중의 하나, 마을의 으뜸인 권 노인 다음에 논을 가져보는 자기, 그는 밭을 얻을 때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한 기쁨과 자랑을 느꼈다.
그 후 삼 년, 이제는 논의 염분도 거의 다 빠졌다. 잘하면 금년부터는 논에서 제 소출을 다 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큰딸은 무식한 대로 출가를 시켰고, 다음 딸은 간신히 국민학교만 졸업을 시켰다. 내년 봄이면 아들놈은 국민학교 졸업이다. 이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중학교에 입학을 시켜야 하겠다. 아비는 학교는 고사하고 서당 문 앞에도 가본 일이 없다. 다행히 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줄 알 정도로 면무식이나 된 것도 자기 스스로의 이를 간 억지와, 끈덕진 노력의 덕분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은 맑아지고 바람기 없이 후덥지근했다. 바다는 만조(滿潮)가 되어 둑 중턱까지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섬 너머 섬, 산 끝에 산모롱이 겹쳐, 굴곡진 병풍으로 둘러친 듯한 내해(內海), 그러나 뱃길로 떠나면 그 틈 사이를 용케도 누비어 아득히 수평선이 보이는 큰 바다로 잇따랐다. 고요한 바다, 그것은 섬사람들에게는 평화로운 삶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폭풍을 머금은 성낸 바다는 죽음의 무덤이기도 했다. 가슴이 탁 트이게 늠름하고 시원하면서도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을 숨 가쁘게 안겨다 주는 바다……
찰랑거리는 잔물결에 새로 쌓은 둑의 모래알 하나라도 흘러내리는 것이 곽 서방에게는 몹시 아쉬웠다.
곽 서방은 다시 논바닥의 진흙을 파 갯둑에 퍼 올리기 시작했다. 둑의 아래 절반은 큰 돌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씻길 염려가 덜했지만, 위쪽은 아직 완전히 다져지지 않은 흙이어서 늘 조심이 갔다. 제방 경사면에 풀뿌리가 엉킨 곳은 모진 비에도 씻기지 않았지만, 거센 바람목이어서 알맹이 흙바탕은 가랑비에도 모래가 드티었다.
그는 빗물이 홈 져 흐른 자국에 흙을 얹고는 삽 등으로 두들겨다져 갔다.
‘아무렴. 그해 비가 그해 안에 오지 않구서야……
가뭄이 목 질기게 버티는 꼴이 이제 진짜 장마철에 들기만 하면 기어코 홍수 사태를 내고야 말 것이라는 예측이 가끔 그를 불안감에 싸이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은 희망에 벅차기도 했다. 누런 논벌, 알알이 야무지게 익은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갈바람에 황금물결을 이룰 가을. 한 마지기에 한 섬씩 쳐도 닷 섬. 그는 이마에 줄지어 흐르는 땀을 흙 묻은 손등으로 훑어 내리면서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히죽이 웃었다.
곽 서방은 둑 위에 올라와 궁둥방아를 찧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큰숨을 돌리고 난 그는 시멘트 종이 담배쌈지를 끄집어내었다. 짓눌려 잠이 잔 풍년초¹⁰ 오리, 그는 신문지 조각에 담배를 말아 침으로 붙여 불을 댕겼다. 양 볼이 오므라지게 빨아 길게 내뿜었다.
땀이 배어 등에 찰싹 달라붙은 베적삼이 부드러운 바닷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등줄기가 간지러우며 선뜻했다. 그는 등 뒤에 손을 넣어 적삼을 들었다 놓았다. 한결 시원했다.
해풍 길목을 막아 골짜기 옴폭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 곽 서방은 불현듯 마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초가집들. 그 속에서도 두 개의 색다른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맨 뒤쪽 나무가 우거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마을을 굽어보듯이 의젓한 기와집이 권 노인네, 아래쪽에 조금 떨어져 널찍한 뜰 한복판에 함석지붕을 한 새집, 파랑 대문이 유별히 표 나는 것이 구장네 집.
마을 사람들의 살림은 이 둑에서 올려다보는 한눈 속에서 이미 분간이 서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곽 서방에게 새삼 떠올랐다.
자기 집은? 뒤뜰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 덕택으로 고만고만한 집들 속에서나마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곽 서방은 기뻤다.
‘아무렴 겉치레보다 실속이 있어야지.’
흐뭇한 기분에 그는 담배 한 대를 다시 말아 붙였다.
운산이 와 있을 때 자주 이 둑에 앉아 마을과 바다 쪽을 번갈아 보면서 이 야기를 나누었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운산은 이야기하고 자기는 들었다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
“곽 형……”
나이 하나 아래인 운산은 자기를 늘 이렇게 불렀다.
“결국 농사꾼은 제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의 원조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의뢰심만 늘게 되는 것이지 실지의 보템은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농민도 잘살 수 있겠느냐는 기다란 이야기 끝막음에 덧붙인 말이었다. 곽 서방은 이때도 역시 토론하거나 의견 교환하는 대상이 아니라 듣기만 하는 상대였다.
“해방 십오 년에 정부가 농민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니 눈곱만치라도…… 속담에 부조를 못 한대두 제상이나 치지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그 꼴입니다. 보태어주지 못해도 뜯어가지나 말았으면…….”
그 말에는 곽 서방의 귀도 솔깃했다. 누구한테 평생 손 내밀어 본 일이 없는 그였다. 그저 혼자 두더지처럼 일만 해왔다.
그는 광대뼈가 앙상하게 말랐으면서도 불꽃이 튈 듯이 광채가 나던 운산의 눈동자를 그리면서, 끝까지 타는 종이 냄새가 매캐하게 나는 담배꽁초를 입김으로 확 뱉어버리면서 일어섰다.
곽 서방은 지게에 담겨진 흙을 갯둑 바다 쪽 경사면에 쏟아붓곤 발로 다져갔다. 가파른 둑 섶으로 굴러 내려가는 흙덩어리는 감물¹¹ 속에 잠기자 장덩이처럼 풀어져 수면을 흙물로 적시며 번져갔다.
여느 때도 일손을 붙잡으면 지치는 줄 모르는 그였지만, 이 신답(新畓) 벌에만 나오면 더욱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다 쪽에서 전마선 한 척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노 젓고 있는 사람의 ‘헬멧.’ 이 마을에 단 하나 밖에 없어 동네 아이들이 ‘바가지’라고 부르는 그 표 나는 모자로 보아 아마 구장이 어디 갔다 오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논바닥에 내려온 곽 서방은 내리박은 삽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서는 흙덩이를 떠 지게에 담았다. 아득한 옛날부터 몇천 몇만 년이고 모르게 쌓여온 매태¹² 흙, 그는 흙덩이를 억센 손아귀에 움켜쥐고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비볐다. 반죽한 콩고물이 부서지듯이 매끄럽게 비벼지는 검붉은 흙은 모래 한 알 없이 보드라웠다. 그는 마치 첫날밤의 신방 자리에서 마누라의 젖가슴을 더듬던 때의 부드러움을 되살려 느끼는 것만 같은 헷갈림에 사로잡혔다.
곽 서방은 또 비시시 슴새어 나오는 엷은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주위에서 누가 보지나 않는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곽 서방!”
그는 흠칫하며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둑 위에는 벌써 구장이 와 서 있지 않는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곽 서방 얼굴에는 겸연쩍은 웃음이 번져갔다.
“곽 서방은 쉼도 없구만.”
“……”
대답 대신 곽 서방은 그대로 웃고만 있었다.
“몸 좀 돌보며 해야지,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구서야…….”
“어디 구장님 같이 팔자가 펴야지요.”
그는 구장이 메고 있는 낚싯대와 투망에 눈길을 보내면서 대꾸했다.
“이제 새 부자가 됐으니 쉬엄쉬엄 해가야지.”
“어데요.”
사실 구장의 말 속에는 농담 아닌 진담이 섞여 있다고 곽 서방은 생각이 갔다.
범선(帆船) 한 척에 부속선인 전마선을 곁들여 소유하고 있는 구장이다. 거기에 농토도 권 노인 다음가는 많은 면적을 경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논만은 가져보지 못한 그다.
수원(水源)이 짧은 섬엔 밭을 엎어 신답을 일굴 자리라곤 거의 없다. 기껏 간석지(干潟地)를 막아 염분을 빼고 논을 만들어야 하지만, 개인의 사소한 자금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구장뿐만 아니라 곽 서방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곽 서방은 흐뭇이 밀려 오르는 만족감을 금할 길 없었다.
이 논뙈기만 하더라도 그때 조금만 손을 늦게 썼으면 구장 차례로 돌아갈 뻔했었다. 일이 다 결말난 것을 알고 구장이 갑절의 대가를 치를 터이니 자기에게로 넘겨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코웃음치고 뿌리쳤다. 처음 얼마 동안은 피차의 감정이 묘했지만 이젠 소유권도 옮기고 둑까지 다시 수축했으니, 마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도 구장은 그 이상 벋대지 않고 체념해버린 눈치였다.
곽 서방은 흙짐을 져다 둑에 붓고는 지게를 벗으며 허리를 펐다. 그는 구장이 권하는 퀄련을 받아 불을 붙이곤 둑 위에 마주앉았다.
“이 논두 올부터는 제 소출이 나겠는걸.”
구장의 눈길은 논벌에 쏠리고 있었다. 곽 서방은 구장을 건너다보던 시선을 논 쪽으로 옮겨 외면하면서 입을 열었다.
“웬걸요, 아직 소금기도 다 빠지지 않은 데다 이렇게 못자리까지 바닥이 갈라질 판에 어림도 없겠는걸요.”
“염분이야 인제 다 빠졌지. 비도 아직 한 열흘은 더 기다릴 수 있으니 전연 가망이 없는 것두 아닐 테지.”
“하지만 모판이 견디어 날라구요.”
구장은 담배를 길게 빨고 나서 콧수염 사이로 연기를 내뿜으며 곽 서방을 건너다보았다.
“참 그렇잖아두 한번 만나려는 참이었는데…….”
구장은 말끝에 침을 삼키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곽 서방은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하고 구장의 동이 난 말끝을 기다렸다.
“실은 이번 배를 수리하는 데 의외로 비용이 많이 들어서 어망(漁網)을 준비할 자금이 좀 부족하단 말이야. 많지도 않은 돈인데……, 곽 서방 어디 한 삼천 원만 돌려줄 수 없겠어? 이번 며루치 철만 지나면 곧 돌릴 터이니, 어디 구멍 좀 메워주구려.”
곽 서방은 예상 외의 청탁을 받고 우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고리채 정리 후, 권 노인의 주머니는 홀딱 잠겨졌으니 잔돈 한푼 어쩌는 수 있어야지.”
곽 서방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사실 자기에게는, 전번 박람회 구경을 단체로 가면 경비가 적게 든다고 권유를 받았을 때 아들놈이 라디오를 사내라고 조르기에 눈을 딱 감고 단념한 덕분에 남겨진 돈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뭄에는 씨가 남아도 수해에는 씨도 못 찾는다는데.”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지만, 곽 서방은 구장이 남기고 간 여운을 혼자 입속에서 되뇌면서 기대와 갈망에 찬 눈매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게 갠 하늘, 그러나 비를 머금을 전조인지 새파랗게 트이지 못하고 젖빛처럼 뽀얀 하늘이었다. 뭍의 동북쪽 먼 산봉우리 위에 뭉게구름이 꿈틀거리고 올리미는 것이 눈에 띄나, 그것으로 비를 바라기엔 너무도 아득한 것만 같았다.
흙을 몇 짐 더 지고 난 곽 서방은 지게를 팽개치고 잠방이를 활활 벗어 던졌다.
숨 막히는 무더움을 간드러진 실바람 정도로 그 이상 견디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둑 위에서 바닷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물은 차지 않았지만 땀 밴 몸이라 사타구니께가 약간 저려올랐다. 둑 갓¹³으로 슬슬 돌던 그는 바다 쪽으로 한참 나갔다가 다시 돌아 천천히 헤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에서 나서 바다에서 자란 그였지만 아무리 물결이 잔 날이라도 그에게는 조심이 갔다. 이렇게 혼자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배도 한 척 가졌으면……
평소에 품었던 소원이 다시 그의 머리를 비비고 되살아났다.
“토지 개혁을 열 번 하면 무엇해, 원래 농토가 좁은데. 아무리 경작자에게 준다손 치더라도 영세농은 면할 수 없거든.”
운산의 말이 떠올랐다.
“적어도 지금 농사짓는 사람의 삼분의 일만 남기고 삼분의 이는 공장으로 가든가, 어디 다른 직업을 택하기 전에는 아무리 농사를 개량해도 농민이 다 잘살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운산은 이런 말도 가끔 터뜨렸다.
사실 곽 서방 자신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다만 자기는 운산같이 그런 이론이 밝은 이야기는 할 수 없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그 이야기에 머리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마을에 70호나 되는 농가가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일 년 계량이 지탱되는 집이라곤 몇 집 안 된다. 적어도 그 속의 2, 30호가량만 남아서 그 토지를 경작해야 겨우 자급자족이 될까 말까 한 정도가 아닌가. 이 작은 섬에서 기껏 토지를 팔고 사고 해보았댔자,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뻔한 면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거기에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중병이 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되려면, 죽도록 일해도 이 좁은 농토론 안 된다니까요.”
운산의 이러한 이야기는 곽 서방에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들을 당장 내년 봄에 진학시켜야 할 경우에 다다르고 보니 시답잖던 그런 이야기가 자기를 두고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다 이제 배 한 척 만 갖추었으면……’
그는 서서히 헤엄을 치면서 저쪽 갯가 언덕 밑 고목에 매어놓은 구장네 전마선에 눈이 갔다.
‘전마선쯤이야 있으나 마나 한 거구, 그 범선을 하나 장만해야지……’
그는 입속에 들어온 감물을 내뿜으면서 생각은 여전히 배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토 한 평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라곤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손으로 이루어놓은 그야말로 자수성가(自手成家)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일한 재산이었던 쪽배, 그것만은 여태껏 복구하지 못했다.
“여보!”
어느 틈에 왔는지 마누라가 점심 바구니를 이고 둑에 와 서 있었다.
곽 서방은 얼굴의 감물을 홈쳐 내리면서 둑께로 나왔다. 그는 몸의 물기를 대강 닦아내고 잠방이를 주워 입었다.
몸이 시원하고 기분은 훨씬 거뜬했다.
산 밑 도랑 옆 버드나무 아래에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숟갈 목이 부러질 듯이 소담하게 퍼 넣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아내는 입 가장자리에 엷은 웃음을 여물리고 있었다.
내리쪼이는 뙤약볕을 맞으며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신통한 대접을 못 하는 것이 아내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지 않으니까 고추도 호되게 독이 들었군.”
곽 서방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문덕 잘라 씹다가 매움에 못이겨 물을 마시었다.
“생선이라군 별로 잡히지도 않지만, 제값이 가는 건 다 대처로 실어가니, 그것도 얻어먹기 힘들군요.”
“괜한 소리, 이만하면 어떻다구…….”
보리밥에 호박 된장찌개.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끼니를 거의 고구마로 때우는데,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곽 서방은 생각했다.
담배에 불을 댕겨 빨면서 트림에 입맛을 다시는 남편의 만족한 듯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내는 어지간히 마음이 피어갔다.
한낮이 기울어도 오후의 태양은 서슬을 꺾이지 않고 더욱 거세게 내리쬐었다.
한 쉼 돌리고 난 곽 서방은 밭일로 달라붙었다. 밭이래야 두렁을 둔 대로 논바닥을 갈아엎은 이모작(二毛作) 채원(棗園)¹⁴이다.
언덕을 끼고 바람길을 막아 앉은 완만한 계단식 경사지, 양파〔玉惹〕밭 너머는 당근, 그 바로 옆은 캬베츠, 그리고 맨 아래쪽 습한 질땅에는 극조생(極早生) 신종(新種) 봄배추를 심었다.
이런 것은 예전에는 심어볼 엄두도 내보지 못했던 종류들이다. 특히 ‘장강 교배(交配) 이호백채(二號白采)’ 란 기다란 수입종(輸入種)의 명칭은, 곽 서방으로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지만, 운산의 권에 못 이겨 심었고, 온상(溫床)이라는 것도 그의 덕으로 처음 시험해본 재배법이었다.
사실 첫해 여름이 극조생 배추 수확기에는 즐거움보다 놀라움이 더 컸었다. 봄배추야 어디 굳어지는 걸로 알고 심어왔던가. 깊지는 않지만 연한 고갱이 맛으로였다. 겨울 김장이 끝나면 그 뒤를 이어 대는 향긋한 풋김지, 그것이 아니면 기껏 토장국 건더기로 쓸 정도로 생각해왔었다. 이것이 보릿고개로 메마른 철의 돈값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을배추에 못지않게 단단한 배추, 어떤 것은 온통 고갱이만으로 차곡히 박혀 돌처럼 단단한 것이 굴려도 찌그러지지 않고 새하얀 속살이 입 맛을 건드리는 신선미를 풍겨주었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은 자기를 두고 한 말이라고 곽 서방은 그때 이래 생각해온 것이었다. 그것도 자기와 운산의 경우를……
운산이 가솔을 거느리고 이 마을에 온 것은 칠 년 전의 일이다. 좁쌀 알같이 뿌려진 섬들 속에서 하필이면 이 섬에 왔을까 하는 것은 곽 서방이 운산에게 품은 오랜 수수께끼였지만, 그것은 운산의 깡마른 얼굴을 스치는 간간의 너털웃음에 섞여 나오는 푸념속의 ‘그도 다 곽 형과의 연분이지…….’ 하는 알쏭달쏭한 한마디로 덮여져 가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참말 개운하게 풀려진 것은,
운산이 이 섬살이를 끝내고 떠나는 때였었다.
돌산(突山) 섬에서의, 그것도 얼마 동안의, 살림살이가 여의치 않아 다시 육지로 돌아가려던 운산이, 새벽 나룻배를 기다리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을 뿐이라는 극히 예사로운 노순(路順)의 뱃길 때문이었음을 알고 난 후에도, 운산 말마따나 연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곽 서방은 버리지 못했다.
저녁 어스름, 운산 일가는 곽 서방네 툇마루 앞에 보따리를 내렸다.
육지에 가야 조상 전래전(傳來田)의 농토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운산…… 짧은 봄밤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더욱 빠르게 새어갔다.
곽 서방의 묵직하고 누그러진 성질과 대 곧은 인품은 운산의 강직한 성격 에 어울렸다.
“인간도처 (人間到處)에 유청산(有靑山)이라니 어디 또 짐을 풀어봅시다.”
체념인지 포기인지 모를 운산의 이 한마디는 곽 서방의 호의에 합류되었다.
곽 서방은 운산이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 농사 개량의 새로운 방법에 반생을 바쳤다는 체험담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이게 정말 농사꾼인가 하는 반신반의를 완전히 씻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운산의, 대상을 꿰뚫는 듯이 쏘아보는 눈동자 속에 사람 됨됨이의 진실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 농가의 경험담 속에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천력을 넘겨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산의 그러한 노력이 참말 보람찬 열매를 맺기 시작한 광양 두메산골의 운산농장(雲山農場) 개척 실기가 이 봄에 대대적으로 신문 보도된 후에야, 곽 서방도 자기의 사람 보는 안목에 틀림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 하고, 무릎을 치면서 제 일처럼 기뻐했던 것이다.
곽 서방이 내놓은 오백 평 정도의 밭과 권 노인에게서 빌린 서 마지기 논으로 운산의 새로운 농사는 시작되었다.
수십 년래, 아니 수백 년래 조상들이 가꾸어오던 재래식 그대로, 그것도 보리니 감자니 하는 판에 박은 농사로만 일관해오던 마을 사람들은 농사꾼 같지 않은 운산의 출현을 비웃음에 겹친 가느다란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곽 서방은 운산이 시키는 대로 설사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 있어도 그 성의와 열성을 저버릴 수 없어 그대로 따랐었다.
“지금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땀을 흘려야 잘살 구멍은 없어요.”
온상에 퇴비를 밟아 넣고 땀방울이 번진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넌지시 건네는 운산의 말을 들으면서도, 곽 서방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자꾸만 밟아 다질 뿐 대꾸할 말을 찾아낼 수 없어 같이 웃음으로 대할 뿐이었다.
“자급자족이란 원시적인 방법밖에 안 돼요. 그저 제 털을 뽑아 제 구멍에 박는 격이거든요.”
곽 서방은 계속 퇴비(堆肥)를 퍼 넣고는 밟아 다질 뿐 대답이 없이 듣고만 있었다.
“비철에 손쉽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그것도 비싼 값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해야 한단 말입니다.”
물을 뿌려가며 두 자가웃이나 깊이 밟아 다진 퇴비 위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그 위에다 흙을 덮어 다지고 온상 속이 얼마간 잠이 잔 후에야 극조생 배추 씨를 뿌렸다.
흙 속에 손을 넣으면 후끈하게 더운 기가 번져왔다.
곽 서방은 운산이 하라는 대로 일을 거들면서도 신기한 생각만 들었다. 이른 봄이라고는 하지만 바깥 날씨는 차가운 이월 하순, 다른 밭농사는 아직 씨를 뿌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계절에 그것도 추위에 가장 약한 배추를 심다니…… 이것이 자라 볼만한 물건이 될까 하는 의혹과 기대가 한데 겹쳐왔다.
“남의 것보다 내 것,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자기가 해보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거든요.”
자기 온상 일이 끝난 다음 억지로 권유하여 그 옆에 나란히 만들어놓은 곽 서방의 온상 안에서 씨를 뿌리며 운산이 넌지시 던진 말이었다.
“나야 뭘 알아요. 보구 들은 것이 있어야지!”
곽 서방은 이마의 방울진 땀을 씻을 염도 않고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운산이 뿌려진 씨앗 위에 흙을 덮고 물을 바가지에 떠서는 손가락으로 흩어 뿌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곽 서방의 눈동자는 호기와 희망에 차 있었다.
“인제 물뿌리개도 하나 장만해야겠는걸…… 모종을 하구 난 뒤까지 이런 원시적 방법을 쓸 수는 없으니까?”
군색스럽게 바가지 물을 흩어 뿌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곽 서방도 같은 심정 이었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아직 초입인걸. 이제부터 매일 신경을 쓰고 게을리하지 말아야 해요.”
곽 서방과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 운산은 첫 모금을 길게 빨아 삼키면서 허리를 펐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온상 속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싹이 돋아 잎이 일고여덟이 될 때까지, 십이삼 도의 온도를 유지 해가야만 해요.”
“……”
곽 서방은 말이 없었다. 도대체 농사짓는 데 온도 몇 도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우순풍조(雨順風調)라는 문자는 일찍이 들은 풍월로 귀 익은 말이었다.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풀이 나면 김을 매고, 모종이 자라면 옮겨 심고, 똥오줌 거름을 주고, 그것도 암모니아니 과인산석회니 하는 금비(金肥)¹⁷가 나온 후 훨씬 쉬워졌다. 그리하여 가을이 되 어 거두어들이면 그만이었다.
홍수가 나면 무너진 둑을 쌓고, 가뭄이 길면 있는 물이나 대어주고, 그것만으로 족했다. 기껏해야 김 몇 번을 더 매어, 아무개네 밭이 풀이 없다는 마을 공론이 돌면, 그것이 부지런한 농군과 게으른 농군의 구분으로 되었었다.
언제 종자 개량을 해보았던가. 새로운 농작물을 시험 재배해보았던가. 꽤 까다롭게 한다는 축이, 겨우 이른 봄이면 옆의 섬까지 배를 타고 가서 종자를 바꾸어 오는 일 정도였다. 그나 그뿐인가, 상처가 나면 장덩이를 붙이고, 배가 아프면 풀뿌리를 달여 먹고. 고쁠 정도는 억지로 참아가며 날짜를 보내면 되었다. 맹장염이든 복막염이든 위궤양이든 몸을 땅에 붙이지 못하게 앓다가 죽어도 다 속탈이나 속병 한마디로 단정 했었고, 결핵이든 늑막염이든 고질이 되게 몇 해고 누워 신음해도 가슴앓이로 통했다. 병세가 위독하여, 다 글러질 무렵에야 억지로 빚을 얻어 큰 섬 한방의를 찾아가거나 육지에 있는 도립 병원으로 끌고 간댔자 이미 승패가 날 무렵, 기적이 없는 한 송장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저 하늘을 믿고 땅을 의지하고만 살아왔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쉬운 대로 무식이 태평이라는 식의 안이한 평화였는지도 몰랐다.
“배춧잎이 예닐곱 났을 때 온도가 내리면 쫑이 나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면 배추가 굳어지지 않고 그대로 쫑에 씨가 앉게 되니까 하룻밤 사이에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된단 말이오.”
온도가 내리면 하룻밤 사이에 쫑이 나다니……, 곽 서방으로서는 알쏭달쏭한 일 같으면서도 아무튼 신기하기만 했다.
“짐작으로도 어느 정도 맞추어갈 수 있지만, 정확하게 하자면 한란계(寒暖計)를 달아두어야 해요.”
한란계, 그것도 곽 서방으로서는 지금까지의 자기 농사법에서는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 기물이었다.
곽 서방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곧 온상으로 달려갔다. 이것은 꼭 첫 태아의 커가는 짐작을 마누라의 배를 훑어 어루만지면서느끼던 첫 기쁨의 시절과도 같은 심경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는 해가 어지간히 높이 솟아 기온이 더워지면, 온상 위에 덮은 짚 멍석을 말아 거둔 다음, 네모진 기름종이를 슬며시 들고 온상 속 송이송이 솟은 새싹들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비, 비다!”
잠꼬대 모양 외치며 곽 서방은 잠자리에서 소스라쳐 일어났다.
뚝, 뚝·, 뚝·뚝.
한두 방울 떨어질 때 이미 그의 잠은 깨었었다. 이것이 꿈이 아닌가, 그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창살을 울리며 쫙 퍼붓는 소리를 듣고야 그는 함성을 쳤었다.
일어나는 대로 곽 서방은 창문을 발길로 냅다 차고 어둠 속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이마에 스쳐오는 시원한 찬기. 오랫동안 깡말랐던 땅에서 풍겨 오르는 흙냄새, 새벽의 숨 죽은 세상을 헤살짓고 통쾌하게 퍼붓는 빗소리……
“여보. 비가 와. 비가…….”
그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마누라를 흔들어 깨워놓고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참말 춤이라도 추고 싶도록 기뻤다.
갑작스런 충격 탓에 그는 엉겁결에 마당 쪽으로 뛰어내렸다. 머리를 치켜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선뜻 시원할 뿐이었다.
그는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낯을 가리는 빗물을 홈칠 염도 않고 서 있었다.
‘고마우신 하늘.’
살았다는 안도와 무엇엔가 모르게 고마워지는 심정으로 뻐근한 가슴……
그는 맨발 그대로 축축히 젖어가는 땅의 부드러움을 밟으며 서서히 헛간 쪽으로 걸어갔다.
헛간 속은 더욱 캄캄했다.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조바심 속에 서성거리면서 금세 해야 할 일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헛간 앞에 우두커니 서서 빗소리에만 스스로 취해가고 있었다.
‘참말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비는 계속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대로 빗속에 서서 흠뻑 젖어가며 동이 트기를 기다려도 흡족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방에 불이 켜지며 마누라의 움직이는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거렸다.
그는 다시 토방 마루 쪽으로 철벙철벙 걸어갔다.
또 멍청히 서서 어둠 속, 비의 장막을 꿰뚫어지게 쏘아볼 뿐이었다. 흙 범벅이 된 발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대로 방 안에 들어가 앉고는 못 배길 심정이었다.
‘무엇이든 해야겠는데…….’
그러나 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여전히 없었다.:
다시 뜰 한가운데 장승 모양 서서 비를 실컷 맞아보았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내리갈기는 빗소리 속에서 흘러갔다. 그제서야 굴뚝 옆에 그대로 팽개쳐둔 멍석이니 가마니니 하는 것들이 생각났다. 지금껏 자기는 묘판 모내기와 꿈 같은 비만을 줄잡아 생각했지, 정작 뜰 안의 손 가까운 것들은 잊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다그쳐 느껴졌다.
멍석을 비 안 맞는 처마 밑으로 다가놓는데 마누라가 등불을 들고 나왔다. 마누라의 얼굴을 돌아보려는 순간 등불은 비바람에 까물거리다가 찍찍대며 꺼져버렸다.
마누라가 다시 불붙이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 곽 서방은 손짐작으로 비 맞을 만한 것들을 생각키는 대로 대충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무지 들뜬 가슴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곽 서방은 헛간 속을 더듬어 삽을 찾아 들고 사립문을 나섰다. 그제서야 마을 개들이 서로 맞받아 짖어대고 여기저기 깜박이는 등불 속에 사람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빗속을 뚫고 들려왔다.
‘인제 됐어, 됐어……’
어둠 속을 비에 흠뻑 젖어 걸으며 그는 몇 번이고 기쁨에 찬 외마디 감격을 되풀이 했다.
곽 서방은 삽을 짚고 갯둑에 섰다. 밀물 때여서 바다 쪽도 캄캄했다. 그는 논두렁에 내려섰다.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어댔다.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까짓 건 마음에 둘 여유도 없었다.
콸콸 흐르는 도랑물 소리, 빗소리. 그 속에 간간이 섞이는 개구리 울음소리. 곽 서방은 어림짐작으로 물이 흘러들어갈 논꼬를 삽에 힘을 주어 깊숙이 따갔다.
초갈이 논바닥도 질척질척해왔다. 그러나 모를 내려면 아직 몇 시간 더 퍼부어야만 할 것 같았다.
물이 괴기 시작한 묘판에 들어선 그는 흘러들어온 물이 빠지지 않게 논두렁가를 돌면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멈출 줄 모르는 거센 빗속에 어슴푸레 먼동이 터오는 것이 느껴졌다. 흥건히 물이 괴어가는 논벌이 횐한 빛으로 눈어림 되어왔다.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홀랑 젖은 곽 서방은 그대로 젖은 줄도 추운 줄도 모르고 삽으로 높은 쪽의 흙을 낮은 물탕 쪽으로 퍼던지기 시작했다.
날은 훤히 밝아왔다.
낮부터 모내기를 시작해야겠다고 벼르는 곽 서방의 가슴은 새아침과 더불어 더욱 희망에 찬 기쁨으로 벅차갔다.
모내기는 비를 맞아가면서도 즐거움 속에 계속되었다.
마누라, 아들, 딸 할 것 없이 식구가 동원되었을뿐더러, 이웃의 품앗이꾼까지 한데 어울렸지만 처음 솜씨라 여간 서투른 게 아니었다. 권 노인네 농터에서 손이 다져진 경험자라고는 곽 서방 자기와 앞집 삼돌이뿐이었다.
곽 서방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운산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엇 하나 남보다 새롭게 해보겠다는 생각들이 있어야지……”
다음에 무슨 말이 계속될지 곽 서방은 운산의 입을 지키고 있었다.
“글쎄 일본 놈들의 그 사나운 등쌀에도 모내기 정조식(正條植)²¹을 보급시키는 데 십 여 년이 걸렸다고들 하니까…….”
모 심고 난 푸른 논벌이 아무 쪽으로 보아도 벼 포기가 족족 곧게 줄이 간 그것이 정조식이라는 것도 그때에 얻어들은 이야기다.
육지에 들를 때마다 눈에 띄어지는 그 시원스럽게 줄이 곧은 벼포기의 싱싱한 논벌을 바라보면서도 그저 논 몇 마지기 가졌으면 하는 욕심뿐이었지, 그렇게 모내기하는 방법에까지 마음이 가지는 않았었다. 사실 몇 해를 두고 권 노인네 모내기를 거들었지만 기껏 한쪽만 줄을 지고 그 줄에 박힌 붉은 점에다 그대로 심는 식의 한 줄 맞춤으로 했으니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칠 까닭이 없었다.
정조식을 하면 기음매기²²를 비롯한 모든 손품이 덜 들고 거기다 수확도 많이 난다고 운산이 얘기했지만, 그때 곽 서방은 남의 일같이 그대로 귀 밖으로 흘려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지금 자기 논에 모내기를 하게 되니 지나갈 바람으로 여겼던 운산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곽 서방은 노끈을 장만하여 붉은 천으로 같은 간격의 표지를 해들고 나왔지만, 이 서투른 패들을 거느리고는 한쪽 줄만 맞추며 심는 것도 여간 품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줄 한줄 넘기며 비뚤게 심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해가면서도,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제야 겨우 운산의 덤덤한 이야기를 되새기는 자기를 생각하며 솟구쳐오는 미안감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아무튼 곽 서방은 기뻤다. 깡말랐던 논에 질펀히 물이 괴고 엉성하던 흙탕 바닥이 한 배미 한 배미 푸른 벌로 변해가는 것이 다른 어느 일보다도 즐거웠다. 선친의 제삿날이나 명절 이외에는 쌀밥이라곤 구경해본 일이 없었다. 그것도 제상에 놓는 메²³ 한 그릇이 고작이고 음복할 때는 고구마나 보리를 섞게 마련이었다. 올해 농사만 제대로 되면 어린것들에게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쌀밥을 생일날만이라도 푸짐하게 한번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곽 서방은 곧, 그런 먹는 문제보다 남의 논이 아닌 제 논에 자기 스스로 모를 심는다는 그것만으로 가슴이 벅차도록 감격에 열띠어갔다.
새봄에는 기어코 아들놈을 중학교에 입학시켜야 한다. 다달이 생돈으로는 학자금을 대낼 도리가 없다. 우선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씩 보내면 되지 않을까. 방학을 빼면 열 가마, 거기에 등록금, 어떻게 열다섯 가마의 소출만 났으면 일은 저절로 틔어질 것만 같았다.
집에서 먹는 거야 이 논이 없을 때에도 그대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가면서 한 포기 한 포기에 정성을 부어 심어갔다.
거기에 극조생 배추의 수입 조가 있지 않은가.
훤한 천지가 바로 앞에 펼쳐진 것만 같은 환희 속에서 곽 서방은 남몰래 웃음을 지어갔다.
“하, 수고들 하는군. 곽 서방더러 살라구 오는 비야…….”
돌아다보지 않아도 털털한 구장의 말투임을 곽 서방은 알아차렸다.
“웬걸요, 어디 이 논에만 오는 비라구요……”
모내기 줄을 넘겨 몇 번 추어 고르잡아 꼬챙이를 논두렁 섶에 박은 다음 곽 서방은 얼굴을 돌이켰다.
“어디, 신답 가진 사람이야 곽 서방밖에 또 누구 있는가.”
악의 없는 농조의 말이었지만, 곽 서방은 논을 사들일 때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아니, 밭곡식도 다 말라 죽게 됐는데…….”
“하기야 그렇기두 하지만, 그깐 밭농사야 어디 논에 댈라구.”
곽 서방은 입을 헤벌린 채 웃음으로 대꾸를 버무려갔다.
“참, 그렇지 않아두 저녁엔 마을에다 알릴려구 했는데, 내일 서울서 손님이 오기루 돼 있어.”
“……”
곽 서방은 머리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멍하니 구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자매부락(姉妹部落)이라구, 신문에 자주 나지 않아? 그것이 이번엔 우리 차례로 온 모양이야…….”
신문이라고는 가끔 구장 댁에 들렀을 때 아는 글자나 대충 주워보는 정도의 곽 서방으로는 그 이상의 상세한 사연은 알 길이 없었다.
모내기를 끝낸 곽 서방은 분무기(噴霧器)와 소독약 통을 들고 극조생 배추밭으로 나갔다.
무엇인가 두고두고 벼르던 대사를 치르고 난 것 같은 거뜬한 기분이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는 사이에 배춧잎이 오그라들게 벌레가 끼었지만 그대로 말라버릴까 봐 약을 치지 못하고 미루어왔었다.
곽 서방은 마누라가 길어 온 물을 물통에 퍼붓고 소독약 유제(孚濟)²⁴를, 병 갓에 그어 있는 분량 금을 보아가면서 따라 풀었다. 엷은 갈색 빛깔을 머금은 약물 통에 분무기를 집어넣고 마누라를 채근했다.
“여보, 이거 빨리……”
마누라가 펌프질을 하고 곽 서방은 고무호스를 이끌면서 안개 발같이 뽀얗게 뿜어 나오는 약물을 배춧잎에 차례로 쳐갔다.
이 분무기도 운산이 떠날 때 남겨놓고 간 기물이다. 곽 서방은 얼마 전 백운산 중턱에 자리 잡은 개척 농장에 틈을 보아 꼭 한 번 찾아오라는 운산의 편지를 받고도 여태 답장도 내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생각을 곱씹었다.
‘배추 추수나 끝나면 이번에는 어김없이 운산을 찾아야지. 이대로 순조롭게 가면 이 주일 안에 뽑게 될 테지…….’
그는 속으로 다짐하면서 약을 쳐갔다. 약물이 바닥이 났는지 분무기 꼭지에서 찍 소리가 나며 흰 김만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다시 약물을 풀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비 온 뒤라 시원하게 저녁놀이 섰다. 벌써 해가 졌느냐 싶게 그제서야 주위가 어두워 옴을 느꼈다.
저녁 후 곽 서방은 구장네 집으로 내려갔다.
벌써 뜰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등불이 여러 개 켜 있지만 먼 데 사람의 얼굴은 확실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멍석이 넓게 깔린 안쪽에는 양쪽 가에 구장과 권 노인이 앉아 있고 그 사이에 낯모를 세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는 라디오와, 종이로 웃판을 싼 재봉틀이 놓여 있는 것이 곽 서방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 재봉틀과 라디오에 신기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곽 서방에게는 느껴졌다.
좌석을 정돈시킨 다음 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이번 우리 마을과 자매부락을 맺기 위하여 서울 × × 대학에서 두 분 선생님이 내려오시고 이분들을 안내하기 위하여 면에서 또 계장님이 일부러 나오셨습니다.”
앉았던 손님들은 구장의 소개가 끝나자 일어서서 부락민에게 인사를 했다. 장내에서는 일제히 박수 소리가 터졌고 곽 서방도 덩달아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다.
면에서 온 계장의 기다란 인사가 있은 다음, 서울서 왔다는 학생과장인가 하는 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번 변변치 못한 물건을 가져왔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마을과 자매 관계를 맺었으니 앞으로는 차츰 공회당도 짓고 그 밖에 있는 힘을 다하여 마을 일을 돕겠다는 진정 어린 이아기를 들으면서 곽 서방은 코허리가 시큰해옴을 느꼈다.
눈만 없으면 산 사람의 코라도 베어 가려고 하는 험한 세상에 남을 돕겠다는 이러한 정성 어린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 곽 서방은 가슴이 벅차올라 헛기침을 삼켜갔다.
“저건 뉘 집에 둘까……”
옆에 발돋움을 하고 서 있는 삼돌이 처의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면서, 사실 곽 서방 자신도 그것이 궁금했던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왔다.
이튿날 손님이 돌아간 후, 공회당을 지을 때까지는 우선 재봉틀은 방 안이 널찍한 구장네 집에 두고, 라디오는 노인이 잘 간수한다고 공론이 되어 권 노인의 집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곽 서방은 으레껏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돌이 처의 중얼거리던 말이 마치 마을 사람 전체의 염려처럼 목에 걸려, 곽 서방 자신도 그 처사가 개운하질 않게 느껴졌다.
극조생의 돌같이 굳은 배추 포기를 골라 뽑아 다듬어가지고 전마선에 실은 곽 서방은, 첫닭이 울자 나루를 떠났다. 여수(麗水)의 아침장에 맞추어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뱃전에 와 닿는 물결과 노 젓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그는 새벽바람에 담배 연기를 뿜어 날리며 호주머니 깊숙이 헝겊에 싸 넣은 돈뭉치를 만지면서 혼자 뇌까렸다.
‘하기야 고맙지, 이러한 세상에 남을 도와주겠다는 심정이야…… 그렇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는데, 남을 의지하고 사느니보다 제 힘으로 기껏 살아나가야지…….’
그는 여수 시내 큰 거리 점방에 들러, 아들놈이 그렇게도 원하는 라디오를 사고, 마누라에게는 장터에서 치마 한 감 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갯둑 밑 퍼런 논벌을 눈앞에 그리는 것이었다.
동녘 하늘은 곽 서방의 희망에 찬 가슴처럼 휜하게 동이 터 왔다.
-끝-
2016년 7월 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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