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12월3일
800여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자리하는 제기동 '서울 약령시'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이 골목에 들어서면 절로 기운이 솟는 기분이다. 지나가기만 해도 보신한다는 우스개가 회자하는, 제기동에
자리한 '서울 약령시'다. 정릉천 동쪽, 왕산로 북쪽에 남북 약 1km, 동서 약 200m에 800여 한약재상과 한의원
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1995년에 인가받았으나, 이 공간이 쌓아 온 시간의 무게는 그보다 훨씬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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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령시 일주문 서울 약령시 주 출입구에 세워진 일주문 형식의 게이트. 이 문 북쪽으로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즐비한 특화된 공간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영천
근대 도시 형성의 추동력은 단연코 기차역이다. 인쇄술이 민주주의를 앞당긴 기술이었다면, 도시화를 추동해 낸 시설은 기차역이었다. 인쇄술이 생각과 사상을 모으고 퍼뜨렸다면, 기차역은 사람과 물산을 더욱 빠르게 집중시켰다. 서울 약령시도 마찬가지다. 왕조시대 보제원(普濟院)이란 역원은 물론,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성동역이라는 기차역에서 말미암았다. 역의 존재는 제기동 일원에 장시(場市)를 형성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흔히 말하는 오복을 다 누리는 사람이 얼마일까? 그저 건강하게 천수를 누려도 충분히 행복한 삶 아닐까? 한의학은 이런 삶을 누리려는 욕구로 태동하여, 수천 년 우리와 함께였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체질에 맞게 발전해 왔고, 오랜 역사 과정에서 발현하고 재창조되었다. 한약재도 마찬가지다. 한약재는 동·식물과 광물에서 얻은 천연물로, 채취물 자체이거나 용처에 맞게 가공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재배하지 않는 한, 자연에서 채취해야 한다. 이에 약재의 채취-이송-집산이 한의학을 뒷받침하는 필수요소였다. 더욱이 귀한 약재일수록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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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형식 게이트 서울 약령시의 여러 통로 중 하나인 5번 문 형식 게이트. 경동시장과 마주한 공간에 서 있다. |
ⓒ 이영천
왕조시대 필요 한약재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구에서 크게 소용하였다. 특히 전의감은 왕과 왕족, 고관대작의 약재 용처였음으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활인서와 혜민서에서 소용하는 약재는 과연 얼마였을까? 공교롭게도 혜민서와 활인서가 먼저, 전의감은 제중원이 설립되는 시기 폐지되었다. 서울에서 한약재가 주로 거래되던 곳은 구리개와 배오개였다. 구리개는 지금의 을지로1가∼2가에 있던 고개로 서민을 치료하는 혜민서가 있었고, 고관들이 이용하는 한약방도 즐비했다. 배오개는 종로4가 인근에 있던 작은 고개로 이곳의 한약방은 주로 서민이 이용했다. 따라서 민간의 한약재 수요는 배오개에 밀집해 있던 한약방을 통해서였다. 종로5가 부근에 아직도 약국이 많은 까닭은 이런 오랜 공간의 흔적이 이어져 온 때문이다. 보제원 4대 역원 중 동대문 밖엔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 자리는 흥인지문을 나와 동쪽으로 노원을 거쳐 강원도로 가는 길의 시작점으로, 지금의 안암오거리다. 보제원은 우역(郵驛) 기능은 물론 관리와 원로에게 잔치를 베푸는 기능에 겸하여, 왕이 민원을 듣는 곳이기도 했다. 흉년이 들면 백성을 진휼하는 빈민구제 기구였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이곳을 거점으로 병의 확산을 차단하고 치료함으로써, 병이 도성에 드는 것을 방지하는 의료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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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원 모형 서울 약령시 내부에 위치한 '서울 한방 진흥센터'에 전시된 보제원 모형. 보제원은 지금의 안암5거리에 있었다. |
ⓒ 이영천
보제원은 선농단과 더불어 흥인지문 밖을 상징하는 시설로 기능하였다. 역원으로써 지역 거점 역할을 맡으면서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고, 이는 시장을 형성시키는 조건이었다. 보제원의 존재에 더하여 흥인지문 길목이었던 까닭에 경기도나 강원도, 멀리 함경도에서까지 한약재를 가져와 파는 약재상이 많았다. 의료기관 역할도 겸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보제원 근처에 시장이 섰다. 한약재 시장의 맹아다. 시간이 지나 왕래가 잦은 곳에 약재상이 번성하고, 이것이 서울 약령시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성동역(城東驛) 성동역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자리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20일 개통한 서울∼춘천(경춘선)을 오가는 사설(私設)철도 시발역이다. 기차역은 제기동에 변화를 가져온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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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역 표석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 주변에 있는 옛 경춘선 시발역인 성동역 자리 표석. 주변은 경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
ⓒ 이영천
보제원은 선농단과 더불어 흥인지문 밖을 상징하는 시설로 기능하였다. 역원으로써 지역 거점 역할을 맡으면서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고, 이는 시장을 형성시키는 조건이었다. 보제원의 존재에 더하여 흥인지문 길목이었던 까닭에 경기도나 강원도, 멀리 함경도에서까지 한약재를 가져와 파는 약재상이 많았다. 의료기관 역할도 겸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보제원 근처에 시장이 섰다. 한약재 시장의 맹아다. 시간이 지나 왕래가 잦은 곳에 약재상이 번성하고, 이것이 서울 약령시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성동역(城東驛) 성동역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자리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20일 개통한 서울∼춘천(경춘선)을 오가는 사설(私設)철도 시발역이다. 기차역은 제기동에 변화를 가져온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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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리 청과물시장 1949년 개설된 청량리 청과물시장. 경동시장과 더불어 서울 약령시가 탄생하게 한 밑거름이었다. |
ⓒ 이영천
두 시장의 존재가 이곳 공간구조 변화에 불을 지핀다. 경동시장에 생긴 한약재 시장이 불쏘시개가 되고, 두 시장의 존재는 약령시가 탄생하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 풍부한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었고, 경기 북부와 강원도에서 생산된 천연 약재의 집화와 유통이 수월하다는 점이다. 이때를 즈음하여 서울 도심이 급격한 도시화에 직면해 땅값이 올라가고 교통난이 심화함에 따라, 을지로와 종로의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제기동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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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동시장 1960년 인가 받은 경동시장의 모습. 사진 오른쪽 버스에 가린 곳 통로에는 아직도 인삼 등을 취급하는 약재상이 있다. |
ⓒ 이영천
1967년 이 철도의 화물 운송기능이 사라지고, 이듬해 용두동에 마장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선다. 대체 시설이 생겨난 셈이다. 1971년 10월 성동역~성북역 구간이 폐선되면서 철로와 성동역이 사라지고, 경춘선 시발역이 지금의 청량리역으로 이전해 간다. 서울 약령시(藥令市)로 한약재상과 한의원의 제기동 이전 추세가 점진적이다가, 1976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을지로와 종로, 동대문에서 옮겨 온 한약재상과 한의원에 더하여 경상도와 강원도에서까지 이주해 온다. 제기동이 한약재 및 한의원으로 번성한 최정점은 1980년대다. 한약재상들이 진용을 갖춰나가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대구약령시를 추월해 전국 유통의 70%를 차지한다. 모든 물산이 집화하는 서울이란 도시의 존재도 큰 몫을 했다. 한의사 자격이 1982년 허가제로 바뀌면서 약재상은 더욱 확대한다. 면허 없는 한의사들이 약사로 전업하면서 한약재를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간은 특화하였고, 면적도 이웃한 경동시장이나 청과물시장에 버금가는 규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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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령시 거리 잘 정돈된 서울 약령시 내부 가로 모습. 최근 새로 단장하여 공간의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
ⓒ 이영천
경동시장에 속한 한약거리로만 알려져 있었던 제기동 한약재 시장이, 1995년 서울시로부터 승인받으면서 '서울 약령시'라는 이름을 얻는다. 제기동이 이미 전국 최대 약령시장으로 성장해 있었고, 한약재와 한의원으로 특화된 도시 공간구조를 형성한 덕분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약령시가 '한방 산업 특구'로 지정되자 한방 전문 빌딩이 차례로 들어선다. 이 여파로 북쪽은 홍파사거리, 남쪽은 동대문구청 부근까지 확장하기에 이른다. 2008년과 최근 보도와 차도, 가로등을 비롯한 기반시설을 정비했다. 숫자로 구분한 시장을 알리는 문 형식의 안내 게이트와 일주문 형식의 약령시 문을 건립해 한결 세련되었다. 건강한 도시 공간으로 도시 공간이 '건강하다' 함은 어떤 상태일까? 무엇보다 '지속가능성'을 그 공간이 담보하고 있는가로 귀결될 것이다.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핵심은 공간 기능의 '신뢰'에 바탕 한다. 물론 환경을 결정하는 인프라 개선은 필수다. 좋은 환경에서 사람의 기분이 순화되고, 무엇보다 고객 하여금 다시 찾게 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한때 물밀듯 밀려든 중국산 약재 때문에 한약재 전체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었다. 이에 더하여 불분명한 원산지 표기에 대한 불신과 가격 부풀리기 등은 한약재에 대한 인식을 형편없이 추락시키는 요인이었다. 소비자 발길을 스스로 끊어낸 대표적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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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원 유허비 서울 약령시에 안에 위치한 '서울 한방 진흥센터' 앞에 서 있는 '보제원 유허비'와 주변 거리 모습. |
ⓒ 이영천
서울 약령시는 지금 답보상태다. 어쩌면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갈림길에 서 있다. 양의학 의존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설령 한의원을 이용한다 해도, 거주지 근처에서 해결하는 추세다. 이런 이유로 한의사들이 서울 약령시를 떠나는 추세다. 한의사가 떠나버리면, 약재상 중심으로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서울 약령시는 단일기능을 수행하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균질성을 확보한 단일기능은 공간의 생명력은 배가한다. 같음의 동질성을 더욱 강화해 나가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은 집적 이익이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인접한 다른 기능과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고 확산하는 특성을 보인다. 한의학의 요체는 생명현상을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관찰함으로써, 내적 생명력을 근본적으로 배양하여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울 약령시의 건강성도 한의학이 추구하는 근원적 치유와 긴 생명력을 담보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백 년 가는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건재하여, 이 공간의 건강성을 끝까지 지켜내길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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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울 약령시 역사 자료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