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9:4]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찌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꺽기를 어느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
욥은 그 친구들의 부당한 말을 신랄하게 공격한다. (1)그들이 욥을 학대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것. (2)욥에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신의 사적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간섭한다는 것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란 말씀의 뜻은 그 자신이 관계할 일이라는 뜻이다. (3)그에게 임한 환난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만큼 그들은 그를 위로해주어야 된다는 것
그런데 그들이 욥을 위로하지는 않고 도리어 자긍하며 욥의 죄를 찾아내려고만 힘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욥의 친구라고 하면서도 고난 중에 있는 욥을 극도로 괴롭히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욥이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지 않다는 확신의 발표이다.
설혹 그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고난과는 별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욥은 자기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불신앙이 아니며 원망도 아니다. 그의 이 말은 사실대로 표현된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줄 알아야 된다. 그렇게 알 때에 구원 받을 소망이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 주신다그러나 만일 고난의 원인이 우연이라고 한다면 고난을 받는 자가 어떻게 소망을 가지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송사함으로...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이들의 송사에 대한 판결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속한 두 형제는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그 순간 모두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허물'이라는 헬라어 '헥테마'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서 '패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본 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도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 즉 한몸 의식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영적 패배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한편 '헥테마'를 '패배'가 아닌 '허물'이나 '결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그 의미는 송사한 사건이 이미 그들의 약점이 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허물이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그들의 행위가(골 3 :13) 그리스도인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여기에서 바울의 주장은 절정에 달한다.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법적 소송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이며 나아가서 완연한 허물이라고 지적한 사도는 이제 교인들이 이런 싸움에 휩쓸려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주거나 속이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어려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쟁의 승리를 위해 송사하기 이전에 또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 그 희생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손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이 불의한 자가 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양보이다. '불의를 당하는 것 '속는 것' 해당하는 두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중간태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허용적 의미를 띠는 수동태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아디케이스데'는 '부당함을 입는', 또는 '불공평한 상태나 모욕을 당하는'을 뜻하는 단어로서 공평하고 평등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포스테레이스데'는 '강도를 당하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단어로서 형제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강도에게 약탈당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지혜와 의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추구보다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삶의 원리와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