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申鉉碻 전 국무총리의 1986년의 警句 |
[李東馥]
|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결국 ‘과거사’ 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을 다시 밝혔다. 필자의 소견(所見)으로는 이번 박근혜의 ‘과거사’ 발언은 합격점을 줄 만 한 것 같다. 그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술회하고 그로 인한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의 입장에서 그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박근혜의 ‘과거사’ 관련 발언과 관련해서 필자는 2007년에 필자가 간행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저서(서울 경덕출판사)에 실렸던 글 한 토막을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
이번에 타계(他界)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자유당 정권에서 39-40세의 약관(弱冠)으로 부흥부장관 직을 수행할 때 필자는 한국일보 자매지(姊妹紙)인 영자지(英字紙) The Korea Times 정치부의 국회ㆍ정당 출입기자였기 때문에 직접 이 분과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그 뒤 1971년부터 필자는 남북대화에 참가하느라고 정부에 들어가서 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이 분을 직접 모시고 일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이 분이 13대 국무총리 직을 수행하고 있던 때(1979.12.13-1980.05.22) 필자는 남북대화 사무국장으로 남북대화의 실무를 총괄하면서 특히 1980년2월부터 8월까지 판문점에서 진행된 이른바 ‘남북 총리간 대화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의 우리측 대표로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대화의 경과를 이 분께 직접 보고하고 또 지침을 받는 기회를 여러 번 가졌었다. 그러나, 5.18 광주 사태의 와중(渦中)에서 이 분이 국무총리 직을 사직함에 따라 이 분과의 이때의 인연은 그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분과의 인연은 우연하게 1986년 정부 밖에서 다시 이어졌다. 필자는 1982년 삼성(三星) 그룹에 몸을 담는 인연이 생겨서 지금은 ‘삼성테크윈’(주)으로 변신해 있는 ‘삼성정밀공업’(주)의 대표이사 부사장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6년 이 분이 전자 담당 회장 겸 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고빙(雇聘)되어 삼성 식구가 되었다. 그 뒤 1988년2월 필자가 삼성을 떠날 때까지 1년 반 남짓 필자는 이번에도 직접 모시지는 않았지만 같은 삼성 식구로 생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동안 이 분과 필자는 빈번하게 열리는 사장단 회의에서 자리를 함께 했고 또 이와는 별도로 꽤 자주 주로 이 분의 사무실에서 만나 차를 마시면서 북한 문제를 중심으로 시국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다.
1986년 10월의 어느 날도 필자는 이 분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談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이 분이 하신 말씀이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간 지금도 필자의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 분의 타계 소식에 접하고 서울대 부속병원 영안실의 빈소(殯所)로 조문(弔問) 가기에 앞서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 때 이 분의 말씀을 기록에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 내용을 다음에 적는다.
x x x x x x
이 날 신 회장은 담소 도중 느닷없이 “여보, 생각해 보니 글쎄 내 나이가 6천 살이요!”라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필자는 황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신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인류가 농경시대로부터 산업화시대로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오. 6천 년이 걸리지 않았오. 사실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 민족 가운데는 6천 년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도 산업화를 이룩하지 못한 나라가 더 많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제 당당하게 세계적으로 선진 산업화 국가의 반열에 들어가고 있지 않아요? 나는 경북 칠곡의 가난한 농가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때 가난한 농민인 나의 가족은 사실은 낙후된 농경시대에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나는 다행이 대처(大處)로 나와 공부할 기회를 가졌고 특히 경제학을 공부해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정부에 들어 와서 경제정책 분야의 책임자로 이 나라의 산업화를 이끌어내는 기회를 가졌으며 지금은 산업화된 이 나라에서 최첨단 산업인 전자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의 전자부문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니 따지고 보면 6천 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소?”
듣고 보니 이 분의 말씀은 그럴 듯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분의 말씀은 이어진 다음과 같은 대목이, 하나의 경구(警句)가 되어, 필자의 뇌리를 지금도 떠나지 않고 있다. 신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두려운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경우에는 6천 년이 소요되었고, 또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6천 년이 지나도 아직 이룩하지 못한, 위대한 일, 산업화를 불과 20-30년 사이에 이루어내고 있는 중이요. 다른 나라에서 6천 년 동안에 이룩했고, 또 보다 많은 나라에서는 6천 년이 지나고도 이루어내지 못한 일을 20-30년 동안에 이룩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하겠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 20-30년 동안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압축 성장, 압축 개발을 추진해 왔고 그 성과가 성공적인 산업화로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압축 성장, 압축 개발은 동원하는 수단 면에서 당연히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되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민주적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민주적인 방법에 의존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향유하게 된 산업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고 산업화의 추진과 달성을 위해서는 일정 기간 민주주의의 유보(留保)라는 대가의 지불이 불가피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비정상적 방법에 의한 압축 성장, 압축 개발에 대한 불만과 불평, 반발이 제기되었을 때 정부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마땅히 이들을 만나서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납득시켜 이들의 동참을 설득해 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정부는 그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도 않고,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 같은 설득 노력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법규를 앞세워, 뿐만 아니라 ‘긴급조치’ 등의 방법으로 그 같은 법규를 계속 강화하면서, 행동에 나서는 불평ㆍ불만 세력을 경찰봉과 최루탄, 심지어는 실탄 사격으로 진압할 뿐 아니라 툭 하면 닭장차로 잡아들여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폭력적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처벌 위주로 대응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상황의 후유파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이 같은 경직된 대처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계층과 세력 간에 대화가 단절되었고 이 같은 현상은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 심각합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우리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
x x x x x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이 경구를 남긴 때는 1970년대 초의 ‘유신개헌’과 이에 이은 ‘긴급조치’ 파동에 이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암살 및 1980년의 5.18 광주 사태를 거치면서 증폭 일로를 걸었던 우리 사회의 갈등이 바로 그 다음 해(1987년)의 이른바 ‘6월 민주항쟁’을 잉태하고 있을 때였다. 이 분이 이 같은 경구를 남긴 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격동을 거듭했다. 1960대부터 30년간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 압축 개발을 주도했던 권위주의 세력은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6.29 선언’에 의한 ‘대통령직선제’ 부활과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한 ‘3당 통합’ 등의 처방으로 급한 불을 끄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김영삼(金泳三) 정권(1993-1998)을 거쳐 ‘친북ㆍ좌파ㆍ반미’ 성향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대중(金大中) 정권(1998-2003) 및 노무현(盧武鉉) 정권(2003-현재)의 성립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안보 등 전 국정영역에서 작금의 국정파탄을 초래했다. 신 전 국무총리가 우려했던 대로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삼가 고(故)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영전(靈前)에 1986년 그때 충격적이었던 그 분의 말씀에 대한 필자의 생생한 기억을 바친다. 많은 분들이 일독(一讀)을 하고 우리 시대를 이끌어준 큰 별이었던 고인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혜안(慧眼)을 재음미하는 것으로 고인의 명복(冥福)을 비는 데 동참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2년 09월25일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5B48224B8A87AEA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