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492]浮査선생7언절구-過勿憚改 (과홀탄개)
過勿憚改 辛未 憚=꺼릴 탄.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신미년(1631, 인조9)
人言我過我當思。인언아과아당사
有則改之無自怡。유즉개지무자이
子路喜聞能勇改。자로희문능용개
端宜百世作人師。단의백세작인사
남들이 내 허물 말하거든 마땅히 생각해 보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스스로 기뻐하라
자로는 허물을 듣고 기뻐하며 용감히 고쳤으니
정히 백세의 사표가 되기에 마땅하구나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김익재 (공역) | 2015
自怡자이=스스로 기뻐함.
[주] 자로는 …… 고쳤으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허물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다.〔子路人告之以有過則喜〕”라고 하였다.
子路자로=중유(仲由)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
자는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이며 변(卞) 사람이다. 흔히 자로라고 불린다.
자로는 공자(孔子)의 핵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천하유세 동안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자로는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염구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였다.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과 망명생활을 함께 했으며,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갈 때 위나라에 남아서
공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발효되어 젓갈로 담가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안에 있는 “젓갈”(해; 醢)을 모두 내다 버렸으며, 이후에도 젓갈과 같은 종류의 음식만 보면,
“젓갈로 담가지다니!”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최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공자가 문란한 진후(陳后) 남자(南子)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공자가 두 번이나 읍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다.
자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의 안연편에는 그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따르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端宜단의=바르고 마땅함.
浮査先生文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浮査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전공 고순정(高順貞)의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연구(硏究)』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1995. 12. 總79頁)를 볼 수 있었다.
부사공은 16~17세기에 87세를 일기(一期)로 살다가 가면서 『부사집』(浮査集)을 남겼으니,
『부사선생문집』 부사정(浮査亭) 1994 국역본도 있는 것이다. 성여신의 아호 부사(浮査)에서
사(査)를 찾아 보면 “떼사” (槎) 「떼―배」는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방언으로 뗏목이다.
큰 강물 위를 떠 다니는 떼배처럼 집착도 고집도 부리지 않고 살고 싶다고 하여
부사야로(浮査野老)라고 했을 것 이다. 부사는『한국인명 대사전』에 1609년 (광해군1) 64세로
사마시에 합격 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마시(司馬試)란 것은 조선조 때 과거(科擧)의 하나로서
일종의 자격시험으로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는데 초시에서 양과 각 700명,
뒤에는 각 540명을 전국에서 뽑고, 복시에서 각 100명을 뽑는다고 했으니
고순정(高順貞)은 『부사 성여신연구』에서 말한다.
광해 원년(1609)인 64세 가을에 드디어 生員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당시에 月沙 李廷龜(1546~ 1635)가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집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강산천만리가 다 보이네” 라 는 구절을 읽고,
“이는 반드시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이면서 시속의 풍격을 본받지 않는자이다. 그래서 발탁하였다.
(不出 門庭三五步, 觀盡江山千萬里之句, 稱賞不已曰此必老士宿儒不效時格者也,
因擢之:浮査集卷7. 年譜)라는 것을 보면 환갑을 넘겨서라도 과시에 지망했다가
중도이폐(中途而廢)한 사연을 다음 구절로써 짐작할 수 있다.
고순정은 그의 논문 가운데 『부사집』 연보에서 다음의 구절을 들고 있다.
「옥사군이선기군」(欲事君而先欺君) 가호(可乎), 오거업지지로불폐(吾擧業之至老不廢)
이유친 명야(以有親命也) 차욕일전평생지소포(且一展平生之所抱) 금문여언(今聞汝言)
즉세도가지(則道可知) 항시사부정(況時事不靖) 삼강장륜(三綱將淪) 득과해위(得科奚爲)오가 그것 이다.
부사 성여신의 가통(家統)을 보면 오문(吾門) 13파 중 12번째 검교공파(檢校公派) 6세(世)
을신(乙臣)의 후예이다. 을신(乙臣) → 사흥(士弘) → 만용(萬庸) → 경(踁) → 자량(自諒) →
우(祐) → 안중(安重) → 일휴(日休) → 두년(斗年) → 여신(汝信)으로 이어진다.
부사는 고조인 우(祐) 때부터 진주에 와서 살았고, 고조는 장흥고부사(長興庫副使),
증조인 안중(安重) 은 승문원교리, 조부 일휴(日休)는 증 호조참판, 부(父) 두년(斗年)은 증 한성우윤이요,
모는 초계(草溪) 변씨(卞氏)라고 하였으며 부사의 부인(夫人)은 밀양박씨 만호(萬戶) 박사신(朴士臣)의 딸이라고
나와 있다. 부사의 스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다.
남명은 경의(敬義)를 신조로 하고, 반국(反婉) 천리(踐履)를 학문의 목표로 삼아 왔기에
1555년 단성(丹城) 현감, 1566년 상서원판관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사퇴하고 말았다.
남명은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을 존경한 나머지 늦가을에 들어 인편으로
건시(乾枾) 한 접을 천리도 넘는 거리에서 선물을 했던 일이 있을 만큼 고매(高邁)한
출처관(出處觀)으로 생을 마친 대성리학자였다. 세속왈(世俗曰) “성인능지성인” (聖人能知聖人)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청송이 유일(遺逸)이요,
남명이 유일이듯이 부사(浮査)의 선고(先考) 또한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한성부우윤(右尹)의 추증을 받았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시칠언절구 한 수를 보면
자하등고유묘리 (自下登高有妙理)
심망행속상지난 (心忙行速上之難)
종용면강행무이 (從容勉强行無已)
연후방지세계관 (然後方知世界寬)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감에 오묘한 이치가 있어
마음을 바삐하고, 빠른 것을 행하면 오르기 어렵 다네
조용히 힘쓰고 힘써 행하되 그만 둠이 없어야지.
그러한 연후에 바야흐로 세상이 넓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라네.
이다. 부사 성여신은 중용 소위 제27장의 「존덕성 이도문학」
(尊德性而道問學 : 사람의 덕성을 높이고, 묻고 배우는 것으로 말미암는다)을
잘 실천해 오면서 맹자가 이루편(離婁篇) 상에서 왜 사성자인지도야(思誠者人之道也)라
했는가를 누구보다 간절히 물으면서 살아온 명현(明賢) 의 한 실천도학자였다고 하겠다.
[출처] 20.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작성자 잔잔한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