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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12월9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 11,11-15)
“Amen,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been n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억압받는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운다. 언제나 가련한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일깨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버려두시지 않는 분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였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닦아 온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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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아직까지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가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며 철저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 예언자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종말이 되면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그가 다시 온다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가 왜곡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개인적인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엉터리 이론과 가르침이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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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엘리야가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입니다. 두 분은 예언자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종말에 나타날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통째로 바뀌어 새 하늘 새 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받아들이는 마음 - 강헌철 신부- 본당 신부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첫자리에 놓이는 것이 강론이다. 날마다 신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풀어 설명하고 생활 안에서 묵상거리를 주는 것이 부담이 될 때가 많다. 나도 보좌신부 시절에 주일 강론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신부님, 오늘 강론 참 좋았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자들이 “어떤 신부님 강론은 이래서 좋고, 어떤 신부님 강론은 저래서 재미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을 느낀다.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정찬호-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전령인 엘리야로 선포하시면서,
큰 사람과 작은 사람 -김찬선신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전삼용신부-
한 번은 수업을 듣는 도중 교수 신부님과 자그마한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어른들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가 채워지면 순간적인 만족을 갖지만 또 다른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당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필요’에 의해 창조하셨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사랑이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 없어도 스스로 온전히 만족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네가 ‘필요’해!”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같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필요는 상대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더’ 사랑하고 싶은 본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나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본성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 당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필요성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불완전하게 되고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교수님이 설명하시려는 의도는 사람이 더 큰 무엇을 향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 안에 갇혀계시지 않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이렇게 밖으로 커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만약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는데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넓혀져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기적이고 곧 소멸될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절대 자신들 안에 갇혀있지 않고 빛과 같이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수님 말대로라면 인간이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여 열려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내가 하느님과 또는 남편이나 아내와 하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필요’에 의해 만나는 것이고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진정 온전하게 누구를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하느님과 또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 만족하고 있을 때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웃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들이 있어야 함은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산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서는 큰 인물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도 더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며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을 만큼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성인일지라도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살면서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사는 분들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육체 안에는 죄의 경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이 세상의 육체를 벗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가장 큰 성인들 중 하나로 크게 빛나실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불완전하게 되어 항상 완전함을 찾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인간을 결합시켜 다시 완전함의 지위를 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만큼 더 완전해지고 죄 이전의 ‘참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에는 죄에 물들지 않은 육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동시에 지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필요로 만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인 이유는 사막에서 먹지도 입지도 않고 극기의 생활을 하며 육체의 욕망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만큼 이웃을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과 더욱 가깝게 사랑하게 됩니다. 육체적 욕망, 즉 에로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그래서 소유하려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 자체로 만족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육체적이고 소유하려하고 집착하고 또 나의 필요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사랑을 돌아보고 정화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제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습니다. 몹시 덜렁거리고 장난기가 유난히 심했던 저는 학교 안에서 자주 대형사고를 치곤 했었습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부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너그러우시고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담임선생님의 선처로 적당히 넘어가곤 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제가 적당히 넘어가기 어려운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현관 앞에 놓인 대형 거울을 제가 통과해버린 것입니다. 거울이 보통 큰 거울이 아니었고, 동창회에서 기증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 거울이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까지 그 모습을 보셨으니...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이 일을 어쩌나? 담임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울 값은 어떻게 하나? 부모님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쩌지?" 갖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며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거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 얼굴부터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조금밖에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하시면서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수 치우셨습니다. 아마도 그날 담임 선생님은 저 대신 교장실로 불려가서 호되게 질책을 당하셨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너무도 미안했던 저는 그 뒤로 많이 회개했었지요. 담임선생님을 하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 속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아직 어린 저였지만 너무도 관대했던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짧은 날들이 마치 천국에서의 생활 같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으로 여겨졌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너무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의 크기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나 커서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가 이토록 큰데 괜히 그렇게 걱정했잖아"하는 후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와 인내,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지옥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기 위한 우리의 조건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거절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 나라는 역설적으로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그릇된 생각과 잘못된 삶을 "죽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소유와 욕심에 붙들려있는 한 인간은 천국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푸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온갖 물질적 풍요와 안락이 약속된 곳도 아닙니다. 진정한 천국이란 우리의 욕망이 절제되고 편리함이 포기된 그러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생활은 수도자의 생활처럼 검소하고 질박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아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양승국신부- <다시 광야를 향해>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참 예언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양성했던 제자들에게 ‘바로 저분이시다. 저분을 따라가거라!’라며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은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며 자신을 끝도 없이 낮췄습니다. 연극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더욱 부각되도록 조연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나타나시자 아주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처럼 깊은 내적 광야를 향한 우리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편리하고 안이한 삶을 버리고 불편한 삶,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그 삶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점점 성장하시고, 그에 반비례해서 나는 점점 작아지기를 바랍니다.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분 -방교원 신부- 폭력이라면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 전쟁, 파괴 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작은 것이 정말 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귀 있는 사람인가? - 김영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 당시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그동안 믿고 따라온 율법에 반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개혁적인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로서는 당시의 고행자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몹시 불편했다. 세례자 요한은 고행을 하면서 스스로 미래에 오실 분을 위한 길잡이라고 선포하며 많은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외치며 또한 이를 행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임을 선포했다.
기다림 2 -장재봉신부-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새벽을 열며 양을 한 마리 잃은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양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양을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때에도 그 양치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화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우리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은 태평하니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이 양치기에게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하늘 나라의 작은 이
-조명연 신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생각하면, 잉태 때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귀찮은 잔소리 -김명희- 제게는 딸아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고등학교 1학년이고 또 한 명은 중학교 2학년입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사춘기의 표상인 여드름이 덕지덕지하고 그놈의 여드름 때문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려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밥은 안 먹어도 샤워는 해야 하고 늦었다고 징징대면서도 드라이기와 고대기를 집어 들고 머리를 다듬느라 요란을 떱니다. 옆에서 보다 못해 단정한 머리가 어울리니 풀어 헤치지 말고 단정하게 묶으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뜸 엄마는 유행을 모르고 너무 촌스럽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려고 나서다 보면 아이들은 여기저기 일부러 찢어놓은 청바지를 입고 나옵니다. 얌전한 바지로 갈아입으라고 하면 남들은 다 보기 좋다고 하는데 엄마는 왜 그러느냐며 다른 아이들도 다 이런 거 입고 다닌다고 대들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의 나라” 사람에게 호소하시는 하느님 회개의 시작은 첫마음으로 -민경철 신부- 참으로 좋은 뜻으로 시작했고, 순수하게, 열심히, 소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더 넓고 더 깊게 -오영숙 수녀-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 김상조 신부- 안내자와 그리스도인의 역할 <작은 자> - 이현철신부- 작은 자는 남들이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재능이나 덕행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서슴지않고 말째의 자리에 자신을 놓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 기뻐합니다. 작은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시간, 물질, 덕행 등 모든 것이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자기가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흥분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는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나 비난을 할 때에나 항상 평화중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이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는 진심으로 통회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1, 11-15)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라고 하십니다만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하며, 장차 내 뒤에 오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자라고 자신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이번에 성직자로 수품을 받은 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작은 자로서 충실한 사목생활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처럼 큰 인물로 칭찬받기를 기도드리립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보기드문 큰 키'라고 지금 칭찬을 받고 있을 민성기 신부님의 많은 저서중 '하늘로부터 키재기'라는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퍼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가르멜수도회의 동갑내기 신부 장석훈 베르나르도는 창경궁을 거닐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내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고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 (루가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하실 것입니다." 상품이 되어가는 성탄준비 -박상대신부-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십니다. 21세기인 지금도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못된 세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하늘 나라는 점점 더 좁아져 가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천년 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했지만, 모두 폭력을 쓰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뛰며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비신앙인들뿐 아니라, 일부 경건하다는 신앙인마저도 적극 가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사실 경제가 발달하고 지식 수준이 높아갈수록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제가 밥 먹여 주고, 지식이 권력과 명예를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부르짖을 때도 영적 지도자들마저 속화(俗化)되어 달갑게 여기지 않더니, 오늘날에도 그런 현상은 여전한 듯합니다.
이제 구원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도록 합시다.
준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행사’는 빛이 나고, ‘일’은 성공을 거둡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어디에나 주인공 뒤에는 묵묵히 일하는 조연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영화를 촬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화려한 배역을 끝낸 주인공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연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 뒤쪽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을 보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잘 죽어야 할 텐데.” 그는 ‘엑스트라’입니다. 오늘의 배역은 죽는 역할입니다. 그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역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뛰어난 조연을 거쳐야 뛰어난 주연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쉽게 오해합니다. 죄짓지 않고 공로가 많은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모이는 곳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천국 가기에 당연한 삶’은 없습니다. 완벽한 삶이더라도 그것은 우리 판단이지 주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해야’ 그분의 허락을 받습니다. ‘사랑의 삶’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 준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기에 회개와 천국을 이야기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받아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말을 하게 됩니다. 가짜가 되는 것이지요. 예언자랍시고 인기에 매달리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해서 속화되었습니다. 청중의 뜻을 하느님의 뜻보다 중시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배우가 되는 것이지요. 영적 지도자가 대중 스타로 떠오르면 위험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을 알리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하다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삶을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오늘 기념하는 루치아 성녀도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사람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랐기에 순교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척 아까운 것마저도 내놓아야 합니다.
똑같은 복음 말씀을 듣고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다른 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전해지는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말하는 기술에 따라 좋고 나쁜 것으로 판단해 버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 그 이유는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지 세심하게 살피고 들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그렇다. 무심코 들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될 수 있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들으려 하면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적극적 응답을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보면 욕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 그 친구들의 욕하는 모습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른들 같았고, 영화배우처럼 괜히 멋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왠지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제 입에서 욕이나 부정적인 말이 나오면 크게 혼을 내셨기 때문에, 욕을 해 보고 싶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잣말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을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욕을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쁜 습관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습관도 있다는 것이지요. 즉,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배어서 남들에게 좋은 행동들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으며, 하느님과 함께 기쁜 생활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나쁜 습관들을 모두 다 끊어버리지요. 그래서 광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그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영광까지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준비는 과연 어떠한가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끊어버리고 있는 나쁜 습관은 무엇이며, 내 몸에 익히고 있는 좋은 습관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요?
좋은 습관들을 많이 간직하고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주님을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쁜 습관들을 없앤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의지에 도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좋은 습관들이 바로 나의 습관이 되는 오늘을 만들어봅시다. 그 모습이 주님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기에…….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분명
하느님의 의義를 선포할 수는 있었으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오로지 십자가 안에서만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등불을 켜는 장님’에 비유하곤
합니다. 행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등불을 켜지만, 정작 자신은 그 빛을 향유하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것이지요. 이 비유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잘 설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신앙고백이 또 한 번 드러나는 곳은 요한 복음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교회가 밤이 가장 긴 때인 동지 즈음의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맞추어, 밤이 가장 짧은 때인 하지 즈음의
6월 24일에 세례자 요한 탄생을 경축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 손안의 작은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데레사 수녀님의 고백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그 목소리였던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이 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
목전의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비난을 들을 수 없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될 때 조급해 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질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며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신발 끈을 풀어드릴 수조차 없는 큰 분으로 받들고
그런 요한을 주님은 사람 중의 큰 사람이라고 추켜세우십니다.
소인배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남을 작게 만들며 자기가 커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고
낮출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면 이런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큰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즉시 그분이 오시기로 된 분임을 알아봅니다.
하늘에서 땅만큼 낮추어 오신 크신 분을
땅에서 하늘 님으로 알아보는 요한은 진정 큰 사람입니다.
그저께 저는 또다시 강남의 모 본당으로 대림특강을 위해 가야만 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교통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요. 워낙 많이 막혀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출발하는 시간이 퇴근 시간하고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몇 시에 출발해야 할지를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결국 저는 몇 달 전의 기억도 있고 또한 사람들 퇴근 시간 때문에 막힐 것을 예상하면서, 아주 여유 있게 3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런지요? 글쎄 길이 하나도 막히지 않아서, 출발한 지 1시간이 채 안되어서 목적지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의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아서 근처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요.
정말로 사람 일이란 잘 모르겠더군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늦고 또 이 정도면 딱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일찍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이 절대로 옳은 것만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내 생각이 옳다면서 사람들에게 힘주어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일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 생각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깁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따르기보다는 대신 미움과 판단과 단죄라는 폭력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도 하십니다. 이 폭력을 쓰는 자는 당시에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묵살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했으며, 하느님까지도 자기들 생각대로 놀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잘못된 것은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잘된 것은 자기들 공로로 돌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폭력을 쓰고 있으며, 이들의 폭력에 의해서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도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항상 자기 공로만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 안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 안의 한 부분 정도로만 생각하는 아주 작은 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하늘나라에 폭행을 하는 폭력을 쓰는 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 모습에서 당연히 벗어나야 합니다. 즉, 이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하늘나라를 완성하는데 일조를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대림을 사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폭력이라는 단어에는 생명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답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비오스’(생명)와 ‘비아조마이’(폭력)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경우에 비아조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폭력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이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고 강하게 되는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카인의 탄원을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보장해주십니다.
그 어떤 폭력도 자비로운 하느님을 거스를 수 없고 하느님 그분만이 세상의
폭력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창세 6,11). 우리는 이런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고 오래 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이신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신 그분을 만져볼 수 있고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 큰 인물이라고 할 때 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몸집이 크다는 것은 물론 아니리라.
포용력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룬 업적이 크다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늘나라에서 큰 것을 말함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이에 대해 제자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처럼 높아서 큰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낮아서 넓고 큰 것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넓어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정도로 큽니다.
노자의 말씀과 닿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한
세례자 요한은 큰 사람입니다.
다른 식으로 또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비어낸 만큼 커집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이치입니다.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커집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여관은 예수님을 모실 여백이 없었습니다.
비어있던 마구간과 구유는 사람의 아들 중에 가장 큰 사람보다 더 큰 분
하늘 땅 통 털어 가장 크신 분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서양화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여백으로 더 많은 것을 얘기하는
우리 한국화와 같은 여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최고의 평가를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든 예언서와 율법서에 적힌 메시아가 자신이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오는 길을 닦는 예언자 엘리야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한 예수님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셨으리라.
우리의 현실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우리를 돌아보자. 주일미사 참례가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주일 신자는 아닌가? 성당 내에서 미사 중에 회개하고 평화를 구하고 자비를 바라며 복음화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가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율법에 자신을 내맡기고는 성내고 탐내고 다투며 남에게 상처 주고 빼앗고 하지 않는가? 미사 시간마다 늘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 본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려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귀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 귀로 전해지는 말 중에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이지. 그 말씀이 왜 내게 전해졌는지. 말씀의 참뜻을 헤아리고 가다듬어 생활로 이어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는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귀 있는 사람인가, 귀 먹은 사람인가? 나에게 좋은 말씀은 듣고 나를 힘들게 하는 말씀은 거역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하느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언제였던가?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당신은 왜 걱정하지 않습니까?”
이에 양치기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저는 하나 남은 저 언덕까지 다 뒤져보고 양을 찾지 못하면, 그때 걱정하겠습니다.”
아직 하나의 언덕이 남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언덕을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걱정부터 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부터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물론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걱정만 할 뿐이지요.
이렇게 걱정 속에 사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실까요? 걱정으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복음 말씀을 통해서 힘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크지 못하니,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세례자 요한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예수님을 철저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기쁜소식인 복음을 알지 못했으며 구원사업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기에 요한보다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도 누리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왜 주실까요? 우리가 잘 나서? 아니지요.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서 무상으로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주님의 선물을 걷어차는 미련한 행동은 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생활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도구로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남들처럼
부귀영화를 좇지도 않았고, 광야로 나가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취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했던 이유는 곧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못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잠시의 시간도
주님을 위해 제대로 봉헌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과연 하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청만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부족한 우리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네요.
시험공부를 할 때도 음악을 크게 틀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습니다. 소리 좀 줄이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친구의 채팅 창이 나타나면 금방 채팅을 시작합니다. 엄마인 나는 옆에서 바라만 봐도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음악을 끄라고 충고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합니다. 저는 딸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이라고 예수님 친히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그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딸들이 저의 말을 귀찮은 잔소리로 여기는 것처럼 저 또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그저 그런 잔소리인 양 들어 넘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너무 바쁘고, 지금 중요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한가하게 무슨 천국 이야기냐고, 천국은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오리라 한 그분이시고, 당신의 나라는 이미 제 가까이에 와 있고, 당신은 제가 저의 딸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경규봉 신부 -
하느님께서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 친히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도우실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지렁이나 벌레처럼 약하고 보잘것없어 핍박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는 몸소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산과 언덕처럼 높이 솟아 권세를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나라들을 짓뭉개시리라. 마치 타작한 곡식을 키질함으로써 껍데기를 바람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듯이 적대국들을 날려버리시고 이스라엘을 모으시리라. 마실 물이 없어 빈사상태에 빠진 자들을 살리듯이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하시고, 벌거숭이산에 강물이 흐르듯이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안겨주시리라. 그들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어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리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의 종살이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시고 풍부한 생명을 주시리라.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는 것을 그들이 보고, 알고, 체험함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죄와 악행을 다 잊으시고 용서하시며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불효를 저지르고 집을 나간 자식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으신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주리라.”(예레 3,22) 하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당신께서 해주실 터이니 돌아오기만 하라고 사정하신다. 그러나 “이 백성은 얻어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모른다. 죽도록 맞고서도 타이르시는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버린다.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도무지 하느님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예레 5,3)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호소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의 하느님이며, 우리를 외면하고 거절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짖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스르고 외면하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사가 자신에게만 있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여 소리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에 가려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가 잠잠해질 때 비로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먼저 부르시고 찾으셨으며, 자신은 그 부르심을 이면하고 살다가 뒤늦게 부르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하느님은 지극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을 내거나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고,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른다.”(1고린 13,4-5.7-8)
사랑은 끝없는 용서요, 부르심이며, 호소요 절규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호소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오늘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절규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자!...................◆
살아온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의 권력단체가 되어버린 이들을 본 적이
있을까요? 조직적이 되고, 체계가 잡혀가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왜냐면 그 모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위해서 이 한생 바치겠다고
큰 뜻을 품어 공부를 시작하고, 세상에 나섰는데, 집단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그들만의 생각과 분위기에 묻혀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또 권력이 되다 보니까
이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겠지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늘 나라의 수호자와 전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는 범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여자들 가운데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라고
높이 사시는데 요한은 ‘회개’를 외친 인물이었습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낸 후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는 우리가 본 것, 들은 것에 대해서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내 눈으로 보았다”고, “확실히 내 귀로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 내 주관적이었는지, 나 중심적이었는지를 깨달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한 요한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에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많은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지 않고 이러한 것을 합리화하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데 크나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더 넓고 더 깊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때, 하느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는 점점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이 말씀은 "내가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말씀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일텐데, 요한이 한 일을 보고 예수님이 직접 그 사람됨을 인정해주신 말씀이다. 요한의 사명은 지난 주일 복음말씀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것,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것,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그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 극도의 칭찬을 받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실 것이었다. 요한의 사명이 훌륭해서일까? 요한이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였을까? 요한은 어떻게 자기 사명을 수행해냈을까? 우리의 사명은 보잘것없는 것인가?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가? 요한의 사명과 우리의 사명은 다른 것일까?
아니다. 우리의 사명도 요한의 사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그분의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추고 굽은 길은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해하고 충분히 받아들이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능력이 안된다" 하지 않고, 기꺼이, 요한처럼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는 사명일 것이다. 우리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일 게다. 요한처럼 위대한 사람만이 굽은 길을 곧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예수님처럼 특별한 사람만이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 우리 스스로가 하늘나라에 폭행을 가하고 있을지도 모을 일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이찬홍 신부
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내리십니다.
처음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첫 부분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둘째 부분 곧,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인물입니까?
복음에서 알려주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그 어떤 예언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시기로 예언된 엘리야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맞이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면,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얼마나 더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저 같은 니나노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진작 포기해야할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안내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안내자로서 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내자로서 지녀야할 모습, 자세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안내를 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안내자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안내자입니다.
미사와 성사집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 입니다.
어제부터 성탄 판공성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해실안에서 고해성사를 청하는 분들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주고, 죄를 용서하는 사죄경을 염해줍니다.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격려해 주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실제, 성실하게 성사에 임하는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의 물로 목욕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해실을 나섭니다.
그런데, 사제로서 제가 그렇게 신자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질 수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구원해 주면서도 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예수님께 인도해 주면서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
‘안내자로서는 충실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충실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안내자로서 제가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할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본당에 쉬는 교우 방문이 한창입니다.
며칠 후면, 여러분들이 인도한 예비신자 분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 성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안내자로서, 쉬는 교우들에게 다가갔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전해주고, 교회로 인도해 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내자로서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은 그렇게 잘 인도해주면서도, 정작 여러분스스로는 안내하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멀어지고,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도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레자 요한이 구약에 마지막 예언자요, 하느님 보시기에 훌륭한 일을 한 인물이라도, 우리가 얻은 지위, 곧 하느님 자녀라는 칭호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심지어는 예수님께 까지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훌륭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준 그리스도인이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성을 갖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의 가능성은 명확하지가 않고 좀 에매 모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인도했지만, 스스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헤로데에서 죽음을 당하여 순교했지만, 순교 의미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참된 순교의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교만으로 똘똘 뭉친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입니다.
구원이 명확하고, 구원받는 다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보다 덜 위대하지 않을까 감히, 교만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분입니다.
비록, 안내자로서 충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안내자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혹, 안내자로서 구원을 받더라도 명확하지 않음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알려준 세례자 요한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멘.
"요셉아, 나이 마흔될 때까지는 나서지마라. 침묵해라. 공부해라.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할 그때까지…" 그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한 글들을 책으로 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묶는 것은 어제의 삶에 애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무너뜨리고프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그 섬에 가고 싶다.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 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