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한 번 해볼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삶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삶의 가치는 죽음을 마주 대하고 난 후에야 겨우 빛을 발하기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꿈꾸는 사람들은 일부러 임사 체험을 하거나 죽음과 같은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버린다. 그러면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깨달음이 찾아오게 되어있다. 자살을 시도했는데도, 고통 속으로 자신을 던졌는데도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마음이 없었고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정신이 상하거나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깨달음은 우리는 너무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자각이다. 그리고 그 원초적 근원적 깨달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부수적 깨달음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지는데 가장 특이한 경우가 바로 초능력의 발현이다. 얼마나 살고 싶으면 막대한 에너지의 소모를 동반하여 수명이 단축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꾸는 능력을 얻어 생계까지 보장해주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살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기에 주저함이 없는 끝없는 지혜를 얻어 만인 위에 군림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영원히 숨어사는 길을 가고, 또 어떤 이는 적당히 세상에 적응해 사는 끝있는 지혜를 얻어 평범한 삶의 길을 가고, 아주 희귀한 경우에 속하는 또 다른 이는 마음만으로 모든 이를 압도할 수밖에 없는 망상을 얻어 초라한 성자의 길을 간다. 살고 싶다는 깨달음에 더해 어차피 한 번 죽을 수밖에 없으니 가치있게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추가된 때문인데 이런 사람들은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짜 자살의 길을 갈 확률이 아주 높다.
정말로 자살에 성공하는 경우는 두가지이다. 정말로 현실 속의 삶이 죽음보다 못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살고 싶음을 깨달았지만 자살 시도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이다.
이 둘 중 오늘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삶이 죽음보다 못한 경우를 없애는 방법이다. 국가의 사회보장이 발달하여 생존의 필수요건인 의식주가 부족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시대는 끝났다. 따라서 삶이 죽음보다 못한 경우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사랑의 결핍과 외로움 정도로 압축된다. 바람을 피우지 않는 건강한 배우자가 있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뜻이 된다.
신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적 건강에 대해서도 말을 하려면 몇시간을 떠들어도 부족하겠지만 간단하게 핵심만을 요약해서 붙여보도록 하겠다. 건강이 무너졌다는 말은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뜻이니 무조건 편안하게 해주면 된다. 병이 깊으면 운동도 하지 말고 먹거리도 순한 것만 골라 먹어 몸을 충분히 쉬게 해주면 죽을정도로 악화된 병이 아닌한 모두 낫는다. 잠이 오기만 하면 먹고 쉬고 잠만 자는 것이 가장 회복이 빠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얼마나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모는 물론 자식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성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알고 보면 마음의 건강이 부족한 사람이라 도의를 앞세우다 현실이 궁핍해지니 자살할 확률이 높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세상의 인정이 없다면 성자만큼 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없는데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보면 정확한 표현이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사랑으로 가득찬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자의 길을 걸을수록 행복하게 되는데 생존을 위한 스트레스조차 벗어버렸기때문이다.
박지선은 피부에 병이 있어 화장도 못하고 햇빛도 쪼이지 못하였다 한다. 나 또한 한창 폐인처럼 살아갈 때에는 그러하였다. 피부에만 병이 있었던게 아니고 무릎, 허리, 신경 어느 것 하나 성한게 없었다. 화장은 커녕 한 겨울에 건조함으로 피부에 불이 붙을 것 같으면서도 로숀 한 번도 바르지 못하였다. 로숀 한 번에 피부가 패이는 공포는 경험 안해본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날만큼은 온전하지 않지만 거의 완벽한 건강 관리를 하면서 5년여를 고생하고 나서야 겨우 햇빛 속으로 나아가고 다시 로숀을 바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살아서 나를 만나고 일반인들의 눈에 허황되어 보이는 진리를 믿어줄 수만 있었다면 현재의 나만큼은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