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새로 팠다.
바깥세상에선 별로 필요치 않지만 체납정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싶어 명함을 박았다. 부가 2계장 이 개 똥. 쪼매만(50장 정도)해 달라했는데 기본이 200장이란다. 납세자들의 불만과 욕설을 몸으로 막고 맞짱뜨려면 우선 최소한의 보호 장구가 이 명함이 아닐까. 그 많은 것을 언제 다 쓰이려나. 떨어지는 낙엽도 함부로 밟지말라는 제대말년 병장인데……,
요즘 사무실은 체납과의 전쟁이다. 매일 욕설과 고함이 난무하고 살벌하다. 납자들 이구동성으로 그 무섭던 IMF 때 보다 경기는 더 안 좋은데 더 쪼은다고들 야단이다. 글쎄 쪼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법집행을 너무 강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전화독촉과 행정제재, 채권추심 등에 납세자들은 납세자대로 불만이 쌓여간다. 왜 너거 마음대로 신용카드를 압류하고, 거래처를 끊는냐고 전화가 바리바리 온다. 그늠의 갱제가 언제 확 살아올라 그들의 분노와 시름을 달래주려나.
나랏님들은 천날 만날 서로 잘 났다고, 서로 책임이라고 삿대질이나 하는 판인데. 직원들도 실적은 안 오르는데 복명에다, 실적표를 매일 매일 내려주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호소한다.
명함을 보니 문득 옛날에 겪은 일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본다.
20여 년 전, P서 납보실에 근무할 때 이었다.
40대 초반쯤 보이는 납세자와 책상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민얼굴에 치렁치렁한 생머리, 첫눈에 봐도 상당한 미모였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알 수 없는 슬픔과 허탈감이 온 전신에 묻어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해도 말이 없었다. 말문을 열기조차 힘겨워 했다. 고운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했다. 호기심과 의아심이 스쳐지나갔다. 몇 마디 끝에 털어 놓는 사연은 좀 복잡했다. 한 달 전에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남편이 졸지에 사망했는데 세금문제가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왔다. 청천벼락을 맞아 상심하고 있는데 경리부장이라는 작자가 찾아와서 어음발행과 회수, 채권, 채무 등의 문제로 그대로 놔두면 회사가 부도가 날판이니 부도가 나기 전에 회사를 자기가 맡아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협박을 하는데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궁금해 했다. 평소 집에서 살림만 했지 남편의 사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재무구조를 파악해보니 그럴만한 사정으로 판단되었다. 먼저
기존에 있던 세무대리인과 상의하여 조력을 받도록 권했다. 그 여인은 그 부분이 더 예민한 것 같았다. 세무대리인이 부장과 짜고 탄탄한 회사를 헐값에 집어 삼킬 것 같다고 했다. 사업을 인계해 주면 회사를 잘 키워, 몇 년 후에는 양수대금을 싯가보다 몇 배로 쳐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망설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단은 마음을 추슬러 강하게 먹고 회사에 매일 출근하여 종업원들과 소통하면서 상황을 파악하여 회사를 장악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회사 법인인감과 통장을 회수하여 관리를 잘 하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하루빨리 주위에 명망 있고 믿을 만한 세무대리인을 정하여 계약을 하고 의뢰해야 될 것 같다고 상담을 해 주었다.
듣고 보니 가슴이 먹먹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며칠 후, 소리 없이 다가와 상담석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여인이었다. 세무대리인을 누구로 정했으면 좋을지를 몰라 답답해서 왔다고 했다. 몇 군데 가봤더니 그놈이 그놈이고 모두가 사기꾼처럼 보여 결정을 못 하겠더라고 했다. 그 말끝엔 내심, ‘당신이 좀 봐 줄 수 없겠느냐’는 것과 내가 지정해 주면 두 말없이 그 사람을 택하겠노라는 뜻이 내포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성실한 업체 몇 군데를 소개 해주면서 상담을 끝냈다. 무엇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하다가 돌아갔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해결 될 수 있도록 빌면서 세무 상담과 인생 상담과의 영역이 어디까지 인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 달쯤 후, 또 누가 찾아와서 민원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오늘 따라 패션이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에 칙칙한 민원실이 훤했다. 찾아 온 목적은 이제 상속세 신고문제로 상담을 청했다. 상속세 신고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차근차근 준비하면 되고 우선 회사 인수인계 문제를 정리하고 난 뒤에 해도 된다고 하니 고개만 끄떡이며 멍하니 있다가 돌아갔다.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냥 갔다.
5월 초,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옆 자리의 여직원이 샘이 나는 어투로 “이반장님, 지난주에 웬 이쁜 여자가 찾아와서 찾기에 교육 갔다하니 이름과 직급, 언제 출근하는지 묻고 갔는데, 좀 친한 것 같던데 누구신지요”라고 물었다. 내 찾아오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인가? 라며 한쪽 귀로 듣고 흘렸다.
다시 두어 달 후, 이제는 고등학생 정도의 딸내미를 데리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처음 올 때 보다는 수심이 가시고 얼굴엔 생기가 돌고 옅은 미소까지 보였다. 음료수까지 한 박스 사왔다. 첫 인상이 좋아서 자주 찾아와서 미안하다면서 수줍어했다. 회사일이 원만하게 처리 될 것 같다고 했다. 다행이라 마음이 좀 놓였다. 에미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다가 답답한 지 딸내미가 말을 꺼냈다. “아저씨는 명함도 없어요, 명함 하나 주세요. 울 엄마가......, 우리 동네 청하에 가자미회로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밥을 한번 사겠다네요......,” 관리자가 아니라서 명함이 없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갑자기 당돌하게 나오니 내 얼굴이 붉어졌다. 괜스레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 땐 왜 명함을 박지 않았을까. 당시만 해도 다들 내 인물이 쪼매 살아 있다고들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열정적이고도 풋풋한 삶이었지, 영혼도 맑았고.......,
(2014.03.24)
첫댓글 ㅎㅎㅎ세상 살아가기 참 힘들지요?
저도 때로는 이 썩을 놈 세상 콱 망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적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다 그기에 그기 ........사람들이나 말로 속이고 ..........
뭐 한자리 하는 사람들은 아래 직원들을 개 다루듯 다루고 ......
그래도 님 같은 좋은 분이 있어서 이 세상이 아직까지 망하지 않나 봅니다.
이 밤도 건강하시고 좋은 꿈 꾸는 행복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문장이 예사롭지 않게 유창하고 글 또한 맛내기 듬뿍 넣은 음식 같아요^^
첫인상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가 봐요.. 겉도 속도 한결같이 아름다우면야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험상궂은 겉모습에 착한 마음씨보다는
포근한 겉모습에 얼음같은 내면이 인간관계에서는 자신에겐 유리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