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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수도회] 지금, 빛과 사랑을 끌어안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요한 2,3-11
† 복음 루카 2,22-35
★ 사랑의 계명에 대한 준수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며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제1독서).
★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봉헌하러 성전을 찾았을 때 시메온은 아기를
보고 구세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아기의 어머니에게 이 아기가 사람들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며, 마리아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듯 아픔을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간 살아온 모습을 돌아다보는 때입니다. 과연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고 기쁘게 살아왔는지 저 자신을 성찰해 봅니다.
이런 시간이 되면 눈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소나무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립니다. 저 나무들에 비하면 저는 얼마나
자주 갈대처럼 흔들리고 눈앞의 어려움과 유혹에 굴복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돌봤는지를 부끄럽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가을의 짧은 휴가 때 가 본 경주 삼릉의 소나무들은 이 겨울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이른 새벽, 그 소나무 숲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하고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사실 언젠가 사진으로 본
그곳의 소나무 숲에 대한 잔상이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 오랜만에 경주에
간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배병우 사진작가는 자신의
사진집에서 소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천’ 하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럼 사람과 하늘을 잇는 매개는 무엇인가?
나는 소나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기에 나는
소나무에서 절대적인 정신성과 영혼의 모습을 본다.”
아마도 눈보라 속에서도 소나무가 보여 줄 ‘절대적인 정신성과 영혼’이란,
우리 신앙인에게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확고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드러낼 ‘반대받는 표징’이 되실
것이라고 오늘 시메온은 성모님께 예언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정의와 인권과 창조 질서가 위협받는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끊임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새해를 준비하며
주님의 길에 올곧게 응답하기를 결심하면서 주님께 그럴 은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끄떡없이 서서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소나무가 어서 보고 싶어집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제 3의 길" -주님의 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9일 월요일(뉴튼수도원 49일째)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1요한2,3-11 루카2,22-35
2014년 나해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제 3의 길" -주님의 길-
오늘은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 3의 길, 주님의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어제 수도원 묘지에 갈 때 봄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상 기온 탓인지 봄 날씨 같았습니다.
'아, 겨울 속에 봄이, 절망 속에 희망이, 어둠 속에 빛이, 죽음 속에
빛이구나! 현세의 삶 안에 이미 내세의 하늘나라이구나!' 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사는 것이 바로 제 3의 길입니다.
2.
요즘 겸손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몇 달전 전임 시몬 아빠스님을 방문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생각납니다.
작은 음성으로 '고백성사' 운운하시기에 웬 말씀인가 했는데,
저에게 고백성사를 보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여 고백성사를 드렸는데 '겸손이 참 아름답다'는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서도 전임 미국 출신의 조엘 아빠스님과 루가 수사님도
묵묵히 낮은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도 겸손을 배웁니다. 미국 수도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번성기때의 뉴튼수도원을 생각하면 비애를 느끼기도
하겠지만 전혀 그런 내색없이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현재'를 사는
것이 바로 겸손임을 배웁니다. 바로 겸손이 제3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3.
여기 미국의 뉴튼수도원이 부러운 것은 광활한 사막 같은 외적공간입니다.
외적공간이 넉넉하니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마음도 넉넉하고 여유로워지는
느낌입니다.
한국의 작은 외적공간에서 어떻게 내적공간을 넓히며 살아야 할지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제3의 길입니다. 끊임없는 수행이 목표하는 바도 사랑의
수행을 통한 마음의 비움이자 순수입니다.
이래야 제 3의 길, 넓은 내적공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
'버티지 못하면 자살이고, 버티면 암이다'라는 인터넷에서 읽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각박한 현실을 풍자한 말입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살 길이 바로 오늘 소개할 제3의 길입니다.
5.
올 한해를 되돌아보는 사자성어로 교수들은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꼽았다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사슴을 말이라
했다'는, 거짓이 진실인양 횡행했던 한 해를 풍자한 말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습니다. '거짓말로 세상끝까지라도
갈수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예측 가능하고 신뢰가 있어야 하며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회개와 진실이 제3의 길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제3의 길'에 답을 줍니다.
주님의 길, 사랑의 길, 생명의 길, 겸손의 길입니다.
평상심이 도란 말도 있듯이 아주 평범한 길입니다.
길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계명에, 말씀에, 일상의 하느님 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빛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성탄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요 이게 제3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와 시메온이 그 모범입니다.
모두 일상의 계명에, 제3의 길인 사랑에 충실했던 분들입니다.
'모세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율법에 충실함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 봉헌한 예수 아기였기에 마리아, 요셉 부부는
예수 아기를 하느님의 선물로 믿어 참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전 존경했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수차 인용했던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명답입니다. 규칙대로, 법대로, 말씀대로, 계명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이요 제3의 길입니다.
시메온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에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니라 시메온처럼 이런 일상의 하느님 계명에 충실한,
의롭고 독실한 자가 참 신비가입니다.
이런 이들 위에 머물러 계시는 성령입니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메온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했던 시메온에게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했던 하루를 마치고 매일 끝기도때 마다
시메온과 함께 바치는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했던 우리 역시 시메온처럼
예수님을 한 가슴 가득 받아 모시고 주님을 찬미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지금, 빛과 사랑을 끌어안자!/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9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루카 2,22-35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루카 2,32)
지금, 빛과 사랑을 끌어안자!
성모와 요셉이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주님께 바친 것은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인간의 질서와 법 안에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다른 면에서 이는 하느님 친히 사람의 손에 자신을 맡기시어
사람들 깊숙이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일 년 된 어린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칠 수 없을 만큼 가난하여 비둘기를 정결례 예물로
바쳤다(루카 2,24). 그들이 속죄의 행위로는 필요치 않은 성전으로 아기를
데리고 감으로써 아기가 속죄되는 대신 하느님의 일을 위한 성별이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속죄된 것이 아니고 주님께 성별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셨으며, 다른 이를 위해 ‘피를
쏟아’ 봉헌되며 구속하실 분이시다. 인간의 법규와 제도에 복종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가난 속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이 분을 알아보고 찬양한 사람은
시메온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죽기 전에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고
열려주셨다(2,26).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는 성령의 이끄심 아래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παρ?κλησις)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다(2,25).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 속에 살았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구세주
메시아로 오신 아기를 알아보았고 팔에 안아들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시메온의 노래는 어렵고 힘든 길고 긴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모든 것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구원의 노래인 것이다. 시메온은 이렇듯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상징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메시아를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자 참된 응답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며 우리 인간이 걸어야 할 신앙의 여정과 마음가짐을
집약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2,32)으로 드러난다.
‘빛’(φ?ς)은 구원에 대응하는 말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전 생애에
걸쳐 기다려온 구원을 본 의로운 종(δο?λος), 시메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2,29).
가난한 나자렛 가정의 봉헌 속에 만민의 빛으로 오신 분을 맞아들이며
사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제1독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1요한 2,4).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며 그분 안에 있게
된다(2,5).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2,6). 빛으로 오신 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0).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2,11).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는 것이고, 사랑으로 오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모두를 내 세포 안에 새겨 혼이
되고 숨이 되어 움직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시메온처럼 늙을 때까지 그저
구세주를 기다리면서,자기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지금’ 과감히 버릴 것을 버리고
그분의 마음과 말씀으로 채우자. ‘지금’ 사랑하고, 기부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과거를 붙들고, 내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외모나 나이 먹어감이나 재능을 탓하고 있을 때, ‘지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은 흔적 없이 나를 스쳐
사라져버릴 것이다. 지금 기쁘게 살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2014년 나해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슈퍼마켓 체인점의 잘 나가던 지점장이었던 토마스 스템버그는 어느 날
사장과 싸운 뒤에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쉬는 동안 컴퓨터의
프린터 잉크가 떨어져 사러 나갔지요. 그런데 마침 그날이 독립기념이라
동네 문구점은 다 문을 닫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내까지 나갔습니다.
하지만 시내에도 잉크 파는 곳이 없어서 몇 군데를 힘들게 돌아다닌
뒤에야 겨우 잉크를 살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누구나
편리하게 원하는 물건을 사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 생각이
오늘날의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문구류 소매점
체인인 스테이플사의 CEO 토마스 스템버그입니다.
그가 만일 필요한 컴퓨터 프린터 잉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가 만약 해고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그는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는 실패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또 다른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든 체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어렵고 힘든 체험, 실패라고 생각할
수 있는 체험을 하지 않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과 시련이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께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봉헌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서 한 나이 많은 예언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없었지요.
성령께서는 죽기 전에는 꼭 그리스도를 뵐 것이라고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를 알 수 없다고 해서 대충 살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의롭고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 의롭고 독실한
신앙심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했으며, 갓난아기일 뿐인 예수님을 보고도
구세주이심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뵙고 싶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바로 의롭고
독실한 마음입니다.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고통과
시련에도 절망 대신에 희망을 선택하여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마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주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의로운 생활,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 등...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너무나 많네요.
건강한 태도는 전염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전염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 전염병의 매개체가 되라(톰 스토퍼드).
말론 브랜도 이야기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 패트리샤 보스워스)
브랜도는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그를 미워했다.
“나는 생각하곤 했다. 하느님, 그 인간을 나한테 딱 8초만 살려
보내주십시오... 그 인간 턱을 부수어 버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브랜도는 이런 감정들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자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생각했다.
“내 안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거의
평생 그랬듯이 분노에 차 있던 사람이다.”
결국 브랜도는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려면 아버지의 모든 경멸과 혹평과
심리적 학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미움은 결국 자기만 손해입니다. 자기가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지요. 자기만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니,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미움에서 용서의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킬 때, 결국 내가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자유로우십니까? 스스로 지금 나를 가두고 있으며,
이 순간에도 풀어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인내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29일 월요일 성탄 8일 축제 내5일(루카2,22-35)
2014년 나해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인내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라.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_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예수의 데레사). 하느님만을 갈망하며
인내로 의롭게 살아온 시메온의 모습과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기다림이 컸으니 그를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품에
안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인내로 기다린 시메온은 하느님의
충실함을 다시금 만났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녀야겠습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편지에 보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요한 2,9-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빛이신 주님은 이웃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계명은 내가 완성하는 악보
2014년 나해 12월29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복음: 루카 2,22-35
< 계명은 내가 완성하는 악보 >
‘원스(once)’란 아일랜드의 음악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두 남녀인데,
남자는 10년 간 사귀어오던 여자와 헤어져 그 그리움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길거리 통기타 가수이고, 여자는 여자 아이가 있지만 남편과는 따로 사는
별거녀입니다.
둘이 음악을 통하여 가까워지지만, 결국 남자는 런던에 사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를 찾아 떠나고 별거녀는 다시 남편과 재결합하며 끝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 둘의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여자는 더블린 길거리에서 장미꽃을 팔며 어머니와 딸을 부양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음악에 관심은 있지만 음악을 하지는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물론 남자도 기타들고 혼자 노래하며 남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살아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만나 음악으로
가까워진 이들이 처음으로 함께 간 곳이 바로 여자가 피아노를 유일하게
칠 수 있는 공간, 악기를 파는 가게입니다.
제가 감명 깊게 본 장면은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이 남자와 돈이 없어 악기
가게에 가서 피아노를 연습하는 여자가 그 가게에서 함께 남자가 작곡한
노래를 맞추어보는 장면입니다. 남자는 자신이 쓴 악보를 내밀고 여자에게
피아노로 연주를 부탁 합니다. 이 노래는 기타로 혼자 불러서는 맛이 안
나는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화음을 넣는 코러스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여자가 피아노를 치며 화음을 넣어 주니까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이 둘은 노래에 취해 온 세상에
자신들만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화음을 맞춰가며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노래를 완성합니다.
이렇게 서로 잘 맞는 것을 확인하고서 남자는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앨범을
녹음하고 그것을 가지고 꿈을 펼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떠나면서 새로 결합하는 남편과 행복하라고 몰래 피아노를 선물로
사주고 갑니다.
남자는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음악을 완성시켜 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파트너를 만나면서
자신의 노래에 자신도 놀랄 정도로 좋은 음악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바로 계명입니다. 그분의
삶을 한 문장으로 축소시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나로
축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어둠 속에서 살고 있어서
지옥으로 가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언제나 ‘내가 그분 사랑 안에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를
통해 완성됨으로써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당신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 사랑의 악보를 우리에게 내밀고 함께
연주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악보대로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고
코러스를 넣어주지 않으면 그 악보는 초라하게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악보가 나를 통해 완성되면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나는
그 완성된 사랑의 하모니에 취해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의 하모니가 완성되면
거기서 오는 행복감은 이 세상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모니 안에 살게 되면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계속 그 음악만
연주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이 함께 계시고 또 그분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계명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그분이
우리에게 내미시는 당신의 악보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누구 무엇을 위해 나를 바칠 것인가.
2014년 나해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누구 무엇을 위해 나를 바칠 것인가.
누구 또는 무엇을 위해서 사람의 인생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합니까?
부모는 자녀를 누구 또는 무엇을 위해서 기르는 게 좋다고 봅니까.
다 큰 나는 또 누구, 무엇을 위해서라 한 목숨 바치겠다고 생각합니까.
이 문제에서 내 인생의 가치가 정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중하고 정말 올바로 결정하지 않으면 내 인생 가치는 형편없어집니다.
재물이나 나, 가족만의 영역을 넘어 인류지혜로 하늘과 함께 정합시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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