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토/신/앙/강/좌 7
'왕생론'에 대한 연구
정희수/ 위스콘신대 불교학 박사과정, 본지편집위원
1. 머릿글
정토신앙은 대승불교의 굵직한 갈래이며 불교의 전체적 구조를 요약하고, 설명해주는 핵심적인 말이다.
정토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믿음이란 어원의 의미와 그 한계에 대한 정리가 확연하지 않은 점이다.
만약 "불교는 믿음의 종교이다” 라는 명제를 내어 놓는다고 하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유신론적 (有神論的) 인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데 무엇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전에도 반복되어 언급되었으나, '정토신앙은 그러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위배되는 반불교적인 유신론적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이 반복되게 된다.
정토신앙의 구조와 내용을 배워갈수록, 이 신앙은 어떤 유신론적인 신앙이 아닌 대승불교 일반이 가르쳐 온 신앙의 주류에 속한다는 답을 갖게 된다. 다만, 요사이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불교적인 언어가 아니고 서구의 기독교적 언어에 불과하다고 하는 상대적인 편견이 있기 때문에 와지는 오해일 뿐이다.
"신앙”이란 모든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종교경험의 표현이며 이 신앙은 그 종교적 상징체계에 따라서 그 본질적 내용과 표현구조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교의 고귀한 진리체계에 입산하는 초심자의 관문은 역시 신앙이며 그 신앙은 불교적인 해방과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당연히 믿음의 종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불교적 신앙의 정확한 이해를 논의해보고 초기 정토신앙이 규정해 왔던 믿음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초기 정토경전적인 가르침과 동북아시아에서 전개된 정토신앙의 발전형태는 간격이 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경전적인 신앙(Scriptural faith) 대중적인 신앙사이의 매꿀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고 있는 엄연한 실제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앙이 일반 신앙인의 구체적 실천으로 표현될 때 불가피한 양식의 차이이며 종교적 심성의 차이일 것이다.
2. 어원적인 분석
초기 불교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보다 면밀한 연구가 없이 불교적 신앙의 내용을 논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위 불타의 근본적 가르침이 무엇이었느냐하는 불설 (佛說) 에 대한 이해없이 전반적 교의를 논의하는 것이 때때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초기 불타의 교의가 배태되고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친것은 당시 인도의 신앙적 배경이다면 처음으로, 가르침이 형성된 동기는 당시의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다원적 배경에 대하여 불타 자신의 깨달음의 경험을 정리하고 당시의 중생들에게 옳은 삶을 엮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견(邪見)들을 비판적으로 지적해 보이면서 그 그릇된 견해들에 유혹되지말고 불타의 깨달음과 합류하며 공동체적인 구도의 삶을 모색해 가지는 강력한 요청이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올바른 견해 (正見)는 초기 신앙의 구조이며 대상이기도 하다. 신앙이란 말은 이런 배경에서 다양한 전통을 대변해 올 수 있었다. 우선은 신애(信愛)' 라고 번역될 수 있는 브라만계통의 Bhakti 라는 개념이 당시에 대중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바크티' 라는 말은 힌두교 전통의 경건적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는 말이다. 바그바드기타( Bhagava-dgita)에는 제신(諸神)에 대한 예경과 철저한 경전을 내용으로 하는 신앙이야기가 소개 된다. 이것은 절대적 신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유사한 유신론적인 성격의 믿음을 그 내용으로 한다. 제신들의 육화(肉化)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것의 인격적 표현 속에서 대상화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이 이 신앙의 특징적 요인일 수 있다.
바크티'(Bhalti)는 어원인 바즈' (bha)에서 기원한 말이다. 그 의미는 다양하지만 예를 들면 그것은 "구분하다, 나누다, "분급하다'는 뜻이 있으며, '봉사한다, '예찬한다, '사랑한다'는 등의 의미가 어원적인 의미이다. 힌두교 문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신애는 '순정적이고 경건한 사랑을 그 신앙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크티'적인 믿음의 양상은 초기 불교에 많이 소개되어지고 전승된 내용이나 초기 불교도들에게 완전하게 수용된 내용은 아니다. 정통경전의 편집자들은 이 ‘바크티'적인 신앙에 대하여 익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를 갖게 되지만 실제 경전에 차용되지는 않은 점을 주목하게 된다.
초기 불교경전에 속하는 테라가타( Theragata), 자타카(Jataka) 등 팔리경전에는 바크티 (Bhakti)' 라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사다 (Saddha)', 즉 '경건적 신뢰'라는 말과 친교' 라는 뜻의 '페마(Pema)’ 그리고 '정화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파사다’ (Pasada) 등과 동의어로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을 보게 된다.
이런 면에서 초기 불교의 '신앙’ 에 대한 이해는 브라만적인 양상과 구분하려고 했던 초기의 강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편재한 제신들의 경건적 신앙이 내용적으로 토착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적인 대상을 향한 애정적인 믿음을 표현으로 하고 있는 ‘바크티'적인 신앙은 초기 불교를 전수받은 많은 초기 신행인들의 삶의 양식 또는 바탕일 수도 있다는 점을 신앙 이해의 폭에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신앙이란 말은 '프라사다(Prasada)' 즉'정신' (淨信) 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말의 의미는 '순수한, '맑은'이라는 뜻이며 발전적인 의미로는 '완연한 만족' 또는 기쁨' 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또한 순결한 사랑' (Purified Lov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내면적인 심미적 상태를 설명하고 지창하는 양상의 믿음 수 있다. '프라다' 적인 믿음의 양상은 초기불교의 신앙을 설명하는데 차용되는데 대개의 경우 불교적 경험속에서 , 정적 (靜寂)이나 '평등' (平等), 또는 '마음의 안정' (安定)을 표현할 때 왕왕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프라사다' (Prasada)는 어떤 경건주의적인 신앙이나 힌두교 전통의 신애 (信愛)의 범주와는 구분되며, 명상과 관상적인 전통속에서 체득되는 신앙을 보다 내면화하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정토경전속에는, 승개 (僧鎧)의 번역본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있는 제18원의 신요' (信樂)라는 개념이 바로 '프라다'에서 번역된 것이라는 점을 보게 된다. 프라다는 명상을 통한 내면적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한 신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정토신앙의 부분적인 특징은 바로 이 완연한 기쁨과 만족' 이란 차원의 신앙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로는 '아디티' (Adhimukt)라는 말로 ' 신해' (信解)로 번역되어진다. 이것은 경전상에 명사의 형태보다는 형용사나 동사의 형태로 (adhimuktilka, adhimucyati)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보다 인식론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만 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그 연기의 원리들에 대하여 깊숙히 신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볼 때 아디묵티' ( adhimukti)는 바로 이런 실상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 믿음의 경험이라고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장(Hsuan-tang)은 이 말을 뛰어난 이해' 라는 뜻의 "승지" (勝智)로 번역하고 있음을 본다. " 주1)大華經, vol. 26, p376a.
불교적 신앙의 특징은 만물의 현상과 그 현상의 원리에 대한 바른 생각(正思)이며 이 바른 생각을 통하여 연기적 법상을 구체적으로 삶의 내용에 수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대상을 향한 절대적인 순용이나 긍정이 아니고 불타의 근본적 가르침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만상의 정확한 인식과 그 인식을 위한 믿음의 행위가 불교적 신앙일 수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불교적 신앙은 인식론적인 차원과 함께 종교적인 통전성이 동시에 경험되어지는 합류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이 먼저냐 이해하는 것이 먼저냐 하는 신(信)과 해(解)의 논쟁은 종교사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지적 될 수 있는데 이 신과 해의 차원이 이원론적으로 분리 되어져서 선후 (先後)를 따지는 것이 불교적 신앙의 개념적 작업에는 무용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논소( 論疏)에 따라서 이 논쟁이 야기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방편적인 편들이기에 불과한 것이다.
아디물티 (adhimukti)의 인식론적 부문이 신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음을 볼때 이는 서구의 노스틱, 소위 영지주의자들의 견해와 버금가는 차원이라고 보겠다. 이것은 대승적 신앙의 특징적인 양상을 잘 지적하고 있다.
네번째의 신앙에 대한 지침은 '쉬라다' (sraddha) 라는 말로 신(信)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믿음'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 대상의 인격적인 것이나 일반사물을 막론하고 그것에 대하여 어떤 ‘신뢰'를 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쉬라다'는 리그베다 문헌 이후에 상당히 널리 상용된 용어이며 불교경전에도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된 언어이다. 정토경전에도 이 신심(信心)으로서의 쉬라다"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주22)藤田宏達,原始淨土思想の研究 Pp.566-585
절대적 신앙의 대상에 대한 순응적 신앙과는 달리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후에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지말적 정토신앙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3. 정토신앙에 있어서의 신앙 (信仰)의 의미
이미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불교적 신앙은 하나 의 어원으로 대별해 보일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토경전들에 국한하여만 보더라도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바크티', '그라사타', '아디묵티' 그리고 '쉬라다'가 혼용되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무엇이 신앙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불교경전온 개념화하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십지경(十地經)의 경우는 불교적 수행을 이행 (易行) 과 난행 (難行)으로 이분한다. 쉬운 길로서의 이행 (易行) 은 신앙이요 어려운 길로서의 난행은 전통적인 보살수행 (菩薩修行)이다. 바수반두의 왕생론(Updesa)은 다섯가지 문을 개설하여 정토신앙을 설명해주고 있다.
정토신앙온 바크티' (Bhakti)가 상징하는 애정적인 신앙은 아니다. 또한 쉬라다'가 지칭하듯 말씀과 가르침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정토신앙이라고도 할 수 없다. "프라사다가 지적해주듯이 정토 신앙이 내면적인 정신상태나 명상적인 수행정도 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아디물티'적인 전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정토신앙을 설명할 수도 없다. 요약하면 말하면 위에서 소개되고 있는 모든 신앙의 양상이 종합된것이 정토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4가지의 전통적인 신앙 설명이 합류되고 중앙아시아의 경건적 신앙내지 조로아스터교적인 생명신앙이 합류되어진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신앙을 통하여 본원(本願)을 신뢰하고, 그 법에 귀의하는 이들의 정토왕생(淨土往生)을 믿었으며 이 정토는 단순한 지적인 차원을 넘어선 공간적인 상징체제라고 믿어온 것이다. 그 세계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도 아니고, 만져볼 수 있거나 살아 볼 수 있는 그런 대상적인 세계가 아닌 것이다. 물론 초기 불교경전들은 법(Dharma)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면 수억겁이 소용될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진리의 체계였다. 다만 신앙을 통하여 이 언표 불가능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불타에 의하여 현현된 '알려진 법"(dharma)에 대한 경험이 신앙에 의하여 제한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초기의 불타에 대한 신앙은 정토신앙의 한 원형이며, 그와 똑같은 양상으로 정토신앙이 체계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을 전승하고 있다고 보여야 할 것이다. 물론 초기 불교경전과 정토경전 사이의 다양한 이견들은 쉽게 일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1) 정토신앙과 빛'의 상징주의 종교사에 있어서 빛 (light, 光) 은 종교경험이 조우되고 현현되어질 때에 근본적인 현상으로 대두된다.
Mircea Eliade는 신비한 빛의 경험들'이라는 논고에서 정토신앙은 빛의 상징주의' (Symbolism)과 교섭된 구원(Soteriology) 전통으로 보고 있다. 주3
3) Mirace Eliade, Mephistopheles and the Androgyne, (New York, Sheed and Ward, 1965), pp. 19~77.
성서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신적인 빛에 의하여 장님이 되는 광경을 묘사하므로서 한 박해자가 기독교의 성자로 변하는 회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크리쉬나의 마야 (maya)가 아류주나의 경험을 할 때 빛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은 양상의 기록이다. 에스키모의 한 무당이 빛의 광채를 만나고 원조를 막론하고 영적인 실체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는 경험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어쨋든 빛과의 대면은 종교경험의 본질이며 하나의 현상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토신앙은 이러한 빛과의 대면' 이라는 종교현상을 그 신앙 내용의 체계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Amitabha Buddha)의 어원은 '무한한 빛의 불타'인 것이다. "내가 불타가 되었을 때 만약 나의 광채가 한계되어 지고 수천 koti (100,000)의 무제약적인 불토를 비출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결코 완전한 깨달음 (열반)을 받아 드리지 않으리라”
이 빛의 실재적 근원이 된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무량수경 12번째의 원(願)을 성취한 보살의 현현이며 달마카라 보살의 전 수행의 총체적 상징인 것이다. 아미타불의 12가지 빛의 실체에 대한 진술은 무량수경의 진수에 속한다. 무량광(無量光), 무변광 (無邊光), 무득광(無得光),무대광(無對光),청정광(清淨光), 환희광(歡喜光), 부단광(不斷光), 난사광 (難思光), 초일월광 (超日月光),무칭광(無稱光), 지혜광(智慧光)등으로 중국의 담란 (曇鸞)은 그의 찬아미타불게 (讚아미타불게)에서 언급하고 있다.주4; 眞宗聖教全書(SSZ),1.Pp.350~365
진리의 긍극적인 현현을 빛으로 본 정토신앙의 대상화는 인도의 전통속에서 그 연유를 찾아 볼 수 있다고Eliade는 말하고 있다.
"- 순수한 존재, 궁극적인 실재는 특별히 순수한 빛의 경험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 우주적인 계시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빛의 현현속에 드러나며_주5 M. Eliade, p. 30
빛을 본다"는 말은 지식의 근원이며 인식의 한 과정이라고 한 면에서 이것은 신앙의 내용으로 인도에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영적인 전통속에서 빛'은 인식이 경험되어 질때 발생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며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정토신앙적 요소로 도입하였을 가능성에 대한 전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불타는 깨달옴을 갖게 되므로 모든 중생을 광채나는 인식의 도량(道場) 으로 인도한 분이며 깊은 명상속에서 캄캄한 밤을 맞고 지샌 새벽 하늘의 별과 같은 상징적 존재로 대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승불교는 이 불타의 깨달음을 여명의 빛으로 상징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수행인인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해야 할 자유의 빛이 된 것이다. 이 빛은 청결하고 순수한 빛으로 어둠이나 음지의 요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해방의 상징으로 숭상된 것이다. 중관학에서는 이 빛을 비어있는', '아무것도 없는' 공으로 보게 되고 빛의 상징주의는 우주적 공상 (空想)에 비교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간다라 미술에서는 이 빛의 상징주의를 동원하여 불타와 온갖 보살등의 깨달음과 후덕한 지혜를 예술로 시각화했다. 이 빛의 상징은 정토신앙 속에서 다시 지혜(Prajuna)의 전통과 합류한다. 이러한 빛의 실재를 신앙의 내용과 대상화 작업에 구조화 한것이 바로 정토신앙이라는 이해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빛을 안다는 것은"그 자신이 실재가 되는 신화적인 합일이 이 신앙적 내용속에 융화되는 것이다. 후에 이것은 기법일체 (機法一切)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6; Paul O. Ingram, The Synbolism of Light and Pure Land Buddhist Soteriology,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1/4. Dec. 1874
2) 정토신앙의 개념적 발전
용수 (Nagarjuna, C. 150~C. 250)의 대승불교적 체계속에서 신앙의 자리는 이미 전장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불퇴전의 경지(avinivartaniya)에로 이행할 수 있는 중심적인 실행으로 본다. 이 경지는 신앙의 성취의 결과로 와지는 열매이며 업(業)의 쉼없는 정화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룰 수 있는 불타의 진리로 요약된다. 이행도 (易行道)로 설명되어지기도 하는 이 신앙의 실천은 불타의 이름과 공덕을 향한 하나의 수행의 길로 제안되어진 것을 정토신앙의 초기적 형태로 볼 수 있다.주7 信樂峻磨 京都,1975),Pp153~188.
세친(vasubandha A.D. 320~ 400)은 왕생론 (또는 淨土論)을 퉁하여 아미타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다섯가지 명상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 오념문(五念門)은 불타를 향한 최상의 귀의를 목적으로하여 신앙의 방법과 실제를 논해주고 있다. 세친(世親)의 신앙 이해는 이 모든 정신적 수행의 중국에는 궁극적인 신앙이 자리하는 것으로 종합한다고 볼 수 있다.
담란 (Tan luan, 476-542?)은 초기 중국의 정토학자로서 정토교의 중국적 전개에 공헌한 분인데 그는 그의 주저인 왕생론주 (往生論註) 를 통하여 세친이 발전시킨 교의를 해석하고 신행을 권장하고 있다. 그는 칭명 (稱名), 즉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불하는 수행을 발전시키고 어떤 근기에 있는 수행인이든 불타의 이름을 외우고 그의 가르침과 덕을 계속하여 염불하면 왕생하게 된다고 하는 구원론올 전개하기에 이른다. 아미타불에 대한 십념(十念)사상도 여 기서 발단이 되며 이를 통한 계속적인 수행과 악의 소멸을 향한 정진과 신적인 능력을 신앙의 결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은 보다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과 그 결과로 서술되기 시작했으며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의 수행은 정토신앙의 주류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온전히 염불을 통하여 자기의 악업을 교정하고 선업의 성취를 위한 보살행이 왕생하게 되는 연유로 소개된다. 분명한 것은 담론에게 있어서의 신앙은 여전히 수행의 한 부문이라는 점이다. 주8 상계서, pp. 287~298
선도(善道, 613~681)는 주로 관무랑수경( 觀無量壽經)에 대한 주석작업을 통하여 근기가 약한 범부중생이 어떻게 극락왕생할 수 있느냐는 점에 주목한다. 한 마음으로 전력하여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행위로 염불 (念佛) 을 강조하며 이 염불을 퉁하여 불타를 보는 행위로서의 삼매(三昧, Samadhi)를 성취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신앙과 지혜의 양면적인 부분이 그의 정토신앙 이해 안에 합류되고 용해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 염불삼매 (念佛三昧) 내지는 관불삼매(觀佛三昧)는 선도의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선도(Shan tao)는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도 구체적인 착안을 한다. "불타를 믿는다',"법을 믿는다, 불어 (佛語)를 믿는다. ,’인과(因果)를 믿는다.',
‘타인 (他人)의 말을 믿는다.’는 등의 대상에 대한 논의를 하므로써 범부중생이 거침돌없이 믿음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종류로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귀신 (歸信), 앙신(仰信), 의신(依信), 신향(信向) 그리고 신순(信順)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인지적인 차원의 신지(信知)를 강조하며, 신앙이 주체적인 지각의 철저한 것을 지적해준다. 신지(信知)는 자기의 현실적 존재 모습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함께 아 미타불의 본원에 대하여 투철하게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종합적인 의미가 있다.주9 상계서, pp. 345~351
보다 구체적인 사상사적 흐름은 앞으로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정토교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다룰 기회가 있을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불교에 있어서 '신앙 이란 용례를 약술해 보았다. 그 중에서도 정토신앙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진술해 보고자 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초기불교는 자기 신뢰, 자기 성취, 그리고 자기 해방의 가르침이었다. 깨달음( Sambodhi) 이나 해방(Vimutti) 은 항상 철저한 자기 훈련의 연장에서 이해되었다. 심지어 불타자신에 대한 의지마저도 파기된 것처럼 기술되어졌던 것을 우리는 본다.
“너 자신이 너의 등불이 된다. 너 스스로가 너의 귀의처가 된다. 너 자신 밖의 어떤 것에도 귀의처를 삼지말라" (Atta_- 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 sarana!) 주10한 것이 불타의 영적 수행의 기본이었다는 점을 주목 해 볼때 어떤 대상이나 어떤 인격을 향한 신앙의 자리 는 상당히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註10) Digha-Nikaya, XVI.2.26
불타의 열반 후에 이 전통은 법 (法, dharma) 에의 귀의로 대체된다. "이 법을 보는 자는 불타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는 선포는 점차로 철저한 자기 의지, 자기 성취의 수행 과정속에 예경과 귀의의 대상이 자리하게 된 점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미약하나마 신앙적 견지( Faith aspect) 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근본불교의 철저한 수행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에 철저히 귀의하고 신앙하는 타력에 대한 신앙의 논지로 변천해 온 과정은 발전사적이 철저히 논리적 일 수는 없다. 이런 진전에 대하여 스즈키 다이세츠는 어떻게 그런 종교사적 변형이 가능했는가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불성 (Buddhahood)에 대한 사상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윤리적 신비주의적 요소가 이런 변형의 동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소위 본생담 (Jataka)적인 요소가 불타의 삶을 종교적 대상화로 발전 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고 그 곳에는 초월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것은 대승불교의 시원 과정속에서 타력적인 구원론의 전개에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는 지적이다.
본생담에는 이미 원만한 바라밀의 턱을 수행하고 금욕적인 행위를 통해서든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이 수록 되어져 있고, 이런 인연으로 인하여 어떤 상대적인 경쟁자 없이 최상의 해방을 불타가 완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전생담인 달마카라 보살의 수행기로 연장되고, 그의 수승한 수행과 뛰어난 지혜와 자비 실천이 아미타불의 연기적 이야기가 된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본원사상도 역시 이 초기불교의 본생담으로부터 그 기원을 볼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이 변형의 과정을 스즈키는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여래 ,(tathagata)와 불타(Buddha) 들은 모두 이 신비한 요소들과 함께 공간적 차원의 비속세적인 세계의 주인들로 등극한다. 이것은 수많은 종류의 정토(淨土)가 대승경전에 소개되고 있 는 점과 같은 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다.
두번째로 스즈키는 소위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형상은 불타의 생애에 있어서의 위대한 성취이며, 불교사에 있어서는 지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뛰어난 신비의 세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바로 이 초월적이고 신적인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는 이성적이거나 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타원의 세계가 아니고 아주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경지를 일컫기 때문에 이것이 대승불교의 신행의 대상이 되게 되었고 이는 초기불교에서 정토불교에로의 파라독시칼한 변천을 낳게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무상각(無上覺)은 아미타여래의 본원(本願, Purvapranidhana)의 시원이 된다고 동일화하고 있다. 이 초월적인 깨달음은 중생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원초적인 깨달음의 성취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은 무지와 편견과 혼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구원의 원형 (原型)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세번째로 그는 주목하기를 불교사상속에 형이상학적인 중요성을 갖는 회향(廻向, parinamana)의 정신을 정토신앙에로 이양하고, 특히 자기 본위의 일상사에서 다른이들의 깨달음이나 영적인 성취에 주의하게 되고 후원자가 되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불교사상사내의 혁명적인 음성이며 이 회향의 메아리는 근본불교의 한계된 지적관심을 보다 우주적인 구원사적 관심에로 트이게한 깃점이 된다. 회향(廻向)은 자기의 구원 성취를 위하여 축적해온 덕의 개량을 이웃을 위하여 공개하고 나누며 그것을 철저하게 전입 (轉入) 해가는 가르침 이 되기 때문이다. 근본불교의 철저한 자기관심과 자기 성취의 나락을 혁신하여 실천적으로 모든 중생들의 구원 올 위하여 일하고, 모든 중생의 구원을 위하여 신비적인 자기처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이 회향 (廻向)은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네번째로 스즈키는 이 회향사상이 성립된 이후에는 당연히 타력과 본원사상의 불가피한 성취를 향하여 모든 깨달음의 경험이 지향되야 한다고 본다. 소위 범부나 천인들의 삶 속에도 이 본원은 희망의 요인으로 해석되며,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이런 면에서 자력과 타력의 융 합이란 구조를 갖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아미타불 의 명(命)에 대한 자비행의 응답을 가져오며 깨달음에 대한 지적인 해석과 동시에 대자비(mahakaruna) 를 실천하므로써 모든 중생이 그 깨달음에 동참하게 한다는 양면성이 요구된다. 이점에서 스즈키는 보다 점차적인 정토신앙의 발전을 초기불교와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주11 Suzuk. D. T. "The development of the pure land Doctrine in Buddhism", Eastern
Buddhist, vo,.3. No4. (1925) pp.285-326
결론적으로 불교사상의 다양한 특성들의 한 국면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고 보완해가는 해석학적 노력의 흔적을 스즈키를 통하여 보게 된다. 불교 신앙적 요소가 가르치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므로써 각기 다른 처지와 근기를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 신심 (信心)을 회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 일국의 국교로서의 불교가 전승해온 여러가지의 수행과정을 정토 신앙을 통하여 보다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1992년 8월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