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4)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6)
에제키엘서 34장 14절은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는 일의 결과로, 유다
백성이 이전의 고통과 아픔을 잊고 풍요로움과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교차 대구 구조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4절에서 '좋은' 풀밭과 '기름진' 풀밭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좋은'에 해당하는
'토브'(tob)는 몇 가지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있던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나무 열매(창세2,9)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고, 이집트에 있던 칠 년
풍년 기간에 거둔 풍성한 수확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창세41,9).
그리고 '기름진'에 해당하는 '샤멘'(shamen) 역시 14절처럼 식물을
수식하는 경우 풍성한 소출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 선민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길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같이 먹을 것의 풍성함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에제키엘서 34장의 유다 백성을 양에 비유하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그들을 먹이시는
목자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유다 백성이 하느님의 징계로 인한 바빌론과의 전쟁을 겪고
선민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칼에 죽은 사람이 굶주려 죽는 사람보다 복되다고 할
정도로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녀를 잡아 먹는 참혹한 상황을 겪었던 뼈 속 깊이
박힌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예레4,8-10; 5,9.10)
한편, 14절에서 양이 유다 백성이 회복되어 거처할 장소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있는
목장으로 묘사되었다. '높은 산'이라는 표현은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은 13절에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높은 산'이 '좋은 목장'이 되는 것은
안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전능하신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우상을 섬겼지만(에제20,28), 하느님께서 그들을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신 이후에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변화되어 그곳에서 하느님을 섬겼다(에제20,40).
본절에 기록된 '높은 산' 역시 지형적으로 안전한 산일 뿐 아니라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상이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목자로 계시는 영적으로 안전한 산이므로 유다 백성은
더 이상 이방 민족으로 인해 수치와 멸망을 당하지 않으며, 영원히 안전하게 거처하게
될 것이다.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16)
앞에서 에제키엘서 34장 13절과 14절에서는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양 떼인 선민 유다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어 기르시고
돌보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34장 16절에서는 유다 백성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 부러진 양, 아픈 양을 먹이시고 돌보실 것이지만, 기름진 양과 힘센 양은
없앨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상 본절의 내용은 악한 목자들이 자행한 탐욕과 방임을
지적한 에제키엘서 34장 4절의 내용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34장 16절에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의 대상이 될 유다 백성을
비유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양에 대한 묘사는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를 제외하고는 에제키엘서 34장 4절에 묘사된
순서와 역순으로 기록되었을 뿐, 에제키엘서 34장 16절 상반절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처럼 이미 앞에서 언급된 아프고 부러진 양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약속을
본문에서 다시 반복하는 이유는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부로 자신의 배를 불린 자들에 대한 심판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거짓 목자인 유다 임금들의 권력에 의지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에
앞장서서 사리사욕을 챙겼던 대지주나 거상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방법을 기술한 '내가 없애 버리겠다'에 해당하는
'아쉬미드'(ashimid; I will destroy)의 원형 '샤마드'(shamad)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자연적 멸망이 아닌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멸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신명4,26; 28,26; 예레48,40).
결론적으로 거짓 목자들을 파멸시키시고, 자신의 양을 직접 돌보실 착한 목자로서
소개되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에제키엘서 34장 11-16절 단락에서, 15절까지는 자신의
양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로서의 이미지만 강조하다가 16절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자들에 대한 심판자로 드러난다.
특히 16절 마지막에 나오는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는 표현은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을 더욱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에제키엘서를 읽는 바빌론에
머무는 유다 포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괴롭히는
자들에게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