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가왓장도 달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제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
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
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아이로 불상하
니도 몯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시 읽기> 모닥불/백석
이 시는 일상 주변에 돌아다니는 말토막들을 무작위로 끌어다 놓았다. 잘나지도 않았고 못났다고 해서 특별히 서러울 것도 없는 이 단어들은 언뜻 이 단어처럼 살고 있는 삶의 형태와 많이 닮았다. 사람과 짐승과 온갖 잡동사니가 한데 어우러진 진풍경은 모닥불로 활활 타오른다.
시가 발표된 1936년의 상황은 불행한 시기였다. 조선 문학이 암흑기로 접어드는 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당시 시단은 모더니즘에 들떠 있었다. 조선 시詩의 미래가 바다 밖 서구 문명에서 온다고 믿었는지도 몰랐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석은 생활의 뒷전에 밀린 갓신창, 소똥, 개니빠디. 짚검불, 달의짗, 초시 등의 시어를 통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백석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고 모닥불은 타오른다. 이미지즘에 토대를 둔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라는 빈약한 주체 의식이 모더니즘은 아니라는 듯 불길이 뜨겁다. 독일인 노발리스와 미국인 포의 영향을 받은 보들레르와 랭보, 말라르메의 시정신은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도시인의 비애”가 아니라고 모닥불은 이글거린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기계와 자본에 구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을 꿰뚫어 보고 기존의 시 쓰기 방식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모더니즘의 시편들, 전통과 단절,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삶의 파편성, 소외, 자폐, 상품 시장, 집단적 강요. 삶의 무출구성, 비규범적 언술 등을 시의 정면에 나타낸 모더니즘이 본질은 기계와 자본에 대한 투쟁이었음을 모닥불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식민 시기에 타오르는 모닥불이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를 끌어안고 밤하늘에 치솟는 것인지, 분노처럼 이글거리는 것인지는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와 삶의 희망은 바다 밖 서구 문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견디어 온 불행한 역사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