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민의 정신적 자산은 1907년 서상돈이 주창하여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동참한 “국채보상운동”이고, 두 번째는 1960년 경북고, 경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대구여고 등 8개교 남녀 학생들이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한 “2·28 민주운동”이라고 하겠다. 전자는 조선이 무능하여 일본에 진 빚 1, 300만 원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감안하여 2,000만 동포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절약한 돈으로 외채를 갚아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막아보자는 운동이고, 후자는 이 운동이 불씨가 되어 3·15 마산 의거, 4·19혁명으로 승화되어 우리나라 헌정질서를 바로잡은 데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구시에서는 지난해(2020년)에 1982년부터 시행해오든 10월 8일 “대구시민의 날”을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국채보상운동취지서를 발표한 2월 21일로 바꾸는 한편 2월 21부터 2, 28일까지 1주간을 “대구시민주간”으로 설정하여 대구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다지겠다고 했다. 이로써 두 역사적인 운동이 대구시민의 자긍심 즉 정신적 자산이라고 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 2·28은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45년 전인 1915년 2·28(음력 1월 15일)은 앞산 안일사에서 윤상태 등 일단의 대구 지식인들이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국권회복단”를 결성한 날이기도 하다. 전자는 주체가 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인 데 비해 후자는 어른들로 빼앗긴 조국의 국권을 되찾자는 운동이다.
특히, 조선국권회복단은 지방에서 결성한 단체인데도 “조선(朝鮮)”이라는 전국을 아우르는 이름을 붙여 장차 조직으로 전국화하려 했고 조직도 중앙정부의 내각과 비슷하고, 특이하게도 결사 대장이란 직책을 두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려했다.
즉 “통령(統領)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서병룡), 유세부장 정순영, 권유부장 김규, 결사대장 황병기, 역원 이형재, 김기성, 마산지부장 안확 등이 부서의 장이며 이들은 만주, 러시아 등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을 취했는데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등이 만주를 왕래하며 활동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앙총부는 윤상태에게 명하여 경남 창원 진동주재소를 습격하도록 했다. 이때 윤상태는 주민 1,000명을 동원하여 현장에 갔으나 미리 연락받는 일본헌병대와 부딪혀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달구벌 1977, 대구시)
간부 (부서장) 9명과 회원 24명 중 기밀부장 홍주일은 1916년 명신학교(훗날 기생 출신 육영사업가 김울산 여사가 인수 한 복명초등학교 전신)를, 1921년 교남학원(현, 대륜 중고교 전신)을 김영서, 정운기와 함께 설립하고 명신학교 교장직을 통해 학생들에게 애국 사상을 고취하였고, 외교부장 서상일은 해방 후 제헌국회에 진출 헌법기초위원으로 정부 수립에 이바지하였으며. 회원, 박상진은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독립군 지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칠곡의 모 부호를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를 받고 여러 사람의 권유에도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고 옥중에서 처형되었으며, 유학자 장석영은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파리장서”를 초안했으며,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을 설립한 최준 경주 최부자도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1919년 5, 6월경 모 씨의 밀고로 28명의 신원이 노출되고, 그중에서 13명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예심에서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2년 3개월 만에 풀려났다. 따라서 조선국권회복단은 4년여 존속할 수밖에 없었으나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통제를 더 노골화된 시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결성한 비밀결사라는 점과 전국을 망라하려 했던 큰 목적을 가지고 조직한 점에서 이의가 크다하겠다.
올해는 2·28 민주운동 41주년이자,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06년이 되는 해다. 향후 대구시의 시민주간행사 과제에는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이 추가되어 시민의 정신적 자산이 더 풍성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