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순의 풍수이야기]
월간 사람과산 2013년 01월호
무갑산 전경.
해공 선친묘의 능선에서 바라본 무갑산의 위용.
생가 앞의 경안천을 건너 무갑산의 기슭에 해공의 선영이 있다.
고조부-증조부-조부-선친-형제 조카들이 묻혀 있다.
경기도 광주의 무갑산武甲山(581.7m)에 묻힌 신립장군은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패전의 한을 삭이며 왜군이 지나간 길목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묻힌 산 이름이 갑옷으로 무장한 산이다. 항상 유비무환의 자세를 잊지 마라는 교훈이다.
일제강점기에 온 백성이 신음할 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해공 신익희申翼熙(1894-1956)는 신립의 11대손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조상이 잠든 무갑산의 정기를 받은 신익희는 항일운동의 본거지인 임시정부에서 독립의 불꽃을 태웠고, 건국 후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지도자로 우뚝 서 있다.
글 사진 |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원장, www.locationart.co.kr)
천년을 이어온 명문 세가의 시조 신숭겸申崇謙장군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927)은 고려개국의 1등공신이다.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고 왕건은 간신히 도망을 하는 신세가 된다.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이 되자, 신숭겸 장군은 왕건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왕건의 갑옷과 마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주군을 대신하여 전사한다. 그는 역사에서 충정과 의기의 상징이 되었다.
신숭겸은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사람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선대가 곡성谷城사람이라고 전한다.
어느 날 평산을 지날 때 왕건의 명령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맞추었고,
왕건이 기뻐하며 평산 땅을 하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관을 평산平山으로 하였다.
신숭겸은 개국원훈대장군으로 추대되었지만, 고려왕조에서는 후손들에서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아마도 신숭겸장군 무덤의 사격砂格이 너무 좋아 천객만래지지千客萬來之地이기는 하나 무인의 기상을 간직하기에는 아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평산신씨는 조선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세종대에 신개申槪(1374-1446, 신숭겸 14세손)가 대제학과 좌의정이 되어 명문가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의 증손이 신상申鏛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고손녀가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신립장군 묘역. 무갑산의 남쪽 용맹에 올라서 있다.
선친인 신화국, 신립장군, 손자 신해의 묘가 상도동 국사봉 아래 선산에 함께 있었으나,
고손자 신완(영의정)이 신립장군의 묘를 곤지암읍 신대리로 이장하여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맥 활화산을 터뜨린 신립장군의 기상으로 평산신씨 가문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23명의 무관無官의 재상宰相들을 배출하였다. 독립운동가는 나라가 임명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으므로 무관의 재상이라 할만하다.
신숭겸의 무맥유전자가 윤관의 무맥유전자를 만나다
평산신씨는 신숭겸장군의 후예답지 않게 600년동안 문신을 배출해오다가,
19세손인 신립장군(1546-1592)에 이르러서야 무인의 유전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신립장군은 이조판서신상申鏛의 손자이고, 아버지 신화국과 어머니 파평윤씨의 셋째아들로 무과에 급제(1597)한다. 어머니가 파평윤씨이니 6진을 개척한 윤관장군의 무인 유전자가 600년 동안 잠자던 신숭겸장군의 무인 유전자를 만나 새로운 무맥으로 탄생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문인을 우대하였으므로 명문가의 후손이 무과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기적으로 나라의 기강이 약해지면서 변방 오랑캐의 침범이 잦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해야하는 절박감에서 평산신씨의 무맥유전자가 떨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신립장군은 온성부사로 야인 니탕개尼蕩介를 격퇴시켜 두만강 변경을 보전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 당시 이순신(종9품), 김시민(部將)도 활약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일李鎰 순변사가 상주전투에서 패하자, 선조의 명으로 도순변사都巡邊使가 되어 출병하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배하여 조카 신경지(형 신잡의 아들)와 함께 전사하였다.
신립申砬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한 사실로 조선의 왕은 임진왜란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인식하였다. 조선왕조가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탓에, 신립장군은 기껏 80여명의 군관과 수천명의 장정들로 15,000명의 정예침략군을 대적하였으니 패배는 예상되던 일이었다. 그 후 동생 신할申硈도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손자 신준의 묘(좌측), 증손 신완의 묘(중앙), 신립장군의 묘(우측 맨앞)
신립장군은 광주시 도척면 곤지암읍 신대리에 신준, 신완과 함께 묻혀 있다.
평산신씨 문중의 전언에 의하면, 신립의 묘는 선친의 묘(신화국의 묘는 1970년에 진천이월면으로 이장)와 함께 서울 상도동의 선영에 있었다. 영의정 신완의 부친 신여식이 광주부윤으로 광주군에 정착하면서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완申琓이 광주 곤지암에 신립장군과 함께 신준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신립의 뒤를 이어 세 아들도 무과 출신이다.
맏아들 신경진申景禛, 차남 신경유申景裕와 막내 신경인申景禋은 인조반정공신으로 병자호란 때에 활약한 장군이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단 두 명인데 신경진과 중종반정공신 박원종이다.
신립장군을 기점으로 평산신씨의 무맥武脈은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선조-인조대에 70여명, 효종-경종대에 70여명, 영정조대에 90여명, 순조-철종대에 70여명,
고종-순종대에 190여명의 무신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시에 의병으로 활동한 이가 23명이므로 평산신씨 무맥 유전자의 우수성이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조선 초기 174년(1392-1566) 동안 평산신씨의 무과출신이 16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무맥 활화산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씨를 뿌린 신익희
해공 신익희는 한성판윤 신단申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칠사산七士山(363.7m)의 힘찬 용맥이 동진하여 경안천을 만나는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 있는 생가는 11대조인 신립장군이 잠든 무갑산을 바라보고 있다. 칠사산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관직을 거부한 한림학사 7명이 숨어 지내던 산으로 충절을 의미한다. 그의 생가는 무맥 유전자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를 싹틔웠던 장소였다.
사진 좌측 칠사산과 해공 신익희선생의 생가마을 서하리 전경.
사진의 좌우로 길게 늘어선 능선에 기댄 마을이다.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한 칠사산의 용맥이 서하리의 등뼈가 되어 북쪽을 받혀주고 있어서 안정감이 있다.
칠사산이 버텨줌으로 해서 경안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문전옥답이 생겨났다. 산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다.
신립장군 이후 무갑산과 400년간의 인연으로 큰 인물이 태어났으나 끝내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다.
미완의 대기란 바로 해공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던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하고 세계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56년 전에 해공선생이 뿌려놓은 민주화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해공은 독립운동도 그러했고,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도 오직 선견지명으로 나라와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자 한 선택한 고난의 길이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받아 1962년에 영예로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다.
http://www.locationart.co.kr/board/read.html?board_code=psucol&num=74&page=4&list_num=53&s_opt=&s_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