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열전
류자광(柳子光)은 기회포착의 달인이며 모함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상소', '탄핵'의 대명사로 전해지는 유자광의 본관은 영광이며 자는 우복(于復)이며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庶子)출신이다.
건춘문을 지키던 갑사로서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해 출전한다.
세조에게 발탁돼 병조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한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남이 역모사건)해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으로 봉해진다.
1477년(성종 8) 도총관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임사홍·박효원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됐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된다.
성종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정계에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된다.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가서 시를 지은 뒤 현판(懸板)하게 했던 것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떼어 내고 불태운 일이 있어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던 터였다.
김종직 학파와 반목하던 차 1498년(연산군 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으로부터 김일손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이를 세조의 찬위(簒位)에 대한 비유로 간주해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노사신·신수근 등 사림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던 훈구세력·외척을 모은 뒤, 김종직·김일손이 대역죄를 범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이어 김일손 등의 심문과정에서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 전체로 사건을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죄명과 형량 책정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로 이를 계기로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훈구파의 중심인물로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한 뒤 권력을 장악한다.
1506년 성희안·박원종·유순정 등이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때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이에 참여, 정국공신 1등으로 무령 부원군에 봉해진다.
그러나 이듬해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훈작(薰灼)을 빼앗기고 관동으로 유배됐으며 이어 경상도의 변군으로 이배돼 눈이 먼 뒤 파란만장한 인생을 뒤로 하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유자광은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5대에 걸쳐 권력에 빌붙어서 저지른 해악은 피비린내 나는 역모와 사화라는 씻지 못할 참극의 원인 제공자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임사홍(任士洪)은 왕실과의 잘못된 혼맥-조선 최초의 채홍사이다.
우선 수풀 림(林)씨와 맡길 임(任)씨는 전혀 다른 성씨이므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수풀 림씨 가문은 맡길 임씨인 임사홍과는 전혀 관계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임사홍은 훈구파의 거물로서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이의(而毅)이다. 아버지는 좌찬성 원준(元濬)이다.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사위이다.
아들 광재와 숭재도 각각 예종의 딸 현숙 공주와 성종의 딸 휘숙 옹주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벼슬을 시작해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 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해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간신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하기도 한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해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도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한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임을 잃지 않으려고 둘째 아들인 임희재(任熙載)를 희생양으로 삼기까지 한다.
임희재는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된다.
임희재가 쓴 것이었는데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누가 쓴 것인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한다.
연산군은아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 된다.
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 더욱 경계한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은 아들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임사홍은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깊이 관여한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함께 모의,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때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됐는데 특히 사림파는 크게 위축돼 중종반정 이후에나 다시 중앙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구미에 맞는 측근이 돼 전대미문의 관직에 올랐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처음에 임사홍은 기생을 뽑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여러 가지로 임사홍을 압박한다.
결국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둔 가무 기생)과 흥청(興淸 : 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되고 임사홍은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 되고 가산도 몰수당한다.
임사홍은 권력을 위해 뭇 선비와 아들까지 죽였지만 권력의 부메랑은 임사홍 자신의 처형으로 날아왔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지게 된다.
이완용(李完用), 이보다 더 매국적일 수는 없다.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이씨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로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진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886년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 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지낸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병을 얻었고 이듬해 5월 귀국해 요양 생활을 한다.
이후 이조참의 겸 전보국회판, 외무참의를 역임했다.
1888년 12월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1890년 귀국해 대사성·교환서총판을 역임했다.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歐美人)을 중심으로 친러파 세력이 결집됐으며 정동파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에 대원군이 주도하는 제4차 친일파 김홍집내각이 들어서고 이완용은 해임된다.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머물면서 감금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켜 친러내각의 복원을 시도했고 결국 춘생문(春生問)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된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된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한 상황이었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해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해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된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됐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 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됐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 만 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했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한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 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된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이 됐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됐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한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1926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한 군데 수정이 필요한듯. 수풀 임 --> 수풀 림
수정 했음돠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