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60년 초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 막내딸을 통해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성군 팔탄면 구장리에 살고 있을 때인데,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딸은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발안 마을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멀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전도관에 예배 보러 간다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전도관에서 예배를 보고 오면 저에게 찬송을 불러 주기도 하고 예배시간에 들었던 설교를 이야기해 주기도 하면서 전도관에 같이 다니자고 하였습니다. 장난 심하고 말괄량이인 딸이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하고 점점 성격이 부드럽게 변화되는데, 너무나 대견하고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딸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을 보고 막연히 전도관이란 곳이 좋은 곳인가 보다 생각은 되었지만, 제가 다닐 생각은 별로 없었고 딸이 하는 얘기는 그냥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가게에 도매로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두부를 가지고 어느 가게에 들어가니, 청년들 몇 명이 둘러앉아서, 박태선 장로는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며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알지도 못하는 말 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비록 전도관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딸아이에게 듣던 바로는, 전도관에서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가르치는 박태선 장로님을 욕하니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여 있던 청년들은 제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깜짝 놀라 저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그냥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무심히 흘려버린 딸의 이야기가 저도 모르는 사이 가슴 깊은 곳에 씨앗이 되어 하나님에 대한 존경이 싹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충청도 증평에 사는 큰딸 집에 갔습니다. 항상 저는, 술만마시면 술주정이 심하고 행패를 부리는 남편때문에 마음이 불안하여 마음 편히 지내 본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 남편을 피해 잠시큰딸네 집에 갔던 것입니다. 딸과 사위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아 누군가에게 불안한 마음을 다 고하고 싶고 또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면서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큰딸에게 “전도관에 꼭 나가 보고 싶은데 전도관이 여기에도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큰딸은 동네에 전도관 다니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면서 집에 모시고 왔는데, 그 할머니 말씀이, 전도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전도관을 직접 찾으니 참으로 복이라고 하면서 마침 그날 저녁때 구역예배가 있으니 참석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참석하는 예배라 무척 기다려졌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방 안에서 어찌나 좋은 냄새가 진동하는지 무언가 맛있는 냄새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향기였습니다.
그날 저녁 전도관 교인들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방 안에서 어찌나 좋은 냄새가 진동하는지 무언가 맛있는 냄새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향기였습니다. 또 방 안이 환해지면서 우울하고 복잡했던 마음이 그 환한 방처럼 밝고 산뜻해 지는 것 이었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증평에서 제단에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발안제단으로 일요일예배와 새벽예배를 다녔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기쁨이 충만해 오고 그렇게도 마음이 편안할 수 가 없었습니다. 제단에 열심히 다닐수록 남편은 전보다 더 저를 괴롭혔지만 그것이 저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남편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전도관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소비조합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간장을 한 말씩 머리에 이고 고개를 넘어 노하리 동네에 가서 팔았는데, 간장을 머리에 이고 대문을 나서면 그 순간부터 향취가 나면서 입 안에서는 단맛이 돌며, 간장이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워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