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면 오늘 1월 10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열흘이 지난 날이 아닙니다. 이 민족 특히 남한의 국민들이 참으로 잊으면 안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75년전인 1949년 1월 10일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생뚱맞은 담화를 발표합니다. 이름하여 친일파 처벌에 대한 최소화 담화입니다.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니 친일파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당시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 처벌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반민특위관계자들은 당시 한반도의 최고 재벌이라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비롯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는 노덕술(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경찰. 독립운동가들을 다수 체포하고 고문하고 살해한 악질 친일 반민족행위자)과 이광수(한때 민족계몽가로 활동했지만 이후 일본 제국 합리화 노선으로 전격 전향. 문인이자 언론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교활하게 친일활동을 함), 최남선 (원래 독립운동가였다가 변절한 시인이자 역사학자. 이광수와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지만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판받음.) 등이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친일파 최소화 담화에 의해 이들 친일파들은 제대로 죄값을 치르지 않고 풀려나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친일파 청산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미국의 그 대단하다는 원수 맥아더와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당시 한반도가 해방됐을 때 일본의 점령군 사령관이였던 맥아더는 일본에서 전쟁을 일으킨 수괴들을 재판에 넘겼지만 대부분 훈방조치합니다. 당시 물 밀듯이 남하하는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이 크다고 맥아더와 당시 미국의 리더급들은 판단했습니다. 당장 급하니 조금전까지 자신들의 나라인 미국의 군인들을 대량으로 죽인 일본군들을 그대로 풀어준 것이지요. 맥아더는 일본왕과 독대를 하며 앞으로 미국을 도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해줄 것을 부탁했고 일왕은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맹세했다죠. 그것으로 일본의 죄값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맥아더가 일왕에게 엄청난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일본을 지배하던 미 군정의 맥아더가 그럴진데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의 사령관이었던 하지는 오죽했겠습니까.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과 친일세력을 묵인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남한의 리더였던 이승만조차 친일파 처리에 아주 미온적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남한에서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마련된 반민특위는 1948년에 창설돼 다음해인 1949년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나찌 청산 조직이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지요. 반민특위는 처음에 서울 세종로 중앙청에 위치했습니다. 기세가 당당했지만 그이후 명동의 상공부 건물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이승만 등 친일파 두둔세력에 의해 그냥 없어지고 맙니다. 이승만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공투사를 친일파라며 잡아들이는 반민특위는 누구를 위한 단체인가라고 말이죠. 반공은 반공이고 친일 청산은 친일 청산 아닙니까. 교묘하게 반공과 친일 청산을 혼동시켜 친일 청산을 무산시킨 그 대단한 잔머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이제 친일 청산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친일의 후손들이 지금 이 나라에 너무도 광범위하게 퍼져서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적만 한국이지 실제는 일본인들과 다름없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친일파 후예들은 지금 이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한번 이 나라 한국에서 펼쳐져야 할 것이 바로 친일 청산입니다. 75년전 오늘 남한의 대통령 이승만이 행한 친일파 처벌에 대한 최소화 담화가 두고 두고 엄청난 상처로 한민족에 남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24년 1월 10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