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대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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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 소재하고 있는 갓바위 부처(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는 팔공산 관봉(850m)에 자리잡고 있으며, 갓 바위라는 이름은 이 불상의 머리에 자연판 석으로 된 갓을 쓰고 있는데서 유래 된 것이다. 갓 바위는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에 위치한 석불이다.
1.중생에 지는 업보 등에 업고서 2.동화사 풍경소리 밤은 깊은데
갓 바위 가는 길은 한나절인데 갓바위 가는 길은 멀기만 하는데
이끼내린 돌담길에 산새가 울면 촛불켜고 소원비는 아낙네 마음
갈 길을 잃어버린 나그네마음 길손이 갈길 없어 가슴 태우네
약-사 - 여래불 깊으신 그 뜻을 약-사 - 여래불 높으신 그 뜻을
팔공산아 너는 알겠지 팔공산아 너는 알겠지
'팔공산 갓바위' 배주연이 부릅니다.
먼 옛날 와촌 지역에 가뭄이 들었을 때 지역 면장이 중심이 되어 기우제를 올렸는데 그 장소가 바로 갓 바위 불상 앞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갓 바위 부처가 자리한 장소가 땅 위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이고, 하늘과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택하여 기우제를 올리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에게 반항하라는 의식으로 갓 바위 부처 주변에다 소나무 가지를 둘러치고는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면 부처의 몸체는 온통 거슬러져 흉물처럼 보이게 되는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이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흉물스러워 당장 큰 비를 내리게 하여 부처의 몸을 깨끗이 씻어 내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옛날 와촌면 주민들은 가뭄을 극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격전지이며, 호국의 땅인 팔공산,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경주를 공략함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정병 5000명으로 신라를 구원하러 오다가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과 맞서 싸우다 목숨이 위험하게 되었다.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태조로 가장,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지금의 염불암 뒤편에 일인암이 있고 케이블카 동편에 일인석이 있는데 이곳이 태조가 피신하여 앉아 쉬어갔던 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에서 의병과 관군이 항전했고 사명당이 동화사를 승군 본부로 삼고 왜적에 대항하였다.
1천년이 지난 지금도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살아남아 도주길의 지역명, 야사들이 생생히 전해 내려온다.
공산전투장에서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퇴로를 열었다고 하여 지혜를 모은 그 전투장을 지묘동으로 불렀고, 퇴로가 열려 가장 먼저 피신 한 곳이 지금의 파군재 삼거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동상 뒷 쪽에 있는 조그마한 봉우리로 처음 피신하여 왕이 살았다고 하여 왕산이라 하였다.
왕산에서 파군재 삼거리로 내려와 단숨에 한 동네에 도착하니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다 전쟁터에 동원되어 없었고 어린 아이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어 불노동이라 불렀으며, 불노동을 지나 또 다른 한 동네에 접어들어 이제 겨우 위험을 피해 찌푸린 얼굴을 활짝 폈다고 하여 해안동이라 불렀고 다시 평강동쪽으로 도주하다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위에 잠시 혼자 쉬어 갔다고 하여 바위 이름을 독좌암이라 전해 내려온다. 다시 평강동을 거쳐 초례봉을 넘어서 한 마을로 접어드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중천에 떠있는 달이 도주하는 길을 비쳤다고 하여 그 고을을 반야월이라고 불렀으며 다시 밝은 달빛 아래로 도주하여 도착한 고을에서야 이제 겨우 살았다고 안심을 하여 안심이라는 명칭이 그 마을에 붙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야사에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산은 우리 로 곰뫼 즉 웅산이란 뜻이라 하며, 고대에 곰은 신, 신성의 뜻을 가졌다. 곰나루가 공주가 되듯‘곰’이‘공’자로 표기되었다 한다.
이공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째, 8장군이 순절하였다 하여.. 둘째, 8고을에 걸쳐 있는 산이라 하여...셋째, 8간자를 봉안하였다하여..넷째, 8성인이 득도해서 나온 산이라 하여 팔공산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출처] 팔공산(대구)의 전설|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