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125)
< 이순신 정신5 : 愛民精神 >
앞서본 유비무환, 청렴과 정의 등 장군의 핵심사상을 받치는 밑바탕 정신이 바로 애민정신이다. 그야말로 백성, 부하, 가족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정성인 것이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이 한다는 신념하에, 자기 자신의 앞날도 전혀 알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들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전쟁중에 먹을것이 없어 떠도는 피난민들에게 노획한 쌀, 옷, 베를 나누어주고 위로하며, 때로는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고 전투나 훈련을 위해 바쁘게 길을 가다가도 피난민 행렬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지혜롭게 잘 숨어서 왜적에게 잡히지 말아 달라고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또한 전투를 할 때에는 적선을 남김없이 다 파괴할 수 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전공 또한 훨씬 높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궁지에 몰린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해칠까 하여, 일부러 도망갈 배 몇척은 남겨두는 지극한 백성사랑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앞두고 중국이나 주변의 장수들이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이미 전쟁은 끝났으니 굳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있나 하였다. 이에 장군은 “이 강토를 이렇게 유린한 왜적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냥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를 업신여겨 또 다시 쳐들어 올것인데 어찌 그냥 보낼 수가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는 왜군 한놈 왜선 한척도 절대 그냥 보낼 수 없고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친히 출전한 것이다.
장군의 부하사랑도 남달라서 장병들을 참으로 사랑했고, 죽으면 애석히 여겨 혼이라도 위로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순시중 보초서는 초병이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전포를 초병에게 걸쳐주었으며, 이에 감복한 병사들은 이후의 전투에서 목숨걸고 용맹하게 싸웠던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이 병사들을 아낀 배경에는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병사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4대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패튼은 “탄약은 며칠이면 만든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군인을 만들어 내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실제 싸우는 사람은 병사이다. 제대로 보살펴준 병사가 승리의 깃발을 꽃는다. 그 만큼 병사를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군께서도 바로 이러한 사고와 신념으로 부하 사랑에 최선을 다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으로 부하들에 대한 훈련은 매우 엄하고 강하게 시행하여, 훈련을 게을리 하는 병사들에게는 곤장을 치는 등 용서하지 않았다. 이는 강한 훈련만이 실제 전투에서 병사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밑바탕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평소에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우선은 상관이 편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러나 훈련을 게을리 하여 전투력이 떨어져 실제 전투에서 병사들이 죽어버리면 그것이 어찌 병사들을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어떻게든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관의 진정한 부하사랑이고 임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2차대전때 독일의 영웅이며 사막의 여우로 불리어졌던 롬멜장군도 사령관이 부하병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는 승진도 포상도 아닌 혹독한 훈련이라고 하였던 이유가 바로 그와 같은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장군은 훈련과 군의 기강을 지켜내는 일에는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한편으로 사랑의 품성을 원천으로 하는 따뜻한 마음과 섬세함으로 부하들과 격의없이 소통하여 그들을 감동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가족 사랑도 지극하고 정성스러웠다.
지극한 효자였던 장군은 전쟁터인 여수에 어머니를 4년간 홀로 모셨으며, 아산의 이순신 본가에 쳐들어온 왜군과 맞붙어 싸우다가 전사한 막내아들 ‘면’에 대하여는 그 아픈 마음을 피를 토하듯 절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군의 백성, 부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성은 지극하고 또 지극하였다. 그런데 사랑에도 단계가 있는데,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헌신을 거쳐 최고의 단계는 죽음이 된다. 즉 사랑의 최고단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는것을 말한다.
정유재란 초기에 파직후 하옥이 되었을 때도 사랑하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을 각오로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며, 명량해전을 앞두고 육군과 합치라고 할 때에도 이 나라를 위하여 또 다시 죽을 각오를 하고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특히 노량해전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투에 임하여 결국은 그 싸움에서 돌아가심으로 사랑의 최고단계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장군의 행적은 학문만으로 터득하였던 것은 아니며 타고난 성품으로, 이를 여과없이 발휘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 왜 사랑과 정성인가? >
保民을 통한 保國! 손자병법에 나오는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먼저 백성들을 사랑하고 지켜냄으로써, 사랑을 받은 백성들이 이 나라를 지키게 된다”라는 진리를 장군께서는 몸소 실천한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중 “네가 대접을 받으려면 너희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나 불경 화엄경 중 ‘자이이타’(自利利他 :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그 이로움이 나에게로 되돌아 온다)라는 말씀도 결국은 이와 상통하는 원리가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애민정신과 직결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관하여 살펴보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CEO라 이야기되고 있는 예수도 바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며, 장군도 역시 백성과 부하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외에도 부하들의 마음을 얻어 성공한 대표적 인물로는 카이사르를 들 수가 있다.
로마역사의 심장인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당시 갈리아 총독으로 있으면서 로마본국을 위협하는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하자, 원로원과 폼페이우스가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본국 세력과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아 6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총사령관인 그는 자신에게 배급된 식사를 사양하고 이를 어린 병사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부하들을 감동시켰고,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적인 열세속에 펼쳐진 폼페이우스와의 일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마음을 얻는 일의 대상은 가족, 친구, 직장동료, 고객 등 그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진실된 마음, 헌신, 솔선수범 등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마음을 얻기 위하여는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마음을 주어야 하고,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야 하며, 그 마음은 나보다 상대방을 더 위하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후의 명저인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내줄 때 그 사람도 나에게 관심을 보낸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꼭 필요한 부문이지만 예전에 비하여 많이 쇠퇴되고 있는 헌신에 관하여 한번 살펴보자. 잘되는 집안에는 늘 어머니가 헌신적이거나 큰 형이 헌신적인 경우 등 가족중에 어느 누군가가 헌신적인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
조직생활에서도 이러한 헌신에 관하여 금과옥조 같은 얘기가 하나 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인 피터 드러커 교수가 말하기를 “조직성공의 열쇠는 그 조직내에 헌신적인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라고 하였다. 조직경영의 핵심을 꽤뚫는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헌신이란 단위조직이나 개인별로 평가하는 평가지표에도 없고, 들어나게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크게 알아주지도 않으며, 그저 힘들기만 한 일들이 많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하여야 할 일이고 해내어야 할 일이 바로 헌신이다. 특히나 현대조직에서 모든 것이 성과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고 성과연봉제로 가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러한 여건과 상황속에서도 자기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조직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며, 이러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조직은 유지되고, 세상도 유지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헌신보다 더 지극한 사랑의 단계인 “대신하여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역사적으로는 고구려군에 쫓긴 김춘추를 대신하여 죽은 온군해도 있고, 후백제군에 쫓긴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도 있지만, 이들은 모시는 상관을 위하여 죽은 경우이며, 이순신 장군처럼 백성이나 부하를 위하여 대신 죽는 것은 결코 흔치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장군의 노량해전에서의 죽음은 더욱 위대하고 숭고한 죽음인 것이다.
문득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사후 추도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의 탄생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죽음이 대단히 영광스러웠다는 사실만큼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영광스럽게 돌아가심으로 더욱 청사에 길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순신 장군과 같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대신 죽은 또 하나의 역사적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영국의 전설적인 제독 넬슨이다.
그는 코르시카섬 점령에 큰 공적을 세웠지만 오른쪽 눈을 잃어 버렸고, 그 다음으로 빈센트해전에서 수훈을 세웠지만 오른쪽 팔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엄청난 신체적 악조건하에서도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트라팔가해전에서 완승직전에 저격을 받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는 전사하였다.
어찌 보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모습처럼 위대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 살아가면서 리더가 나 대신에 죽을 각오와 자세가 되어 있다면 누가 그를 따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어느 조직이던 어떤 문제가 노출되어 사건화되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것이 다반사이다.
물론 허위로 죄를 뒤집어써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의 책임부분이라도 진솔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사회 전반적으로 절실히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필요한 밑바탕 정신은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아닐까 한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예수였고 칼찬 예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유비무환 등 장군의 핵심적 철학과 정신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장군의 정신과 철학을 단 한마디로 줄이면 과연 무엇이 될까?
바로 정성(精誠)이 아닐까 한다. 장군은 우선 자기관리에 정성을 다하였고, 부하나 백성 가족 등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였으며, 전투와 같은 맡은바 일에서도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러하였기에 장군은 단지 유능한 리더를 넘어 위대한 리더가 되었던 것이다. 유능한 리더는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성과 창출능력이 탁월한 정도이나, 장군은 이에 더하여 뛰어난 가치관과 고매한 인품이 있었기에 위대한 리더가 되었고, 영웅을 넘어 성웅이 되었던 것이다. 끝.
(이순신대학 장상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