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사월 초파일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아스라한 기억이 있다.
불곡사에 속치마 주우러 가자!
창원 성산구 사파동과 대방동 사이에 있는 비음산 기슭에는 불곡사(佛谷寺)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신라 시대 창건한 사찰인데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불상은 가져가고 귀중품을 찾는다고 석탑을 무너뜨리고 부처라는 부처는
다 부수어 골짜기가 온통 부처 시체로 가득했다. 그래서 부처 골자기(佛谷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조 말엽에 중건하여 해방 후 우담스님이 일주문을 만들고 재단장한 절이다.
사찰 뒤에는 널따란 잔디밭이 있어 봄이면 인근 학교 학생들의 소풍터였고 사월 초파일이 되면 인근 마을
아낙네들의 회취(會聚) 장소였다.
옛날 여인들은 일년 내내 가난한 형편에 매운 시집살이와 고된 농사일에 하루라도 맘 놓고 쉴 날이 없었다.
그러나 사월초파일 만은 달랐다. 아낙네들이 고약한 시어미눈치 안 보고 맘 놓고 노는 곗날이었다.
마을 마다 부녀회 친목계가 있어 이 날에는 여러 마을 몇 개 팀이 구름같이 불곡사에 모여 들었다.
나무통을 둘러맨 아이스케키 장수, 엿장수, 동동구리무장수도 모여들었다.
먼저 형편대로 불전에 시주를 하고 나면 넓은 잔디밭에서 회취가 시작되었다.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동이째로 가져온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나면 '조오시모노'가 나서기 마련이다.
장구잡이가 흥겨운 가락으로 시동을 걸면 각 마을 부녀회 별로 경쟁이나 하듯 선수가 등장하여
노랫가락이 나오고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화나방창 호시절이 아니노지는 못 하리라
마이크도 없고 신명 나는 대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둥글래 둥글래 동그라미를 그리고 돌아가며
신명풀이를 했다. 고된 시집살이에 억눌렸던 시름을 소리 소리 지르며 다 토해놓았다.
술 기운에 피로한 줄도 모르고 신명을 내다보면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었다.
불곡사 아래로는 면사무소가 있는 상남까지 신작로가 있었다. 귀갓길 신작로에서도 아쉬움을 달래는 춤사위와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때 쯤이면 술취한 아낙네들이 속치마가 흘러내려 발에 걸려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신작로 바닥에 속치마가 널브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여드름쟁이 머서마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 '속치마 주우러 가자!' 고 소리를 지르고 달려갔다.
그 시절 사월초파일의 회취는 고달픈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의 신명을 푸는 유일한 소풍이자 나들이였다.
사월초파일이 지나면 곧바로 보리타작, 모심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