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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서사시적인 전투:
꼭 알아야 할 유명한 최후의 발악!
패배하기 전 최후의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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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틀어, 작은 부대들이 수적으로 우위에 있고 더 잘 무장한 적과
싸우려고 시도할 때 불가능함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군사적 전투는 수천 명, 혹은 수십 명의 전투원들을 나타낼 수 있다.
최후의 발악의 개념은 분명하다. 후퇴나 항복이 선택 사항이 아니거나,
전투가 대의의 성공에 필수적일 때 취하는 것이 최후의 발악이다.
사진을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에서 행해진
유명한 최후의 발악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테르모필레 전투, 기원전 480년 -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7,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는
아케메네스 제국에 충성하는 30만 명에 가까운
페르시아 병사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인들의 목표는 테르모필레의 좁은 해안 통로를 막는 것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이 유명한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3일 동안 용감하게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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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시아 공방전, 기원전 133년 -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는 동안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누만시아 정착지를 포위하기 위해 40,000명의 동맹군과
용병과 함께 20,000명의 군단병을 이끌었다.
켈트족으로 구성된 누만시아인들은 8개월 동안 포위되었다.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아사, 로마 화살에 굴복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포위는 도시가 불타고 완전히 파괴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이미지는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 있는 유리 타일 디스플레이를
보여주며, 마지막 전투를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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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공성전, 서기 74년 -
포위된 유대인 시카리아 반군은 로마군이
마사다 언덕 꼭대기 요새를 오랫동안 포위한 끝에
적에게 항복하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요새 곳곳에는 포위 공격으로 희생된 1,000명 가까이 되는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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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근위병대, 1527년 -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 군대의 로마 약탈을
두려워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파르 뢰스트 대위가 지휘하는 189명의 스위스 근위병에게
도시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의 용감한 방어가 교황이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안전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이것은 포위된 의장대의 비극적인 손실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로마는 나중에 로마의 자루라고 불리는 적군에게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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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엘모 요새 함락, 1565년 -
몰타 대공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발레타의 성 엘모 요새에 관심을 집중했다.
요새의 수비수들은 용감하게 여러 번의 공격을 물리쳤고,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하지만 28일 후에 요새는 마침내 굴복했다. 비극적이게도,
요새를 지키던 기사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용감한 노력은 스페인으로부터 지원군이 도착하여
두 개의 중요한 요새를 보충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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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에우포르트 전투, 1600년 -
80년 전쟁에서 일어난 니에우푸르트 전투는
항복을 거부한 스페인 연대의 학살로 끝이 났다.
전쟁 포로 학살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은
복수를 원하는 네덜란드로부터 자비를 받지 못했다.
이미지: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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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모 전투, 1836년 -
군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포위 공격 중 하나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대통령의 지휘 하에
엄청나게 우수한 멕시코 군대에 맞서 알라모 임무를 방어했던
모든 사람들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존경 받는 미국의 영웅 제임스 보위와 데이비 크로켓은
포위 기간 동안 전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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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막 전투, 1842년 -
1842년 카불에서 후퇴하는 동안, 영국군은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에 대항하는 최후의 발악에 직면했다.
눈 덮인 언덕에 갇힌 채, 제44 이스트 에식스 연대
소속 65명의 장교와 병사들은
저격수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후 제압되었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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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풀테펙 전투, 1847년 -
샤풀테펙 전투는 진격하는 미군에 의해 잡히기 보다는 죽음으로 뛰어든
6명의 생도 니뇨스 헤로에스의 죽음으로 멕시코 역사에 기록되었다.
6명의 생도들은 그들의 연대가 압도될 것처럼 보이자
후퇴하기를 거부했고, 끝까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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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맨 전투, 1866년 -
라코타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연합은 윌리엄 J. 페테르만 대위가
이끄는 미군 부대를 매복으로 유인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페테르만과 그가 지휘하는 81명의 전투원은
30분도 안 돼 아메리카 원주민 전사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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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빅혼 전투, 1876년 -
'커스터의 최후의 발악'라고도 불리는 리틀 빅혼 전투는
미국 육군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사이에서 벌어진 악명 높은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과 미 7기병대 소속 700명의 병사들은
상대군에 압도당했고, 이들은 노출된 언덕 꼭대기에 갇혔다.
1876년에 벌어진 이 전투는 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7기병대 소속 12개 중대 중 5개 중대가 파괴되고 커스터 자신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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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야마 전투, 1877년 -
상당한 용기와 놀라운 칼 기술에도 불구하고, 시로야마 전투에서
3만 명의 일본 병사들에 둘러싸인 500명의 사무라이들은 패배했다.
그들은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무라이 중 한 명인
그들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쓰러질 때까지 맞서 싸웠다.
마지막 저항의 표시로, 남아있는 사무라이들은
내리막길에서 엄청난 총성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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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완드 전투, 1880년 -
제2차 영국-아프간 전쟁 중 마이완드 전투가 일어났다.
이것은 마이완드 마을 밖의 진지를 지키려는
영국과 인도의 2,500명의 병력이 참여했다.
이들은 1만 2,000에서 2만 5,000명의 거대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맞섰다.
후방 지원군으로 서 있던 66연대의 11명을 제외한 영국-인도 여단은
눈에 띄게 패배하며 철수했다. 탄약이 바닥난 후,
대부분의 군인들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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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니 학살, 1890년 -
라코타 수용소의 무장해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사우스다코타주 워든 니 크릭에서 미군이
수백 명의 라코타족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을 학살했다.
이후 500명 이상의 병력이 수용소를 공격했다.
라코타족 전사들은 남은 무기 몇 개를 가지고 발포했지만, 순식간에 진압됐다.
그 후 20명의 병사들이 당시에는 난공불락의 적을 상대로 한 승리로 묘사되었지만
, 오늘날은 완전한 학살로 기억되는 곳에서 명예의 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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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가니 패트롤, 1893년 -
제1차 마타벨레 전쟁에서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회사의 34명의
병사들이 3,000명이 넘는 마타벨레 병사들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 항복하는 대신 수적으로 훨씬 더 많은 병력이
용기 있는 최후의 방어로 반격했다.
500명의 적수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는 결국 창 공격에 압도되었고 전멸했다.
이 사건은 샹가니 강 북쪽에서 발생한
샹가니 패트롤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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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공격, 1915년 -
"죽은 자들의 공격"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북동쪽에
위치한 오소비에크 요새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투였다.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요새를 지키는 러시아 병사들은
독가스의 표적이 되었고, 그 결과 섬뜩하고 좀비처럼 보였다.
충혈된 눈과 거품이 이는 입으로 적들에게 반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은 또 한 번의 가스 공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결국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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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1939년 -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단치히에서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으로 알려진 중요한 군사 사건이 일어났다.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 군인들은 독일 친위대로부터
15시간 동안 용감하게 우체국 건물을 지켰다.
슬프게도 건물이 점령된 후, 4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39년에 찍힌 이 사진은 공격의 강도를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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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타 강의 전투, 1939년 -
라플라타 강 전투 동안 영국 해군에 의해 손상을 입은 후
긴급 정비를 위해 몬테비데오로 출발한 후,
한스 랑스도르프 선장이 지휘하는 독일군 전함 그라프 슈페는
수리를 시작하고 중립국인 우루과이의 수도를 떠나는 데
단지 72시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영국이 우월한 군대를 모았다고 믿으면서,
랑스도르프는 독일군 전함을 침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는 3일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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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공방전,1940년 -
영국군 부대와 그들의 동맹군에 의한 칼레 공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목표는 진격하는 독일군을 지연시키고 덩케르크를 통해
영국 원정군(BEF)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결국 적에게 압도당했다.
사상자의 숫자는 파괴적이었다. 300명의 영국군이 죽고 200명이 다쳤으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온 3,500명의 군인들이 포로가 되었고,
1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
가슴 아프고 비극적인 사건인 이 전투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미지: 미국 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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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함락, 1941년 -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는 대서양에서 영국 해군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손상된 조종 장치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효과적으로 조종할 수 없었고,
이것은 전함 킹 조지 5세, 로드니, 도르셋셔, 노퍽의 쉬운 목표가 되었다.
이 배들은 대략 2,800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비스마르크를 약 400회 타격했다.
2,200명이 넘는 선원들 중에서, 단지 114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진은 1941년 5월 27일, 전함 도르셋셔에 의해
비스마르크호의 생존자들이 구조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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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942년 -
싱가포르 전투는 싱가포르 섬에서 연합군이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광범위한 공습은 상당한 수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다.
연합군은 적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본성을 과소평가하여 결국 항복으로 이어졌다.
약 8만 명의 영국군, 인도군, 호주군 그리고 현지 군인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는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군사적 손실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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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의 최후의 발악, 1942년 -
체코의 저항 운동가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는
친위대 고위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인
'유인원 작전'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책임이 있었다.
제보에 따라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숨어있던 프라하의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대성당으로 추적되었다.
치열한 총격전 끝에 체코슬로바키아인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포획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공격 직후 손상된 하이드리히의 직원 차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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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야 코브쇼바와 마리야 폴리바노바의 최후의 발악, 1942년 -
1942년 8월 노브고로드 주 수토키-바야코보 마을 근처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붉은 군대의 저격수 나탈리야 코브쇼바(왼쪽)와
마리야 폴리바노바는 독일군에 갇힌 자신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부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고, 그들은 취약했다.
탄약이 소진되고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이 두 명은
4개의 수류탄을 터뜨려 적지 않은 수의 적병들을 사살함으로써
자신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두 여성 모두 사후에 소련의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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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3년 -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유대인 저항 투쟁으로, 약 1만 3천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반란은 게토가 마즈다네크와 트레블린카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로
남은 인구를 옮기려는 와펜-SS 부대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나치는 게토에 불을 질러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생존자들은 강제로 수용소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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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전투, 1945년 -
제3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주요 공세를 기록한
베를린 전투에서 사실상 패배했다.
붉은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히틀러의 벙커에 들어갔다.
붙잡히지 않은 나치 지도자는 1945년 4월 30일 자살했다.
뒤이어 그의 많은 관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베를린은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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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쿠데타, 1973년 -
1973년 쿠데타 동안, 무장한 개인들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에게 붙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굳게 지켰다.
불행하게도, 많은 경비병들이 격렬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아옌데는 결국 그의 삶을 끝내기로 선택했다.
생존자들은 재판 없이 즉각적인 처형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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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함락, 1975년 -
20년 간의 전투 끝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1975년 4월 30일, 12만 명의 북베트남 군인들이 이 도시로 들어갔다.
베트남 인민군이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국기를 게양하기 직전,
사이공에 있던 거의 모든 미국 시민들과 군인들,
그리고 수천 명의 남베트남 시민들이 대피했다.
이 도시는 즉시 호치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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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모가디슈 전투, 1993년 -
제1차 모가디슈 전투 동안, 두 대의
미국산 블랙호크 헬리콥터가 불명예스럽게 격추되었다.
"슈퍼 6–4"의 추락 현장과 부상당한 조종사
마이클 듀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델타 저격수 게리 고든과 랜디 슈하트가 배치되었다.
둘 다 소말리아 폭도들과의 치열하고
장기간의 총격전 동안 목숨을 잃었다.
이와 동시에, 모하메드 파라 에이드의 민병대원들은
후에 자유를 되찾은 듀란트를 붙잡았다.
"블랙호크 다운"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1993년 10월 3일 모가디슈에서 일어났다.
사진은 마이클 듀란트의 헬리콥터가
모가디슈 상공을 출발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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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이장기 전투, 2001년 -
탈레반 포로들의 봉기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칼라이장기 요새에서 발생한 군사 교전에
북부동맹군, 중앙정보국(CIA) 요원들,
영국군과 미국 특수부대가 참여했다.
탈출 시도가 좌절된 탈레반 포로들은 후퇴한 지하실에서
공습을 포함한 수많은 공격을 견뎌냈다.
지하실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이 내려진 후에야
최후의 발악을 하던 대원들은 항복했다.
포로 중 한 명은 북부동맹과의 전투에서
탈레반에 가담했던 미국 시민 존 워커 린드로 밝혀졌다.
사진은 전투 중 유일한 미국인 사망자인
중앙정보국(CIA) 요원 조니 마이클 스팬의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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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테 전투, 2016년 -
시르테 전투는 리비아의 도시 시르테에서 발생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리비아 통합정부(GNA)에 대항한
이슬람 국가(다에시)의 공격이었다.
전투 동안, 시르테의 수비대 중 일부가 탈출했다.
그러나 남겨진 2,500명의 이슬람 국가 전사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했고 대부분 죽을 때까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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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BC) (HistoryNet) (National
Geographic) (The Washington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