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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곳; https://brunch.co.kr/@massoudjun/14
읽을 거리가 참 많고 재미있습니다.
외인 부대 제대 후,
떼제베 타 본 적이 아주 오래되었다.
남부 프랑스의 님므라는 도시에서 파리에 올라오기 위해 군인 할인 75%로 거의 주말이면 오다시피 했었지만 생활 터전을 파리에 잡고서부터는 요원한 일이 되었다. 더러 역으로 도착하는 손님들을 마중하기 위해 자주 들르곤 했어도 국가별 이동이 잦아 비행기를 타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자가용 이용 이동이 교통 수단이다 보니 어딘가를 목적으로 다시 기차를 이용할 것이라는 계획은 이번엔 세워져 있지 않았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최근 한국 행에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KTX를 이용해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이용했다가 불편함에 된통 데이고 나서는 기차도 이용할 것이 못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번엔 경비 절감을 위해 이용했는데 예전보단 개선이 된 탓인지... 책 읽는다고 정신줄을 놓아서인지 불편함을 잊었던 기억이 났다.
파리 '리옹’ 역에서 '디종', 디종에서 미리 약속했던, 존중하는 후배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후배 집에서 일박을 한 뒤, 샤모니 몽블랑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곳을 놓쳐 도착하게 된 곳이 '에비앙'이란 곳이었다.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명품 생수 에비앙 물로도 유명하지만 여성 마스터즈 골프 대회로 더 유명하고 스위스 로잔과 마주하고 있는 레만 호수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중앙 유럽에서 벌러톤 호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호수이고 스위스와 프랑스의 오뜨 사부아 주를 나누는 국경 호수이기도 했다. 5월에서 9월에는 세계 두 번째로 높은 145미터를 쏘아 올리는 분수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알프스 산맥과 이어진 천혜의 자연 경관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기도 했다.
도착하자 마자 다시 샤모니를 향하는 기차가 없어, 역 바로 앞 호텔을 잡고 산책 삼아 시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은 없었지만 호수 건너 로잔을 바라보며 호숫 가를 산책하는 일이, 비록 잘못 온 곳이긴 해도 이것도 기회라 여기고 둘러보았다. 역은 시내와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는 마치 바닷가 도시처럼 보였다. 단지, 바와 카지노를 제외한 대부분이 문이 닫혀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뒷날 다시 기차표 예매를 하고 샤모니를 향하는 중간중간, 완행 기차에 몸을 싣고 멈춰 서는 조그만 역들마다 구경을 하며 샤모니를 향하는 마음은 즐거웠고 미지를 향한 도전에 두려웠다. 까뜨린느 드 메디치 전기를 읽으며 한동안 듣지 않던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신났다. 스치는 역들의 이름은 모른 체 풍경이 낯설 긴해도 정겹고 어느새 이런 풍경에 익숙해졌다고 잠깐 책에서 눈을 떼고 농촌 같지 않은 여유로움과 잘 정돈된 마을의 아기자기한 정서가 고스란히 마음 속으로 전해온다.
한국의 전원엔 평화는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고난만 보이는데 비해, 프랑스는 언제 이런 시골을 조화롭게 정돈하고 조성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프랑스의 시골은 깨끗하다. 비닐이 날리는 곳도 없고 아무렇게나 방치한 농기구들이 놋가루가 날리는 병든 시골 풍경이 아니다. 생기가 흐르고 거리는 잘 정돈이 되었으며 어디서나 한가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정원 조경과 더불어 형형색색의 꽃들이 사람이 우선인 사람 중심의 가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느껴지는데 그야말로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시골 사람들의 투박한 모습에서는 촌부들의 순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낯 선 이방인에게 친절한 모습은 내 어릴 적 이웃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데 그런 시골을 한국의 시골에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들판에는 상부상조하며 씨 뿌리고 수확하는 미풍양속인 품앗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고 이방인에 대한 친절한 시골 사람들의 온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릇된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기꾼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건강한 발전을 해하는 부패한 정치 시스템은 줄을 잘 서야 하는 문화로 만들었으며, 그 마음이 시골 사람들에게도 침투되어 밥상 위에 반찬 한 두개 더 올리려 서로를 경쟁 속에 몰아넣어버린 것이다. 학교는 1등만을 위한 경쟁의 전장이 되었고 그렇게 경쟁만 하며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상부상조와 품앗이의 미풍양속은 요원한 일이 되었고 시골의 행정은 작은 정치판이 되어 이념전쟁으로 이웃 간에도 혹세무민 하는 현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반세기가 흘러 지금에 왔으니 공무원은 뇌물과 청탁, 부패로 살이 쪘고 그렇게 경쟁에 취약한 농촌은 죽어 도시에선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 남는 자만이 대접을 받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이 나은 결과물이었다.
촛불 혁명의 결과로 정권이 바뀌고 숱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으나 아직 사람들은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우리가 아는 프랑스 혁명인 1789년 루이 16세의 절대 왕정의 몰락 외에도 1830, 1968년에 걸친 혁명을 거치고야 지금의 프랑스가 탄생했지만 프랑스는 지금 극심한 혼란 속에 전세계의 난민 수용소처럼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IT 강국인 한국에도 모자라는 프랑스는 행정이 너무 늦은데다 마치 오래된 건물들처럼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 시대 변화에 둔감하다. 그러나 너무 빠른 변화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한국이 프랑스를 반면교사로 삼아 조화로움을 이루기를 바래본다.
그런데 프랑스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귀족과 지주는 많이 나누어 주어야 하고 그것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명성을 갖게 했다. 지역 경제를 위해 정부가 지원한 돈을 고스란히 농촌에 쏟아 부어 농촌이 아름다워질 수 있었고 농부들이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것은 올곧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한국 정치가 가고 있는 방향은 정녕 잘못된 길이란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머리가 조그맣고 몸과 팔 다리가 튼튼하다면 한국은 머리만 비대하게 큰 기형아를 연상할 수 있다.
농업 대국이 그냥 된 게 아니라면 아무리 광활한 농토를 가졌다 한들 정부의 지원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낙농업 강대국으로 만든 프랑스는 당연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오롯이 농촌을 스치며 아름다운 농촌 프랑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모자랄 민관이 뜻과 힘을 모아 만들어 낸 프랑스 인 것이다.
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잠시 삼천포를 살았던 기념으로 삼천포가 그리워진다^^
이제 샤모니 몽블랑에 거의 다 왔다.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겸허해 진다. 사람들 속의 경쟁자로써가 아닌 자연에 속한 한 인간으로서 대자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앞에 겸허해 진다.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도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아름다운 농촌과 시골을~~~
외인부대에서 3주 몽블랑 훈련 마친 이후로 9년 만인가?
한 개 중대의 외인부대원의 일원으로 몽블랑 일대인 '브리앙송'의 유명한 산악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일이......?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었다. 내가 지치면 동료들도 지쳤고 내가 즐거우면 똑 같이 즐거웠던 그 때는 내가 없었다. 한 명의 외인부대원은 전체의 외인 부대원이었고 그래서 개인의 이름이 아닌, 외인부대원의 이름으로 몽블랑에 남겨진 내 흔적은 고스란히 내 족적이 아니었다. 산악 전문 연대에서 나온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의 배낭 끈을 잡고 불 빛도 없는 길을 걸어 적의 주둔지를 탈환하는 작전이 이어졌고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암벽을 만나면 암벽을 타야 했고 또 3천미터 이상의 고지들을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 쉬며 뛰거나 걸어 오르곤 했었다. 그때는 정말 환상적인 한 군인으로서 행복 했었다.
*** 샤모니 몽블랑 시내
그런 몽블랑을 이제 혼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4월이지만 눈이 남아 있을 것이었고 거기에 맞게끔 배낭을 꾸렸다. 눈에 빠지지 않게끔 눈신발을 구입하고 등산화도 고산지대용으로 구입했다. 프랑스 최대의 스포츠 용품점 데카트론에서 텐트와 버너, 식량, 장갑, 모자와 스틱까지, 낮은 온도를 지탱할 수 있는 침낭과 침낭 커버, 그리고 아이젠까지 완전하게 꾸리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배낭은 무거운 만큼 마음도 무거웠다.
디종을 거쳐 샤모니 몽블랑에 이르기까지 6시간,
첫 날은 미리 예약을 하지 못했던 관계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펜로즈(Alpenrose)'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영국인이 운영하, 는 4인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온갖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 샤모니 몽블랑 시내를 구경하고 곧장 산행에 나섰다.
일상에 찌든 한 중년의 모습은 살이 찌고 배도 나오고 다리는 힘이 없이 눈빛도 초췌했다. 이렇게 몽블랑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어쩜,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 올 수 있었던 이 길이 얼마나 행운인지 몰랐다.
저 멀리 4800미터의 몽블랑이 고상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6월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누구나가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위험한 4월이었다. 더욱이 날씨가 너무 청명하고 태양빛이 좋아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산의 눈들은 아래가 녹아가고 있었고 밤이면 잠깐 얼었다가 오후가 되면 폭포를 만들만큼 많은 눈들이 녹아 웅장한 물길을 쏟아냈다. 여름 성수기엔 눈이 녹은 몽블랑을 트레킹 하는 관광객들로 붐볐고 산장은 특수를 누렸다. 그런 산행은 흥미가 없었지만 몽블랑 트레킹을 관리하는 산악 관리자들에 의해 비부악은 금지되어 있기도 했고 들키면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러나, 산장의 자리는 모자랐고 투어 객은 넘쳐났기 때문에 산행이 금지되지 않은 트레킹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4월엔 산행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막바지 스키와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로 샤모니는 또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산행이 금지되거나 오르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제약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최근에 영국인 3명이 눈사태로 고립되어 사망했다는 소식도 이곳에 와서야 접했던 터였다.
지도를 사고 산행 코스를 잡았다.
나는 샤모니 뒤 편의 운하의 바다를 타고 에귀드미디까지 올라가서 체력이 허락하는 한, 몽블랑으로 향하는 루트를 잡았다. 샤모니에서 바라본 정상과 3842미터의 '에귀 드 미디'는 그 모습만으로도 황홀했다. 나는 내일 오전 중으로 '에귀 드 미디'에 오를 계획이었다. 그 러나 지도에는 대피소의 위치도 루트도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았고 이정표를 확인할 수 있는 곳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귀드미디로 가는 첫번째 코스인 몽땅베르까지는 기차로 오를 수가 있었지만 나는 워밍 업으로 천천히 걷기로 했다. 미리 '산악회 사무실'로 가서 등산 코스에 문제가 없는지, 장비는 안전한지의 정보를 묻고 오르는 길이었다.
산악회 사무실에서는 등반 전문 가이드도 있으므로 자신 없으면 얼마간의 돈을 주고 등반 가이드를 동반해서 산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요 말로 개인적인 산행을 망치는 일이었다. 겨울 산행은 내가 다닌 길이 곧 길이 되는 선구자 적인 등반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길을 모르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었고 한국의 아기자기한 산과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 몽땅베르(Le Montenvers) - 쁠랑 드 레귀이(Plan de l'Aiguille)
또 얼음이 녹아 만든 크레바스는 곳곳에 위험으로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베르티칼 리미트'처럼...... 그런 곳이 이곳 몽블랑엔 곳곳에 존재했기 때문에 산을 좋아해서 지리산을 열심히 다녔고 외인부대원의 일원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군인과는 다른 나의 길, (물론, 다 아는 길이지만) 자의적인가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은 큰 차이점을 남길 터였다. 나는 혼자였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지도 한 장 들고 산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만이 나의 유일한 무기였다.
쉬엄쉬엄 세 시간을 오르자 나타난 곳, '메르드글라스(Mer de glace)'였다. 이곳에 눈이 저만큼 녹았으면......ㅋ
계곡 가운데 뾰족하게 솟아 있는 곳이 4208미터의 ‘그랑드조라스’라는 곳이다. 그 옆에 '거인의 이빨'이라는 봉우리가 있지만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이 곳까진 누구나 올라올 수 있지만 여기서부턴 눈 신발을 신어야 한다. 그렇지 않음 눈이 허리까지 빠져 옷은 금방 젖을 것이고 손도 시릴 것이므로 여기까지 올라왔던 완전 마라톤 선수 같던 소녀와 빵집 기술자라던 청년은 간단한 등산을 한 듯 몽땅베르를 포기하고 내려갔다. 눈 앞에 보인다고 만만하게 봤더니 둥글둥글하게 완만하던 곡선의 길은 뾰족하게 솟아 들고 나는 길이 많은 한국의 산길에 비해 더 힘들고 가파르게 보였다. 어렵게 도착하니 절경이 펼쳐진 곳에 놓인 벤치가 보인다. 여기가 이래봐도 1600미터다.
'얼음의 바다'로 해석되는 이곳 메르드글라스는 총 17키로 미터로 에귀드미디까지 연결되고 그곳에선 스키어들이 에귀드미디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몽땅베르까지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 샤모니까지 운행하는 마지막 기차 시간인 16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 만약에 메르드글라스와 연결된 케이블카를 타고 역까지 올라오지 못한다면 철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야 한다.
저 멀리 대자연의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 곳에선 눈이 녹아 만들어 낸 얼음물이 폭포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흙과 돌로 이루어진 지층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한 돌이 떨어지는 굉음이 메아리를 만들어 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여흥을 뒤로하고 다시 몽땅베르로 오르는 길, 눈 신발을 신는 것을 포기하고 거의 목표지점에 도착했을 무렵에 먼저 지나간 발자국 위에 떨어진 과자 봉지하나를 발견했다. ㅋㅋ 웬 홍삼 캔디???
살 좀 빼고 중년의 해이해진 마음도 다잡겠다는 포부도 있었으니 식량은 넉넉하게 준비하진 않았다. 군대 있을 때 동료들이 가지고 다니던 '쏘씨송(Saucisson: 순대, 살라미)'의 별미를 뒤늦게 터득해서 넉넉하게 가지고 왔고 커피가 전부였다. 짧게 올라온 길이었지만 목은 타 들어갔고 물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벌써 다리는 후들거리고 배는 고픈 듯도 했지만 식욕이 크게 나지는 않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이곳에서 홍삼 캔디를 보니 반가운 마음,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이라니! 이곳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쓰레기는 버리지 않는다. 모두 배낭에 싸가지고 내려간다. 통제도 감시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한다.
한국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을 나는 더이상 오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감시와 통제 때문이었다. 통제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사고가 생기면 환자들에게 가하는 말들이 가관이었다. 물론, 산에서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자연을 훼손하는가 하면, 쓰레기를 얌체처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에 비하면 감시인이 필요없을 정도로 깨끗한 알프스 방문객들의 마인드를 본 받아야 하겠지만 소원한 일이다.
지리산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소방 대원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말이라도 걸어올까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지리산 언저리라도 가면, 관리공단 옷을 입은 사람들의 번득이는 감시의 눈초리가 싫어 이제 근처에도 가지 않으니 그들의 역할이 성공했다랄까? 아름다운 산을 지키는 관리인들에 의해 기분을 상했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는 더 이상 지리산을 오르지 않고 생각도 잊은지 오래되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우울해진다. 빌어먹을!
이제 다 왔다.
나는 좋은 자리를 찾았다. 역 안은 문을 잠갔지만 옆으로 지붕 아래 침낭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1909미터 고지에 호텔과 역 사가 있고 '얼음 바다'와 산정의 장관을 보다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그 곳엔 이미 일과를 마무리하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마지막 기차가 남아 있었고 나는 젖은 바지를 갈아입고 새로운 신발을 신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내일은 저 계곡을 가로질러 '에귀드미디' 바로 아래쪽으로 이동한 뒤, 다시 비부악을 설치하고 2박을 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기차가 정확하게 16시 30분에 떠나자 이곳엔 나 혼자 남았다. 모든 문이 닫히고 100미터 근처에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역 바로 뒷 편에 있는 꽤 넓은 지붕 아래에 텐트를 치지 않아도 될 공간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을 준비했다. 커피를 한잔 끓여 속을 따뜻하게 하고 가지고 간 와인에 쏘씨송으로 저녁을 먹었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그랑드조라스'의 꼭대기는 눈으로 뒤덮였고 늦게 도착한 한 명의 스키어는 부랴부랴 도착하더니 바쁜 걸음으로 기차길을 따라서 샤모니로 내려갔다.
혼자 남은 몽땅베르의 고독 속에 나는 서울에서부터 온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장본인이었다.
일상에서의 수치를 감당케 하고 그 것만이 마치 최선의 길인 냥 굴욕을 감당하게 한 장본인....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프랑스 자전거나라의 지점장을 하고 있었고 친구가 뒤통수를 쳐 물러나 있었다. 과정이 비겁했기 때문에 화가 난 상태였다. 거기에, 나로 인해 사장인 자신이 모처에 끌려가 프랑스 지점장인 내 이름을 대면서 추궁했는데 국정원 직원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새벽 네 시까지 자신을 끌고 간 양복 네 명으로부터 고문은 아니지만 심문을 받았다는 놀라운 말들을 했다. 내가 투어를 하면서 프랑스 역사와 교회의 발전상을 빗대어 한국 교회를 비난하는 일들에 대한 심문이었다고 나를 해고하라는 압력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비난을 받다니 내겐 참으로 영광이었지만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에겐 두려움이었었나 보았다.
"자존심 많이 상했어요?"
그 기분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한테 할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나는 자리와 돈 욕심이 크게 없었고 관리도 제대로 못했지만 하고 있던 일이 있음에도 그의 요청에 의해 지점장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지점장을 하고 있던 그의 친구에게 큰 실수를 하게 되어 신망을 잃는 결과까지 초래했던 것인데, 당하고 보니 이이제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고 대안을 제시하고 뒤로 물러나도 상관없는 마음이었지만 그의 결론은 나를 배신한 친구를 중용한 것이었다. 앞으로의 해결이 중요했다.
바람도 없이 고요하던 산엔 바람이 불었다. 찬 바람이 어디선가 몰려와 깔아 놓은 매트와 침낭 위를 스산하게 훑었다. 바람막이로 역에 놓아둔 매트리스를 이용해서 막았다. 훨씬 편했다. 침낭이 깊은 산 속에서 유숙하기엔 부실하다 싶었지만 하루, 이틀 잔 침낭도 아닌데 견뎌 보기로 했다.
산에서의 잠은 오랜 산행 이후에 오는 피곤함이 무기다. 아무리 불편하고 어지간한 소란에도 깊이 잠들었지만 중간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잠결에 저 멀리 절벽의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다. 잠에서 깬 새소리도 들렸다. 한번씩 중간에 깨어 소변을 보러 갈 때면 휘영청 밝은 달이 어울리지 않는듯 쌓인 눈을 비추고 계곡의 스산한 분위기와 어울려 음산했다.
*** 사투
아침 7시.
이른 잠자리 탓에 새벽에 몇 번 깨였다가 다시 뒤척이다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벌써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역관리원과 호텔직원이 틀림없을 터였지만 산행할 시간은 많으니 잠이라도 부족하지 않게 넉넉하게 잘 요량이었지만 금방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역무원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호텔 쪽으로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4월의 아침인데도 침낭이 추위를 견디지 못한 탓에 추위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사이 계곡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 소리가 서라운드 입체 음향처럼 옅은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몸을 녹이고 아침 8시가 되자 몽땅베르 호텔과 역의 직원들을 실은 첫 기차가 올라와서 야영을 한 나를 보곤 무신경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호텔 사람들도 와서 부산한 아침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고픈 배를 간단하게 해결한 지상 최고의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런 때 왜 그리 커피가 땅기는지...... 아마 노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게으를 때는 맛나는 커피도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나는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있는 직원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직원은 이른 아침의 나를 보고 야영을 했느냐고 물었다.
“오늘 몽블랑 등반 첫 야영이야”
“혼자 올라간다고? 최소한 조난 신고를 하거나 사망하게 될거야!”
“그래? 등반하고 와서 다시 커피 마시러 오지. 하하”
한마리 새처럼 푸른 창공을 나는 패러글라이딩..
나도 언젠가 패러글라이딩을 해볼 수 있을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나는 저 기분은 어떻까. 저들은 패러글라이딩을 입고 가장 높은 산정까지 올라가 훨훨 하늘을 날았다. 한발짝 씩 눈길을 내 딛는 초라한 내 발걸음에 비해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그들의 환호가 지상의 내게 전해왔다. 고공 낙하할 때도 짜릿한 기분은 범인이 누릴 수 없는 기분이지만 준비하는 시간에 비해 짧다면 패러글라이딩은 안전하고 길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레저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었다.
9시.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몽땅베르에서 300미터만 더 올라가면 기가 막힌 전망을 볼 수 있는 '시냘(Le Signal Forbes)가 있다고 했다. 호텔 커피숍의 피에르가 준 정보였다. 한 시간 거리이니 갔다가 내려와서 에귀 드 미디를 올라도 넉넉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잠들기 전까진 할 일이라곤 산행을 하며 장관을 구경하고 생활에 찌든 뱃살과 게으른 몸을 단련시키는 것뿐이었다.
눈이 녹지 않은 길엔 여러 갈래의 길이 서로의 발자국을 따라오라는 듯 줄지어 나 있었다. 최근의 발자국이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목적지가 있으면 길은 만들면 되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내 인생 가장 위험한 시험에 들게 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산 길을 오르다 보면 내려보는 것에 인색하다. 정처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장관이 펼쳐지고 들리는 소리라곤 거친 숨소리 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친구들이 가까이 보였다. 저것도 분명 재밌을 터였다. 잠수가 느닷없이 그리워지는 것처럼 고공낙하를 하는 것보다 분명 돈도 비쌀 패러글라이딩이다. 즐기러 온 게 아니니 걷을 수 있는 지금을 즐기자.
조금 더 올라가니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더미들이 수북히 쌓인 '시냘'을 만났다.
'얼음 바다'와 에귀 드 미디, 샤모니가 한 눈에 보이는 장관이었다. 사람들이 돌을 쌓아 만든 탑은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도 돌 하나를 얹으며 여러 소원을 빌었다. 이렇게 놀고 저렇게 놀다가 쏘씨송과 물 몇 모금으로 간단한 '아점'을 해결하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잠시 고민을 했다. 여기서 두 시간 거리인 '에귀드 쁠랑'으로 가느냐, 에귀드 미디로 가느냐.... 어차피 일주일 일정이니 에귀드 미디는 내일 가도 된다는 생각에 에귀드 쁠랑으로 가서 샤모니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 하루 일정으론 안성마춤이란 생각에 순식간에 일정을 바꾸었다.
극적인 모험속으로 겂도 없이 내디디게 된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산정이 금방이었지만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진 길로 나 있는 지름길로 다닌 발자국을 쫓았다. 한참을 가다 보니 발자국이 끊기고 낭떠러지를 만났는데 뒤돌아가려고 보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싶게 험한 길을 왔던 것이다. 가만 보니 절벽에 붙어 있었다. 앞엔 눈이 가파르게 쌓여 있는데 발 디딜 엄두가 나지 않고 뒤돌아 가려니 암울한 생각에 잠깐 고민을 해보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밑으로 내려오니 오후 2시.. 눈이 허리까지 빠져 옷이 금방 젖어버렸다. 눈 신을 신으니 한결 움직이기가 편했다. 오래된 스키 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선 누군가도 길을 잘 못 들어 이쪽까지 왔었나 보다. 잠깐을 휴식하고 다른 방향으로 올라갈 길을 찾아보았지만 요원했다.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내려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이런!!!
산 중턱에 있는 나는 로프가 없으면 내려갈 수 없는 또다른 절벽 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암담한 심정으로 다시 내려온 길을 올려다 보았다. 지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어떻게 저 길을 내려왔지? 마지막 내려올 땐, 판쵸를 깔고 눈을 타고 내려온 내 흔적을 신기하고 즐겁게 관망하면서도 이제 어떻게한다? 아직도 '에귀드 쁠랑'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올라가야지!
참... 별 짓을 다하는구나..ㅋㅋ,,
헛웃음과 동시에 다시올라가자고 마음을 굳히고 동선을 찾아보았다. 내려 온 쪽이 훨씬 가파랐는데 눈과 경사가 심했으니 포기를 하고 계곡의 산등성이로 뾰족하게 나온 부분에 세워진 나무들을 보면서 저 나무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나무는 10미터 간격으로 더러는 바위들도 보여서 가파르긴 해도 다른 곳보단 훨씬 쉬워보였다.
그런데 마침, 물도 다 떨어지고 내 덩치도 장난이 아닌데 베낭도 무거워 움직임이 시원찮은데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좁은 공간은 키만큼이나 쌓인 눈때문에 이동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이 덜 녹았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눈 신이 푹푹 빠질 정도로 옅은 눈이다보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조금씩 오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옷가지와 눈신을 버렸다. 그리고 한참을 기어오르며 온 몸이 나무와 돌 사이에 빠져가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안정권에 도착했다고 여겼을 때, 두 개의 난관만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는 조난 신고를 할 것인가? 텐트를 치고 잘 것인가? 텐트 칠 곳도 없었고 조난신고를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네 시를 넘겨가면서 서서히 초조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손은 눈을 판다고 얼어있었다. 눈을 녹여 물을 대신하고 겨우 올라왔는데 이번에 더 암담한 난관이었다. 정말 가파른 경사에 눈만으로 뒤덮인 절벽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100여미터 거리에 오전에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돌무더기가 있었다. 정말 마지막 난관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치지 않았고 공포로 절망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허허' 공허한 웃음을 날리며 그 고난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짧았지만 그늘진 곳엔 얼음이 얼어 아이젠을 착용했다.
15미터 거리, 절벽 중간 즈음에 튀어나온 바위 하나, 그리고 그 뒤로 보이진 않지만 그만한 길이가 또 있는 듯했다. 나는 바위를 이용하기로 했다. 뛰어서 바위까지 가서 한 번 쉬고 다시 뛸 작정이었다. 마음먹기가 힘들었지 하고 나니 스릴 넘쳐 재밌었다. 이제 마지막. 그림자로 눈이 밟히지 않았다. 아이젠을 여러번 찍어야 겨우 밟혔다. 헛디디거나 미끄러져도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세 발짝 정도 가다가 후다닥 뛰었다. 순간 왼쪽 다리가 헛디딘 듯 미끄러졌다. 필사적으로 위쪽 얼음에 피켈을 찔러 넣었다.
[으흐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어올라 마지막 결승지점을 향해 질주하는 선수처럼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승리자의 모습으로!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다시 몽땅베르에 도착했을 때는 6시 30...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려 쓰레기통을 보니 먹다 남은 사과가 싱싱한 채로 남아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피던 담배 꽁초를 줏어 피웠다. 내 생애 가장 맛나는 사과와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 샤모니 몽블랑 알펜로즈 게스트 하우스
잠시 휴식 후,
나는 샤모니를 향하기로 했다. 알펜로즈의 조문행 사장님보다 갑자기 김치찌게가 먹고싶었다.
비웃음을 남기듯 떠나왔는데 나는 완전히 죽는 상을 하고 기찻길을 걸어 알펜로즈까지 오니 저녁 9시 30분...
그렇게 땡기던 커피 한 잔의 행복, 고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 맛난 김치찌게 한 그릇에 행복을
가득 품고 나는 잠의 나락으로 빠졌다.
내일 재도전 해야지......
화창한 날씨가 창문을 열고 가만히 눈가를 어지럽히는 아침이 왔다.
어제 고생한 덕분에 정신 없이 곤한 잠을 자고 나니 온 몸의 피곤함도 가신 듯 했다. 아점을 해결하고 사장님의 '알펜로즈'는 일본인 그룹 관광객들과 대부분의 영국인들, 이탈리아 인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스키어들과 산악인들을 상대로 수시로 사람들은 들어오고 수시로 바뀌었다. 식당을 겸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식사만 하고 알프스 산맥 중에 가장 높은 곳을 케이블 카로 오를 수 있는 '에귀 드 미디'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이동을 했고 더러의 등산 클럽에서 모인 사람들은 가이드를 대동하고 산맥을 넘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식 식당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룹으로 온 사람에게도 혼자 온 사람에게도 여행 책자가 전해주지 못하는 행복한 정보가 흘러 넘치기 때문이었다.
알펜로즈에서 만났던 일본인 등산 전문가는 꽤나 붙임성 있고 싹싹한 젊은이였다.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꽤 어려운 일본 이름이었다. 그는 다른 등산 전문가이면서 신디사이즈 연주자이기도 한 이탈리아 사람과 함께 몽블랑 꼭대기에 올라가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인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이번에 샤모니 몽블랑에서 열리는 최고 산악인을 뽑는 선발전에 일본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고 사장님이 살짝 일러줬었다. 한국인도 여름철만 가끔 오지 이렇게 스키에 겨울 스포츠에 만능이라 이런 경연대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식을 낳으면 꼭 스키와 잠수와 자유 낙하를 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사장님과 주방장님께 작별 인사를 고하고 어제 버린 눈 신발을 다시 사고 이번엔 기차를 타고 몽땅베르를 올랐다. 먼저 삐에르를 찾아 이렇게 살아 있노라고 자랑을 했다. 삐에르는 어제 내게 겁을 주려고 말한 진실, 즉 길이 없기 때문에 길을 잃고 조난 신고를 하면 헬기가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했었다. 길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살아왔으니 나의 생환 과정을 들은 삐에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미쳤다는 시늉을 했다. 그가 또 한번 미쳤다는 시늉을 하며 포기나 항복을 뜻하는 제스처를 내다 보이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에귀드미디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몽땅베르엔 벌써 에귀드미디에서 오랜 시간 스키를 타고 내려 온 스키어들로 붐비고 있었다. 기차는 샤모니에서 올라 오는 사람들과 첫 케이블카로 에귀드미디에 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 온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내려 갔다. 그들은 두려움 없는 도전 정신이 가득한 모험에 찬 사람들이었으며 용기 있었다. 또한 즐거움을 만끽할 재능과 위치를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실행할 줄 알았다. 사회에서 성공한 것처럼 능력 있어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들은 멋있었다. 부러웠다.
*** 몽땅베르 - 에귀드미디 코스
44세, 4월, 새벽 4시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4자가 많이 낀 너무도 게으르고 싶은 봄이었다.
햇살의 화사함과 샤모니 산맥에 지천으로 핀 꽃들의 경연은 실패한 내 마음에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파리 생활의 실패로 마음은 괴로웠으나 항상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나는, 프랑스에 오래 살았어도 샤모니 방문은 처음이었다.
산악 등반에 전문적인 경험이 없었지만 외인 부대 시절, 알프스 브리앙송 산악보병 부대에서 3주간 산악 훈련을 받았던 경험이 전부였다. 그 경험과 전직 외인 부대원이라는 용기는 만만해 보이는 4800미터의 몽블랑 즘이야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혼자 전문적인 지식없이 벌써 혼이 한 번 났음에도 다시 되찾은 것은 용기일까, 객기일까? 나는 왜 이렇게 몽블랑 등반에 목을 메는 것일까?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난 나는 몽땅베르에서 운하의 바다로 내려가는 50여미터 정도의 절벽에 설치된 1인용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나, 사다리는 지상에서 2미터 정도 높이에서 끝났고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다시 올라갈 것인지 배낭을 아래로 던져 놓고 뛰어내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절벽 아래는 뛰어내리더라도 착지를 할 만한 공간이 없었고 잘못 뛰어내리면 운하와 절벽 사이의 넓고 깊은 구멍 속으로 빠질 염려가 있었다. 사다리는 절벽에 고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보 부족으로 첫 난관을 맞이한 나는 배낭을 벗어 추락을 방지할 만한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배낭은 아래로 굴러 떨어지다 바위에 걸렸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사다리 마지막까지 손으로 내려가 바싹 마른 땅 위에 사뿐하게 착지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돌들에 미끄러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대각선으로 기어올라 튀어나온 바위를 잡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배낭을 회수하고 광활한 운하의 바다의 얼음 위에 올라섰다. 조금 걸어 뒤돌아보니 등산객용 루트가 따로 있고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사다리가 다른 쪽에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을 보고 혼자 피식 쓴 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체력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지도에 나온 루트를 따라 두 번째 야영지인 르꾸앙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였다. 다리에 심한 경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운하의 바다에서 대피소로 향하는 등산로를 찾을 수 없었던 탓에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절벽을 기어오르다시피 올라온 터였다. 절벽의 결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너무 달랐다.
대피소엔 여섯 명의 등산객이 가이드와 함께 늦게 도착한 나를 보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혼자 왔다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고 가져온 장비의 미흡과 아시아인이 프랑스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만든 눈초리였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힘겹게 ‘봉스와’라고 인사하곤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오랫동안 생활인으로 살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올라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할 것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대피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커피와 요리를 파는 곳이었지만 얼음이 녹는 4월은 아무나 들어가서 잘 수 있었다. 모닝 커피를 끓여 밖을 내다보니 등산객들은 가이드의 뒤를 따라 벌써 운하의 바다를 건너 ‘거인의 이빨’ 정상을 향하고 있는 그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무모하다는 생각도 없이 커피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대피소의 등산로는 운하를 만나자 사라졌고 드디어 난생 처음으로 크레바스를 만났다. 말로만 들을 때는 가소로웠다. 영화에서 보았던 크레바스의 위험은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것과 영화로 보아오던 것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던 그것 이 바로 눈 앞에 조그만 점으로 왔다.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체 꼼짝 않고 몇 시간을 서 있었다.
18km ‘운하의 바다’라는 몽블랑 뒤 편의 스키 계곡 3000미터가 넘은 지점이었다. 화려한 날, 하얀 눈 위에서 꼼짝 않고 공포에 휩싸여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크레바스는 하얀 눈 위에 난데 없이 나타난 까만 점이, 누가 쓰레기를 버렸나 싶을 정도로 조그만 점이었다. 아니면 조그만 산봉우리가 솟아 올랐을까 가까이 가서 보니 주먹만한 구멍이었다. 스틱으로 휘적거려보니 커지는 구멍에 머리카락이 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눈에 덮여 있던 크레바스가 4월 날씨에 녹아 드러난 거였다. 이곳의 크레바스는 작게는 30미터에서 깊게는 80미터에 이르는 만년설이 얼어 만든 운하였다.
[여기서 죽을 팔자라면…… 에라 모르겠다!]
결심을 하고 배낭을 앞으로 던져놓고 피켈을 양손에 쥐고 힘껏 달려 몸을 날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또 걸어 올라가자 드넓은 평원이 나타나자 드디어 에귀드미디 전망대가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나타났다. 쏘시송을 꺼내어 마늘을 얇게 썰어 끼니를 떼우며 배낭을 깔고 앉아 코스믹 대피소에서 잘 계획에 가슴이 부풀었다. 넋을 놓고 한참을 에귀드미디와 코스믹 대피소를 번갈아 보던 내 앞으로 커플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오후 네 시, 시계를 보며 긴 기럭지의 그들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여유 있게 쏘시송을 마저 먹고 커피도 한 잔 끓여 마시자 그들은 벌써 에귀드미디 전망대를 오르고 있었다. 30분, 그들이 그 곳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느긋하게 일어서 느긋하게 평지를 걷자 가까웠던 전망대는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산 정상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지만 다 왔다는 안도감은 해가 지고 있다는 불안감도 없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운 좋게 아직 문이 닫히지 않은 3800미터 ‘에귀 드 미디’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전망대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고산병에 시달리며 잠을 설쳤다. 자신감만으로 할 수 없는 등산에 자신감을 잃고 다음날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도착하자 첫 케이블을 타고 하산했다.
*** 르 부에(Le Buet) - Le Brevent 코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반대편을 마지막으로 올라보기로 했다. 이번엔 르 부에(Le Buet)로 이동한 뒤에 브레방 호수로 내려 오는 2박 3일 코스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이 루트는 몽블랑 트레커들이 8박 9일 코스로 즐겨찿는 유명한 코스여서 따로 GTMB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알프스의 장관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얼음이 녹은 그 길은 온갖 꽃들이 등산객들을 반겼고 찬란한 태양은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어울려 등산객들에게 각광 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 산행은 이탈리아를 거쳐서 돌아와 자연스럽게 알프스가 갈라 놓은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 차이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 산행을 위한 여정은 완벽했고 두 번이나 개고생을 한 이후라 이번엔 안전한 등산로를 택한 덕에 발걸음도 자신감이 흘렀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라 뜻 깊은 코스는 눈 사태나 눈이 녹지 않아 키 만큼 쌓인 눈들을 헤쳐 나간다고 여간 곤혹스러운 길이 아니었지만 눈 신의 위력은 대단했다.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걸어 가기만 하면 될 뿐, 가끔 산 길을 만든다고 홈이 진 언덕과의 틈 사이로 허리 이상으로 눈 속에 빠졌고 다시 빠져 나온다고 고생이 심했다. 4월의 하늘은 높고 너무나 청명해 구름한 점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산이라고 우습게 여겼던 생각은 다시 한 번 보기좋게 깨지고 말았다.
보통, 길 끄터머리만 눈이 녹아 발을 디딜수 없는데다 눈이 얕게 쌓인 언덕 사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경사가 너무 가파랗던 탓에, 한 번 빠지면 몸의 방향과 발의 방향이 거꾸로 되어져서 괴상한 자세로 불편하게 빠져 나와야 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일수록 어느 쪽을 밟아야 위험하지 않게 빠져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길이 명확하지 않을 땐, 무조건 높은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혼자 등산 하면서 배운 방법이었다. 텐트를 쳐야 하는 곳은 바람이 없는 반드시 평지여야 하는데 눈사태나 산사태의 위험, 비가 올 경우에는 계곡을 반드시 피해야하는 건 미리 경험했던 터였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2000미터 고지의 산행 길은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되면 반드시 고산지대 등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과 동행해야 했다. 혼자서는 어리석은 짓을 범하는 것이었다. 크레바스 뿐만아니라 얼음이 녹을 때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의 눈이 취약해지는 봄이되면, 쌓인 눈들이 눈 속의 바위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빠지면 다치는 건 기본이고, 빠져나오는 건 더욱 요원한 일이라 최소 두 사람 이상이 서로를 묶어서 다녀야 하지만 혼자 온 객기가 벌써 두 번의 위기를 만들었던 터였다.
센드위치와 커피가 먹고 싶어 마을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베낭을 멘 두 여자가 언뜻 보기에도 산책하듯이 등산복장도 아닌데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며 오르고 있었다. 그때는 늦은 오후 5시가 가까웠다. 그들은 이 시간에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일까? 4월의 해는 8시가 넘어서도 존재했지만 산악지대는 일찍 해가 졌다. 숲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 시간에도 산행을 하는 여자들이 있다니!
신기하게 생각한 나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지나치려 할때 그녀들이 메고 있는 베낭이 베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속엔 아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한국에서 감히 상상이나 할 모습인가?!!
파리 시내를 쫄바지를 입은 여자가 남편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아기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지만 직접 보았을 때의 충격처럼, 나는 그녀들을 신선한 충격으로 바라보며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흔쾌히 승낙한 그녀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4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녀들,,... 사실, 유럽녀들은 늙어가는 속도가 장난 아니게 빨라 30세가 되면 우리나라의 40대로 보아도 모자라지 않았다. 요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들의 산책이었다. 그녀들의 일상의 행위로 아기를 업고 산을 오르는 행위!
우리나라와 같지 않은, 같아질 수 없는 이들만의, 어쩌면 이곳만의 색깔이랄까.... 산책하듯 몽땅베르를 오르던 빵만드는 젊은이와 처녀의 모습처럼!
어려웠던 6박 7일의 산행길에서 내가 가져온 것들이 있다.
나에 대한 사랑이다. 소중한 가치와 자긍심이다. 이번에 가리라 맘 먹었었던 스페인을 갔었다면 가져오지 못할 내 소중한 가치. 내가 프랑스 자전거나라의 지점장 자리를 저 눈 속에 버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가지지 못할 자부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
어느 듯 5월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