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서울 가자 산악회 포은 정몽주선생 포은 정몽주동상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선생)기념물 제62호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지주사공파 습명(襲明)의 11세손으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며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사]에는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정몽주가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로 있을 때 경서 중에서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오직 [주자집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강설한 내용은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서 듣는 이의 의심을 깨뜨려 주었다. 나중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이 들어왔을 때 뜻이 완전히 부합하므로 유자들이 다시 한 번 탄복하였다. 이색은 자주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몽주의 이론은 어떠한 문제로 논란을 벌여도 이치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삼을만하다'고 하였다" 민자복이 어느날 정몽주를 찾아갔을 때 정몽주가 "詞章은 末藝이고 이른바 身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 말은 '대학'과 '중용'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고 한 말을 정도전에게 전했다. 당시 16~7세였던 정도전은 이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해 읽었는데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정도전은 정몽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몽주는 '대학'의 提綱과 '중용'의 會極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었다. '논어', '맹자'의 精微에서 操存, 涵養하는 요령과, 체험하고 확충하는 방법을 얻었다. '주역'에서는 先天, 後天이 각각 體, 用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서경'에서는 精一執中이 제왕이 전수한 심법임을 알았다. 그리고 '시경'은 민이(民彛)와 物則의 교훈이 근본이 되고, '춘추'는 도의(道誼), 功利의 구별을 분변한 것임을 알았으니.. 우리 동방 오백년에 이 이치를 안 자가 과연 몇사람이나 되겠는가? [三峰集, '포은奉使藁序]
이성계에 의해 고려의 왕조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나라 안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고려 공양왕을 몰아내자는 무신들과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 가자는 문인들의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자기 아버지에게 정몽주를 포함하여 반대파를 모두 죽여 없애자고 주장했는데, 이성계는 정몽주만은 절대로 몰아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들편으로 만들어 보라고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한 번 떠보려고 이런 시 한 수를 지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라.그러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런 시를 지어 이방원의 시에 해답을 했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자기 아버지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알고 정몽주를 죽여 없애기로 했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에서 나오던 그 날 저녁, 정몽주의 말이 선죽교에 들어서자마자 이방원이 보낸 고려 장사 서너명이 쇠망치를 들고 달려들었다. 정몽주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그의 피가 돌다리 밑으로 흘러 내리더니 그 곳에서 파란 대나무가 솟아났다.그래서 이 때부터 그 돌다리 이름을 선죽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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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 모현당(慕賢堂)-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이다. 모현이라는 지명은 포은 선생의 어진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生居眞川 死居龍仁' 이라는 말처럼 포은 선생도 살아서는 용인과 인연이 없다가 복권이 된후 고향인 영천으로 천장되던 중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상여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이곳 모현면 능원리에 떨어지자 지관을 통해 이곳이 명당임을 확인하고 묘를 썼다. [출처] *용인의 인물1 * 포은 정몽주 선생묘(1편) 註 선죽교(善竹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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