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 따라 집을 나서며 작은형과 나는 자연스레 길 건너 버스정류장을 향하려 했다.
그때 앞서가던 큰형이 말했다.
"이런 날은 택시를 타야 돼."
그 당시 동네 만화방에서는 5원을 내면 쪽방에서 TV를 30분 볼 수 있었고, 10원이면 신간 만화를 예닐곱 권 볼 수 있었다.
5시 부근의 어린이 만화영화 시간에 많이 붐볐고, 김일의 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엔 앉을 틈이 없을 정도 쪽방이 빽빽했고 더러는 서서 봐야 했을 정도였다.
만화방 출입을 막 끊은 중학교 1학년, 1972년 초여름의 저녁상에서 큰형이 엄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더 미루지 말고 삽시다."
"그래도... 아부지 오시마 물어보고 사야지..."
"아부지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큰형은 스포츠를 좋아했고, 당연히 운동경기 관람도 무척 좋아했다.
그해 늦여름, 뮌헨올림픽을 앞두고 안달하던 큰형이 레지던트 2년 차 쥐꼬리 봉급을 보태기로 하고, 저녁상에서 TV를 구입하기로 최종 합의를 엄마와 보았다.
동성로 대구백화점 정문 앞에 삼 형제가 택시에서 내려 어깨에 힘을 주며 보무도 당당히 백화점으로 걸어 들어갔고 TV 매장 앞에 섰다.
집 형편을 고려해야 하니 캐비닛형 문이 있는 TV는 포기하고, 발이 네 개 달린 14인치 진공관 도시바 흑백 TV를 형제 만장일치로 골랐다.
전원을 켜면 징~ 소리를 내며 한참 기다려야 화면이 나오던 그 TV로 '여로'도 보고, 후라이보이 곽규석 씨가 진행하던 '전국노래자랑'도 보았다. 물론 그해 아시안게임도 손뼉 치며 보았고...
그날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어느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뭔가 큰 구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선명하게 떠올라 귀를 간지럽히곤 했다.
"이런 날은 택시를 타야 돼."
오십 년 전엔 흑백 TV 하나 사는 것이 어깨에 힘을 주고 택시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첫댓글 ㅎㅎ마음자리님 글 읽으니 나도 여름밤 마당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여로>를 보았던 기억이 나군요.
가난했지만 참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어요.
'여로'가 참 대단한 연속극이었어요.
우리는 가난했지만 정 많던 시절과 부유하지만 냉정하게 계산하는 시대를 다 살아보네요. ㅎㅎ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이미 멀리 간 기억이지만,
마음자리님의 글이 정겹기도 합니다.
여로를 시청할 때가 신혼시절 이었지요.
좀 모자라지만 착하기만 한 신랑 영구에게 온
며느리(태현실)를 구박하는 시어머니, 시누이가
넘 얄미운 역할을 한 연속극이 인기가 좋았습니다.
TV를 사기 위하여는
마땅히 택시를 타야 하지요.
어깨에 힘도 들어 갔으니까요.^^
아... 그때가 콩꽃님 신혼시절이었군요. 여로 배역 중에 달중이라고 왜놈 형사 앞잽이로 나온 사람도 악역으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전쟁통에 헤어졌다 영구 가족 재회하는 장면에서 국민들이 눈물 많이 훔쳤던 기억도 나고요.
택시 타야 하는 날, 맞지요? ㅎㅎ
그당시 그 귀한 티브이를 사러가니 당당히 택시를 타고 간다?
당연하고 맞는 말 입니당
우리집은 1963 년에 잠깐 티브이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공부에 방해 된다고 1년만에 팔아버렸지요
그 당시 우리집 티브이는 14 인치 중고 였습니다
그리고 그당시 대부분의 티브이는 14 인치 짜리 였었습니다
우리집 티브이가 있기전에는 동네의 티브이가 있는 집에서 그집 어른들 눈치보면서 티브이를 보았지요
그이후에 1973 년 에서야 우리집도 다시 티브이가 생겼지요
지금 우리집 티브이는 내방 티브이가 44인치 짜리 이구 거실 티브이가 75 인치 짜리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발전을 한겁니까?
그당시의 티브이는 왜 그렇게나 보고 싶고 볼게 많았을까요?
그시절이 또 그리워집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TV 발전사만으로도 하루 이야기꺼리 하고도 남지요. ㅎㅎ
1979년에 컬러 방송이 시작되던 때도 대단했어요. ㅎ
같은 시대 추억들 나눌 수 있어 참 좋습니다.
태평성대님,
동유럽 갔다 오셨겠네요.
갔다 오신 후에
반가운 인사라도 한마디 !
@콩꽃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나는 무사히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행 여독이 아직 안 풀려서 어제 오늘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내 유럽 여행 기행문은 여행 동호회 휴게실 난에 날짜별로 일기 형식으로 써 놨습니다
이번 동유럽 여행은 잘 다녀왔다
돈이 안 아까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여행에 대해서 체력적으로 자신감이 생겨서 더 늙기전에 또 해외여행이 가고 싶읍디다
이상입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우리집은 고딩때 티비 들어왔는데~
솔직히 단칸방 살면서 티비보며 공부하니 성적이 떨어지데요~
동해물과로 시작해서 우리나라 만세까지 안 빼놓고 다 보다보니 성적도 떨어지고 시력도 나빠지고... ㅎㅎ
글을 읽다가 미소가 저절로,
그 시절 그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가난했지만 차라리 행복했는지도 .,
아련한 추억을 소환시키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날로 발전하던 그때, 참 행복했던 시절 같습니다.
지난세기 74년도에 테레비를 구입하셨군요..ㅎ
당시에는 전력 사정도 안좋고..
테레비같은 공산품 양산도 물론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러다보니 테레비 보급률도 아주 낮을수 밖에 없었고..
당시 정권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국운의 앞날을 밝히기도 했지만
농어촌 전화사업이라해서 농어촌에도 전기를 공급해야한다는 큰일을 추진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1974년하면 제고향 시골 마을에도 드디어 전기가 공급되고..그래 우리집에서도 테레비를 집에 들여놓게 되었으니
마음자리님과 저는 1974년 테레비 만세!~~로 공감대가 오늘 만들어 지는군요..ㅎㅎㅎ
사실,,1974년하면
우리나라가 해외원조의 도움에서 독립,재정자립 원년으로 기록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지요.
그 시절, 새마을 운동이 터를 잡아가던 시절이었지요.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던 시절, 너나 없이 열심히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공감해주시고 부연 설명까지, 감사합니다.
제 고향인 공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 왔을 때가 1964년 이었습니다.
그 때 거주지 '마을에 만화방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티비를 보여주기도 했었지요.
까마득한 오래 전 기억을 마음자리님 글을 읽으며 떠올려 봤습니다. ^^~
공주에서 서울로.
낯설어서 적응하기 힘드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