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록펠러(Rockefeller, 1839년∼1937년)
미국의 석유 기업인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이자 석유왕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937년도 그의 재산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19년 기준 무려 4090억 달러로 이는 한화로 환산시 약 498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 사람 한명이 당시 미국 경제의 1.5% 이상을 차지했으니 말 다했다. 간혹 말리 제국의 황제였던 만사 무사가 록펠러를 넘는 환산가치 약 4000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1300년대 사람이라서 정확한 계산은 어려울 뿐더러 2019년 다시 계산된 록펠러 회장의 총재산이 약 4090억 달러로 밝혀져서 역시 록펠러보단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재산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준으로 하면 록펠러가 압도적인 1위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뉴딜 정책 때 소득세를 엄청 올리면서 연소득 500만 달러 이상은 79%를 과세했는데, 1900년대에 여기에 해당되는 건 록펠러 1명뿐 이였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연 50억 이상 버는 사람들은 극소수인데, 하물며 80여 년 전 통화 가치로는... 만 97세 10개월로 장수까지 했다. 심지어 자수성가해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 석유의 90%대 세계 석유 95%를 지배했고 거의 모든 산업에 문어발 확장을 했었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부자 순위 1위가 록펠러, 만사 무사가 2위, 앤드루 카네기 회장이 3위이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자산은 1429억 달러로 전체 15위이며 빌 게이츠가 역대 37위이다. 4090억 달러가 실감이 안 간다면 쉽게 생각해 2018년 기준 아랍 에미리트의 1년 GDP(=4141억 달러)보다도 약간 더 적은 액수를 개인이 가졌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아랍 에미리트는 경제규모 30위의 나름대로 중상위는 가는 나라다. 이를 보면 그의 재산이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사람이 일본을 통해서 소개돼서 그랬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록펠러’로 표기하고 있지만, 가운데에 e가 묵음이 아니어서 ‘라커펠러’로 적어야 한다. 실제 영어를 쓰는 원어민들이 읽는 발음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앞부분을 더 정확히 말하면 ‘롸크’에 가까운데 적어도 ‘ㄱ’받침 발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록펠러보다는 라커펠러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선 ‘더글러스 맥아더’나 ‘마거릿 대처’처럼 예외로 인정하였다.
사업적으로 무자비하고 경쟁자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박살냈던 걸로 유명하다.
갤런당 30센트 하던 석유 가격을 갤런당 6센트, 1/5로 줄여버리고 독점하고 있는 동안 이 가격을 절대 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경쟁기업의 진입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었다.
석유왕 록펠러의 후손은 조상만큼 수완이 뛰어나진 못했어도,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후손은 3조 원을 보유하여 세계부자 500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4세대로 교체된 가문 사람들 전체를 통틀어 20조 원가량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록펠러 재단으로 간접 상속시켰다. 그래서 가문의 부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20조 원은 가문 사람들의 순수한 개인 재산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꾸준한 기부 활동의 결과로 록펠러 재단의 자산은 2013년 3월 기준으로 41억 달러에 불과하여, 미국 15위의 재단에 랭크되어 있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3대인 넬슨 록펠러가 포드 정부의 부통령을 지내기 위한 인준청문회로 불려가 록펠러 재단의 재산과 탈세의혹을 증언하면서 록펠러 재단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후에야 제대로 된 기부활동을 했지만 재단으로 간접 상속되었던 재산을 또 다른 곳으로 빼돌렸으리란 의심이 가시지는 않아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대째들은 뿔뿔이 흩어졌네 어쩌네 해도 현 가치로 3천억 달러가 넘는 석유왕 당대의 재산을 3대까지 재단을 통해 반세기 가까이 거의 고스란히 유지해왔다.
1839년 7월 8일에 태어난 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그 자신의 기적 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실제로 그의 집안은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가문 자체가 자본가 지주 집안이다. 아버지가 극단적인 미친놈이라 가문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당시의 평균적인 생활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록펠러의 유년시절은 경제적으로는 꽤나 괜찮은 수준이었다.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한 사기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탕아였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펴서 사생아를 두 명 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기꾼겸 장사치라서 애들한테 장사 수완 등의 교육은 아주 혹독하게 시켰다.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에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씩 주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게 시켰으며, 어머니의 직장에서 일손을 거드는 식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익혔다. 심지어 아버지는 성인이 된 록펠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낼 정도였다. 또한 하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록펠러는 의심 없이 아버지 품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조차도.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록펠러는 평생을 불안감에 가까운 철저함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잦은 부재하에도 여러 부업을 하며 좋은 장사 수완으로 중산층 정도의 생활은 했다. 어찌보면 난봉꾼에 가까운 아버지의 혹독한 교육 덕분에 지금의 록펠러 가문이 탄생하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아버지는 아들 록펠러가 엄청난 거부가 된 후에도 여전히 문명을 거부한 채 평생 야인으로 미국 전역을 떠도는 삶을 살다 95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장수하는 유전자도 물려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명을 거부하기보다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라 사회나 심지어 가족조차도 거부하고 다녔다.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할 정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한 달 앞둔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라는 비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된다. 록펠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 당시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고 부통령은 장가가기 전까지 문맹이었으니 고졸만 해도 나쁜 학력은 아니었다.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 나기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 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면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갚는 방식을 이용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공했고, 꽤나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이후에 닥친 남북전쟁의 바람을 타고 록펠러는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최초의 유전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었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결과적으로 그 유전지대는 꽤나 번성하게 된다.
당시 그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자체는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의 1인자였던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가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옮겨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차가 고장이 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유전이 발견된 초기에 록펠러는 이쪽 관련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이거다!’ 라는 느낌을 받고 정유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그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 외에 새뮤얼 앤드류스까지 끌여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결국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기업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데,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 5만, 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만 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만 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가 스스로는 말하기를, 이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클리블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가 주장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고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몰랐다. 그리고 이때 상당히 운이 좋았는데, 바로 존 록펠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준 것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제공한 악명높은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 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그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오일을 창설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다드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져만 갔고, 그 영향력은 다른 업계에까지 미쳐, 철도왕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그리고 밴더빌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톰 스콧에게 가장 큰 물량을 제공하는 고객으로서, 리베이트를 점점 올려가며 운송요금을 후려쳐갔다.
사업을 커지고 주머니는 두둑해져 가지만,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일화가 스탠더드 오일 창설 직후에 있다. 본인 소유의 정제소를 시찰하던 중 록펠러는 본인 회사 소유의 원유 운송용 나무통의 땜질이, 총 40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휘하 직원에게, “38번으로 해보시오.”라는 말을 던지고 확인 결과, 38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 중에는 새는 것이 있었지만, 39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은 새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번의 땜질 지시가 담긴 공문이 전 지사 및 사원에게 회람되게 된다. 장년-노년 즈음에, 관련하여 질문을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걸로 꽤 많이 아꼈지.”라고 회상하게 된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하게 하였고, 옷이 해지기 전에는 절대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서 알바도 시켰는데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분명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상에 욕은 다 먹은 사람이지만, 문헌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국가나 법률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신념대로 일을 처리한 사람으로 보이며 이는 석유 산업을 수직 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 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회사 이름이 STANDARD인 이유는 당시 등유 품질이 좋지 않아서 등을 켜 놓고 자다고 폭발로 불나는 등 불순물이 많은 저질 등유가 많았는데 우수한 기본 품질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었으며, 땅에 파이프만 꽂으면 석유가 나오는 당시 미국 펜실베니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유 개발과 정유업에 뛰어들어 자칫 개판 오분전이 될 석유 산업을 독기로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필라델피아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에서 최고 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며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메사비 대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필두로 철강 사업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쪽에는 본좌인 앤드루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마침 카네기의 사업을 인수한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스탠더드 오일 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써 록펠러 측에서는 모건의 철광산업 트러스트 형성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 와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은 꾸준히 성장하여 53세에 확고한 위치를 다진다.
이후 미국의 주마다 있는 스탠더드 오일 사의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 주보다 맨해튼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 주의 스탠더드오일 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오일 사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4개의 회사로 분리된다. 이때 지주회사인 뉴저지주 스탠더드 오일사(Esso : 스탠다드 오일(SO) 오브 뉴저지)가 지금 석유회사의 본좌인 엑슨,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욕)가 모빌,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쉐브론이다.
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결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국정회의에서 “요즘 월 스트리트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더 해체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한다는군.”이라고 언급하게 된다.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산될 즈음 같이 골프를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노벨브라더스와 경쟁했고, 결국 승리했다.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역사에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없을 굴지의 기업 제국이었다.
1914년에는 월급을 올려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총질을 해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러들로 학살(Ludlow Massacre)을 저질렀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55세에 록펠러는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및 우울증 증상을 보였는데, 그동안 돈을 모으는 데 몰입하여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이때, 록펠러는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 라는 말을 듣고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고아원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우고 연약한 자를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신조가 ‘적자생존’이었는데 자선사업에도 그 원칙을 밀어붙였다. ‘입지가 나쁘고 비효율적인 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낭비’라고 했을 정도이고, 록펠러 재단은 의학과 과학 등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집중해왔다. 자선사업이라고 해서 마냥 기부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후 청교도로서의 숙원대로 자선사업들을 지원해주었고 이후 장수를 누리다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 배후자본설 관련 음모론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이고 마치 그가 유대인인 것처럼 나오는데, 존 록펠러는 유대인을 싫어했다. 그러나 록펠러의 모계쪽은 유대계이다. 즉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지만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였다. 록펠러 가문은 일단 독일계 미국인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그것도 종파가 엄격한 침례회라 평생 술도 마시지 않았다. 카네기가 록펠러를 놀릴 때 일부러 술병을 선물했을 정도. 유대인은 수 천 년 동안에 걸쳐 혼혈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인종이나 혈통은 의미가 없으며 풍습과 유대교로 유대인의 여부를 가린다. 그러니 록펠러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음모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당시에 흔하고 사회적으로도 용납되던 반유태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비슷한 점이라면 엄청난 부자라는 것과 존 록펠러와 로스차일드의 조상이 같은 독일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다. 근데 그렇게 엮으려면 미국 백인중에 40%가 넘는 사람들도 독일계이므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여야 한다.
그 외에도 그나마 설득력 있는 음모론 중에 아직 록펠러 집안이 엑슨모빌과 셰브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석유업계를 지배하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홀라당 넘겨줬을 리도 없으니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에도 이러한 음모론이 있다. 그쪽은 둘 다 아직 세계 금융은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모건 가문이 지배한다는 내용이고, 역시나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단 이는 적어도 50년 전 이야기로 지금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물론 넬슨 록펠러까지만 하더라도 재단 소유의 기업에서 일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록펠러 가문은 재단을 통해 기업집단을 지휘하는 기업가 가문이 아닌 정치를 비롯, 사회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는 유력가 가문으로 체제전환이 끝난 상황이다. 또 록펠러가의 거대한 재산들도 계속 후손들이 분할상속해서 많이 쪼개진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