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8.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6,5-8;7,1-5.10 마르8,14-21
인류의 타락
"하느님의 좌절, 후회와 아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공부입니다. 둘 같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공부는 나를 깨달아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다산>
날로 새로워지고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깨달아 알아가는 깨달음의 인생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논어의 공자>
논어 맨처음 시작되는 공자의 인생 삼락의 말씀입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삶의 장이 공부의 대상이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학교의 영원한 현역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오늘 창세기와 마르꼬 복음의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을 대하면 더욱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낍니다. 주님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좌절, 후회와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건 일부 특수한 사람들이 아닌 인간 대부분의 보편적 현실임을 깨달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흔히 회자되는 “기계는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라는 또,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마디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낙관적 전망을 어렵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저런 물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답은 회개와 깨달음의 선택, 그리고 훈련과 습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부터 말씀이 작금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 부패하고 변질된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아 섬뜻한 느낌도 됩니다. 흡사 온몸에 퍼져가는 암세포같은 세상 악의 현실을 보면 더욱 이런 느낌이요, 날로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중병을 앓고 있는 공동의 집인 하나뿐인 지구를 보면 과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단숨에 읽히는, 공감이 가는 제1독서 창세기 말씀 전반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보시고,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 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섭게 마음에 와닿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지 않습니까?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에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둘 수 있는가 묻게 됩니다. 위 내용만 보면 성악설이 맞고, 앞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성선설이 맞고 또 둘 다 해당되는 역설적 인간 존재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절로 고백하는 엊그제 인용했던 ‘산앞에 서면’ 이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는 세상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앞서 노아에게 하달되는 명령이요, 노아는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신 그대로 다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롤모델로, 하느님의 희망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노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에 따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노아처럼 한 번 의롭고 흠없이 살아보라는 주님의 원의를 감지합니다. 노아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히브리어 직역인 영어-“He walked with God”- 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발로 걸을 때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길벗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에 대해 탄식하며 좌절감을 표현했던 주님은 오늘 제자들의 눈먼 현실에 그대로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얼마전 있었던 빵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정말 대책없는 무지에 눈먼 제자들이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치 제가 받는 질책처럼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새삼 우리 인생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깨달아 나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져,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참나가 되어가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사
첫댓글 회개와 깨달음의 선택, 그리고 훈련과 습관
우리 인생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깨달아 나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져,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참나가 되어가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