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62)
<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2> 장상헌
가황 나훈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하였던 슈퍼스타였다.
약 2,600곡을 취입하였고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가 800여곡에 이르는 싱어송라이터 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작곡이 많기 때문에 지금도 저작권료가 월 5천만원이 넘는다 한다.
또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153곡으로 가장 많은 가수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는 가슴 깊이 저미는 음색과 트레이드마크인 꺽기로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 왔으며, 가창력 만큼이나 뛰어난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연출능력으로 수많은 팬을 불러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훈아와 관련하여 제가 1985년 부산에서 기업은행 망미동지점 대리로 근무할때, 그의 생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직접 밝혔듯이 부산역앞 뒷골목에 있던 부산시 초량2동 415번지 7통3반에 가게 되었다.
그때 그의 생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 빵집으로 바뀌어 있었다(지금은 아쉽게도 그 자리에 이마트 초량점이 들어서 나훈아의 생가는 형태도 없다고 한다).
그때 빵집 주인과 동네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잘 모르는 나훈아에 대한 몇가지 얘기를 들었는데, 그가 외부에 알려진 47년생이 아니고, 50년생이라는 것과 대동중학교 다닐때 야구선수(내야수)를 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외항선원이 아닌 무역상(오퍼상)을 하였다는 얘기 등이었다.
물론 진실은 지금도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나이는 50년생이 맞는것으로 본다.
그 구체적 근거로는 그의 초량초등 동기들이 대부분 50년생인점, 그가 1966년 천리길이라는 노래로 데뷔할때 서라벌예고 1학년이었는데, 이를 역산해 보면 50년생이 정상적인 점, 그리고 나훈아가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활동중일때 기업은행 용산2가지점을 거래하고 있었는데, 그때 본명인 최홍기로 된 주민등록증상 오히려 한 해 늦은 51년생으로 되어 있었던 점 등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면 왜 실제 나이보다 대외적으로 3년을 높혀 47년생으로 하였나의 여부이다
이는 데뷔당시의 상황이 험한 연예계에서 너무 어리다 하면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렸다고 보며, 또한1945년생인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위해서라도 나이를 올리는게 여러모로 이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그는 공식데뷔전부터 노래로 이름을 날렸으며, 서라벌예고 1학년때 우이동 유원지에 소풍을 가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렀는데, 그때 같이 소풍을 와서 함께 그의 노래를 들었던 동덕여고의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가 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있는 등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1966년에 공식데뷔한 그는 1969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톱가수의 반열에 들어섰고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그 인기가 배가 되었다.
그렇게 인기절정에 있던 그가 1973년에 공군에 입대하였으며, 입대직전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이숙희와 결혼하였다가, 전역 1년전인 1975년에 이혼하였다.
전역후 잘 아시다시피 1976년에 김지미와 결혼하였다가, 1982년 이혼하였으며,
이후 1983년 후배가수 정수경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으나, 결혼생활이 그리 평탄치는 못하여 오랜동안의 별거와 이혼소송을 거친뒤 2016년에 위자료 12억을 돌려준후 공식적으로 이혼하게 되었다.
한편 나훈아 얘기를 하자면 전설적인 얘기가 너무나 많이 있어 7박8일간 얘기하여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오늘은 노래외에 나훈아를 상징하는 그의 배짱과 통 큰 마음에 관하여 몇가지 얘기를 하고 마무리 하고자 한다.
1. 1996년 일본공연에서 일본 우익세력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도는 우리땅’을 불렀으며, 이때 협박범에게 나훈아는 “때리 직일라면 지기삐라(때려 죽이려면 죽여버려라)”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엄청난 담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카스바의 여인이라는 노래를 부른 후배가수 윤희상이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자, 콘서트를 열어 수익금 3천만원 전액을 윤희상에게 희사하였고
3. 2018년 평양공연때 사전조율과정에서 북쪽에서 실향민에 관한 노래를 절대 부를 수 없다고 하자, 노래를 부르는데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나훈아는 북한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이때 김정은이 도종환 문체부장관에게 왜 나훈아가 오지 않았냐고 하여, 도장관이 일정이 바빠 못왔다고 하자, 김정은은 국가가 하는 일에 사적인 일로 못온다 하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다.
4. 2,020년에 대구지역에서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때,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앞으로 무려 3억이나 기부하였다.
당초 익명으로 기부하였으나, 워낙 큰 금액이어서 결국에는 나훈아가 기부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김지미와 이혼할때 전재산을 김지미에게 넘겨준 점, 이건희 삼성회장의 사적인 초청을 과감하게 거절한점, 김혜수(김선아)와 염문설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바지를 벗어버리겠다는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점 등 헤아릴 수 가 없는 실정이다.
여하튼 가황 나훈아는 연륜을 더할수록 그 깊이와 가치를 더하는 불멸의 가수이다.
다음편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온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