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해성사
때는 자정을 훌쩍 넘어서 어느덧 한밤중, 밤하늘엔 보름달이 자신이 세상의 유일한 빛인 양 마음껏 뽐내며 발 아래를 비추었고, 밤거
리는 변변한 가로등 없이 보름달의 빛만이 유일한 빛인 양 조금이라도 더 달빛을 받기 위해 깊은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다. 고요한 이
밤중에 이것은 마치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을 외각에 있는 허름한 목조 오두막 안에서도 미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이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을 알아차리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가능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그만큼 그 불빛은 이 어둠 속에서 눈
에 띄는 존재라는 것이다.
기도를 마친 신부는 슬슬 불을 끄고 사제관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준비를 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을 실행하려던 찰나,
신부는 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신부는 온화한 얼굴로 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낡은 목조 건물인지라 걸
음을 옮길 때 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몇 걸음을 걸어 드디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신부는 한숨을 쉬며 문고리를 돌린다.
몇 시간 후 새벽 미사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잠을 자 둬야겠다는 그의 생각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문을 연 신부는 은은한 불빛에
비춰 보이는 의외의 얼굴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끔 찾아오는, 아주 작은 잘못을 무슨 죽은 죄를 진 마냥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부녀자
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짓는다. 언젠간 그가 찾아오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신부의 눈에는 5년 전에
본 그 얼굴에, 약간의 주름과 굉장히 더럽게 자란 더부룩한 수염, 정리가 되지 않은 긴 머리가 더해진 남자가 자리하고 있다. 한밤중
에 찾아온 이 불청객은 그 외에도 온 몸에 땟국물 자국이 있는 데다가 색이 바랜 누더기를 입고 있어서 꼴이 꼭 부랑자와 같다. 그러
나 신부는 냄새가 날 법한데도 남자를 얼싸안으며 환영한다. 남자는 놀란 듯 했으나 얼굴 깊숙히 박힌 죄책감에 묻혀 표정으로 드러
나진 않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당신이 언젠간 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신부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성당 안으로 끌고 온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얼굴이다. 아니, 오히려 아까 보다 더욱 깊은 괴로움으로 이
젠 고개까지 땅을 향해 떨구고 있다. 그런 남자를 이해하는건지 모르는건지, 신부는 오래된 벗을 만난 마냥 즐거운 얼굴을 하며 제일
앞쪽 좌석까지 끌고 간 뒤에야 남자를 놓아준다. 신부는 남자를 자리에 앉게 하고, 저 앞 구석에 있는 작은 나무의자를 가져와 그의
맞은 편에 앉는다.
"자, 시작합시다. 고해성사를."
남자는 고해성사를 하자는 신부의 말에 놀란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본래 고해성사란 고해소에서 하는 것
이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신부는 그 것을 깨는 행위를 하고 있다.
"아, 너무 놀라지 말아요. 당신과는 얼굴을 맞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난 이미 당신이 온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옹색하게 굴진 맙시다."
신부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치 '그래, 이 남자는 언제나 이래왔지.'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신부의
말은 정확했다. 남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신부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젠 신부에게 죄를 고할 때가 온 것이다.
"흐윽!"
남자는 독특한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쉰 뒤, 입을 연다.
"추기경님은 역시 한결같으시군요."
"추기경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을. 이젠 그저 사제일 뿐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흐흐.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부님은 죄가 없지 않냔 말
입니다."
남자의 말에 신부의 표정은 작게 일그러진다. 이제는 서로의 표정이 바뀌어, 남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다소 즐거운 듯한 인상을 하
고 있다.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닐텐데요, 맥베스."
"그렇구말구요. 그치만 말입니다. 전 도저히 이 죄가 위대하신 신께서도 도저히 용서치 못할 정도의 중죄인 것 같단 말입니다. 그렇
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다시금 죄책감으로 물들어진다. 그런 남자를 쳐다보는 신부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습니다, 맥베스. 당신은 그저 젊은 날의 객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표출한 것일 뿐이에요. 나는 당
신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있어요. 인간인 주제에. 한낱 인간도 이해할 잘못을 신께서 용서치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고 신께 용서를 구하면, 그 분은 반드시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아뇨. 신부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이해하실 수 있는 것은 신부님이 위대하신 신에 비견될 정도로 성인군자이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일반인들은 제 죄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신께 용서를 받는다해도 전 죽을 죄를 지은 대역죄인이란 말입
니다."
이번 남자의 말에 신부의 표정은 굉장히 크게 일그러진다. 처음의 그 말보다도 신부의 화를 돋운 것이다.
"도대체가! 당신은 정말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군요, 맥베스. 최소한 내 앞에서라면 나를 그 분과 비견된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됐어요. 신격모독이라니!"
"죄송합니다, 신부님. 전 그저 신부님을 추켜세우려다가 그만……. 이번엔 정말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치만 말입니다. 다른 사
람들은 도저히 제 죄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건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내가 신을 따르는 사람이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야말로 정말로 죄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
도 물론 죄인이고요. 그러나 죄인이라고해서 타인의 죄를 이해해줄 수 없는건 아닙니다. 다만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뿐이에요."
"죄인이라니, 물론 신부님 말씀대로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긴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한 번 봅시다. 그래도 신부님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백 번 양보해 당신의 관점을 차용해 얘기해도 난 죄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진 않았습니다. 당
신을 죄인으로 만든 사람이 나라고 해도 당신은 날 성인으로 치켜세울 수 있을까요?"
남자는 크게 놀란 듯 약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신부는 남자를 누구보다도 아껴주고 이해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신부가 자신
을 죄인으로 만들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웃기지 마십쇼! 신부님이 나를 고발했다고요? 신부님이 가끔 남에게 무안을 주시는 것을 이해하긴 했어도 이건 정도가 지나치십니
다. 누굴 바보로 아시는 겁니까?"
"역시. 당신은 나의 다음 말을 들으면 더 화를 내겠군요. 당신을 고발한 것 뿐만 아니라 당신이 처음으로 반역을 마음먹게 한 것도 내
가 한 일입니다."
이번엔 충격에 휩싸인다. 화를 낼 정도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혼란. 남자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5년 전의
일을 생각한다.
맥베스, 당신 혹시 들었나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추기경님.
아직 소문이 거기까지 퍼지진 않았나보군요. 아니, 오히려 그 쪽에서 소문이 늦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최 이해가 안됩니다, 추기경님.
누군가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 그럴리가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지려 한다는 겁니다. 당신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군요.
저는 가 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그래요. 잘 가요, 맥베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맥베스는 생각했다. 지금의 불안한 정세라면 반역은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하더라도 안정을 찾으
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자신이 또 다시 전복시키고 권력을 쥘 수도 있
다. 그렇게 생각한 맥베스는 몇 개월 후, 자신의 부하들을 이용해 몰래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맥베스를 체포하러 군경이 나타난 것이다. 이유는 맥베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맥베스는 가까스로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떠돌이 부랑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평소 당신이 호기심이 많고, 망상을 자주 하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일을 저지르고 말더군요. 내 실수였습니다."
"그, 그치만 말입니다. 시, 신부님은 일부러 저를 속이려고 거짓말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정말로 그 비, 빌어먹을 크로커스
녀석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그, 그리고 신부님이 제가 반역하려는 것을 아, 아셨다면 당연히 고발을 하시는게 맞는 거구요."
남자는 이제 말을 더듬기까지 하고 만다. 이성으로는 이해하려 하지만, 본능은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잘 참아내고 있
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건 사실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걸 이해하려 하는 것이고요. 내가 아까 말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당신은 지금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고 하
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는게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후, 훈련이요?"
"그래요, 훈련. 내 죄를 더 말해 볼까요? 그레고리우스 왕과 나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롤랑 왕이나 앤 여왕도 마찬가지죠.
심지어는 내가 존경하고, 나를 사랑하던 아서조차도 왕실에서의 내 태도는 탐탁지않게 여기더군요. 그레고리우스 왕은 나와는 생각
이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반대를 했죠.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동생이
라는 것만으로 용서받기가 일쑤였지요. 롤랑 왕은 생각하기보다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와 자주 충돌했습니다.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나를 왕실 사제에서 박탈시켰지만, 그는교황에 의해 폐위되고 나는 다시 왕실 사
제가 되었습니다. 나는 왕에게 거역하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왕에게 거역
하다니! 이건 마치 신께 거역하는 것에 버금갈 정도로 중죄인 것입니다. 나는 그런 죄를 짓고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때요,
이제는 내가 성인으로 보이지 않겠죠?"
"예, 신부님이 더 이상 저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이제는 정말로 제 죄를 이해하고, 위대하신 신께 죄를
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께서 죄를 용서하시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죄를 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의 죄의 무게 만큼, 당신의 마음에는 신께 빚진 것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의 무게만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죄의 무게가 무거운만큼 당신이 살아갈 인생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걸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그걸 무사히 해낸다면 당신은 그만큼 성숙해질 수 있을 것입니
다. 반드시 잊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신부님을 찾아오길 잘 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난 그저 신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걸 당신에게 말해 준 것 뿐입니다. 당신도, 나도 신의 자식이니까요."
어느덧 새벽이 다가왔는지, 밖에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신부가 창 밖을 내다보니 멀리서 동이 트고 있다.
"이제 가 봐야겠군요. 신부님, 전 남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거긴 르네상스인지 뭔지가 유행이라더군요. 그 곳에서라면 새 인생을 시
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신부님이 그러셨죠. 제가 차라리 문인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저는 거기서 글을
써 볼까 합니다. 신부님도 같이 가시면 좋겠지만, 역시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지요."
"아무래도 난 이 성당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치만 말입니다. 신부님도 마음이 바뀔 때도 있을 것 아닙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물론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 와보긴 하겠습니다."
"그래요. 이제 새벽 미사를 드릴 시간이 다가오니 가는게 좋을 것 같아요."
신부는 남자와 함께 문 밖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밤새 쌓였는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남자는 신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성당을 떠난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신부는 과연 그가 올 지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새벽 미사를 올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쌓인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 작가후기
다소 종교적인 요소를 많이 사용했습니다만, 저의 생각일 뿐 특정 종교의 생각은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조아조아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 달아줬네 ㅋㅋ 감사. 언급해준 부분은 대화를 강조하고자 했어. 대화에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종결어미는 최근에 바꾼 특징인데,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한테 영향을 좀 받아서..
네, 잘 봤습니다. 앙스님 소설을 제대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종교적인 요소가 많이 나오긴 하네요 ㅋㅋ 그리고 시대 배경은 근대 초기쯤 되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