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61)
<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1 > 장상헌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특히 트롯이 오늘날 황금기를 구가하는 기반이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
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온 남진과 나훈아라는 세기의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한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두 가수의 라이벌 대결을 세편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고자 하며,오늘은 우선 남진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남진(본명 김남진)은 1945년에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 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상당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당시 경찰관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제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하였다 한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하였으며,목포고등학교에 다닐때는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하여 영화배우로써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런가운데 약2년간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노래로 데뷔하였으나 히트를 하지는 못하였고, 1967년에 박춘석 작곡의 ‘가슴 아프게’가 대히트 하면서 톱가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1968년도에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하여 월남전 참전후 1971년에 전역하여 ‘마음이 고와야지’ ‘님과 함께’ 등이 공전의 대히트를 하면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나훈아와 함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게 되었다.
그때의 남진에 대한 열광적인 인기에 관하여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1975년 4월에 경남 창녕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열광적 팬인 7명의 아가씨가 산에서 진달래꽃을 무더기로 꺽어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는바, 그 아가씨들은 산림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인기가 폭발하던 그 시절에 인기연예인에게 늘 따라다니는 소위 말하는 ‘썰’에, 남진이 적자가 아닌 서자라는 얘기도 떠돌아 다녔으며, 김종필의 부인인 박영옥과 염문설도 떠돌아 다녔으나, 이러한 루머가 구체적인 사실로 확인된바는 없었다.
이와 같이 인기연예인이 루머에 시달리는 것은 그 인기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의 최대 라이벌인 나훈아가 개그맨 황기순의 부인 및 배우 김혜수 김선아 등과 염문설에 휩쓸려 고생하였던것처럼...
한편 그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여러번 캐스팅되어 약 60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그 가운데 ‘그리움은 가슴마다’ 등은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성기인 1976년에 가수 윤복희와 결혼하면서 장안의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유명인이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파격적으로 남자인 남진은 초혼인데 반하여, 여자인 윤복희는 가수 유주용과 이혼후 재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도 3년뒤인 1979년도에 가정폭력이 문제가 되어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1980년에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남진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이때 그는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강정연과 재혼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때 미국으로 강제 이민을 가게 된 이유에 관하여 시중에서 떠돈 이야기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사형을 언도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김대중을 따르는 사람들이 술 한잔하면서, 그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의 첫소절을 변형하여 “당신과 나사이에 두환이만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이라고 노래를 불러댔다.
물론 여기서 당신, 나, 두환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한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에 안기부에서 개입하여 남진을 국내에 그대로 두면 곤란할것 같다하여 그를 강제출국시켰다는 얘기들이 떠돌았으나,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몇년간 그는 미국에서 지내다가 1982년 ‘빈잔’이라는 노래로 컴백하였고, 이후 ‘둥지’ 나야 나’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는 한편,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하튼 그는 젊은 시절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나훈아와 함께 한 시대를 양분하였던 슈퍼스타이며,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편에는 남진의 필생의 라이벌인 나훈아의 생애와 활동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