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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너스클럽(http://cafe. daum.net/runners, 이하 런클)은 회원이 2만6천여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마라톤 동호회다. 런클에선 ‘브라운 상’이란 것을 제정하여 매년 송년 모임에서 시상하고 있다. 브라운 상이란 지금은 미국에서 생활하는 유 브라운이라는 회원이 만든 것으로, 처음 서브3를 달성한 회원에게 기념패 등을 시상하는 제도이다. 요즘은 브라운 상의 수상 요건이 약간 완화(?)됐다. 풀코스에서 남자는 2시간59분59초 이내, 여자의 경우 3시간29분59초 이내의 기록을 그 해에 처음 달성한 회원뿐 아니라 서브5(풀코스를 5시간 이내에 완주)와 서브4(마찬가지로 4시간 이내에 완주) 기록자 중에서도 각각 1명씩 수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런클 회원들에게 브라운 상의 의미는 각별해서, 런클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상을 받아 봤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춘천 마라톤서 거의 꼴찌로 골인 2005년 브라운 상 시상식은 런클의 송년 모임일인 지난 12월 26일에 열렸다. 이날 브라운 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7명. 문종호·김순홍·전치영·박정구·장호동씨는 모두 처음으로 서브3를 기록해 상을 받았다. 또 한 명의 남자 수상자인 김황태씨는 감전 사고로 양팔을 잃었지만 삶의 의지와 웃음을 잃지 않았고, 또 달리기도 열정적으로 즐겨서(풀코스 최고기록 3시간19분10초) 상을 받을 수 있었다. 6명 모두 이야깃거리가 많은 러너들이었지만, 이날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아무래도 홍일점 수상자였던 장명희(41)씨였다. 2005 춘천 마라톤을 6시간32분11초에 완주한 그녀는 기록만 봐서는 수상자가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런클 집행부는 시상 이유를 기록이 아닌 그녀의 ‘도전 정신’에서 찾았다. ‘2004년 암 수술을 했고, 투병 와중에 투혼을 불살라 춘천 마라톤에서 생애 첫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 투혼이 모든 런클 회원들에게 귀감이 되는 자랑스러운 런클인이다. 마라톤으로 반드시 암을 이겨낼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 그녀에게 영광스러운 상을 주는 이유였다. 상을 받으며 그녀는 “춘천 마라톤 기록집을 보니 순위가 끝에서 11번째이던데, 내로라하는 분들과 함께 상을 받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달리면서 클럽에 누가 될까봐 런클 교복(유니폼) 입는 걸 망설였는데, 그래도 잘 입었던 것 같습니다. 런클 회원인 것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조기 검진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건강에 자신하지 마시고, 정기적으로 검사 받으면서 하고 싶은 달리기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회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런클 회원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고통스러운 수술과 치료 과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술 보름 전 풀코스 대회 참가 2004년 8월 13일, 그녀는 서울마라톤클럽이 주최한 혹서기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과천 서울대공원 외곽을 달리는 풀코스 단일 종목인 이 대회를 그녀는 완주하지 못했다. 날씨도 무더웠지만, 32km를 달리자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왼쪽 젖가슴 부위를 만질 때마다 잡히는 멍울이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아들과 딸, 두 자녀에게 모유를 먹인 영향인가 싶었다. 멍울만 느껴질 뿐 감기도 한 번 안 걸린 데다가 특별히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서기 마라톤을 끝까지 뛰지 못하자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듯싶었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8월 17일, 아주대 부속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청천벽력 같았다. 유방암이었고, 이미 진행이 많이 돼 3기라는 것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싶은 생각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도 엄습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좌절만 하고 있기엔 성격이 너무 낙천적이었다. 검사 뒤 며칠이 지나자 “괜찮을 거야. 죽는 일 같은 건 안 생길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술 날짜는 9월 1일로 잡혔다. 당시 대한생명 안양 영업국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수술 직전인 8월 말까지 일하다가 사표를 냈다. 그러고 찾아온 9월 1일. 그녀는 오전 9시에 수술실로 옮겨졌다. 수술은 예정보다 길어져 오후 5시경에 끝났다. 수술을 하다보니 암세포가 왼쪽 젖가슴에만 자리잡은 게 아니라 오른쪽 젖가슴과 왼쪽 임파선에까지 전이돼 양쪽 젖가슴과 임파선을 모두 절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실에서 병실로 옮겨질 때 그녀는 잠깐 의식을 찾았다. 그러나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눈을 떠보니 입에는 산소 호흡기가 끼워져 있었고, 팔에는 링거 주사가 꽂혀 있었다. 가슴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는데도 가슴이 허전한 게 아니라 가슴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은 듯 숨쉬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눈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이 붕대로 칭칭 동여매여 있었다. 이젠 어쩌나, 싶은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로부터 양쪽 가슴을 모두 떼어 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이젠 괜찮을 것”이라는 의사들의 말을 전해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여성의 상징인 젖가슴이 없으니 이제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는 상실감을 이기기 어려웠다. 낙담할 때마다 가슴의 통증은 더 커졌다.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면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단추를 눌렀다. 그러면 링거에 딸려있는 무통 주사액이 투입되면서 그녀는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보다 더 힘든 항암 치료 9월 28일 병원 문을 나섰다. 암은 퇴원한다고 해서 싸움이 끝나는 병이 아니었다. 항암 치료라는, 수술보다 더 지독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동안은 4주마다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때는 이틀 동안 입원해야 했다. 치료를 받으며 항암 주사를 맞으면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임신부가 입덧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또 뼈 주사를 맞으면 온갖 관절이 마디마다 아팠다. 이런 상태로 1주일 동안을 빌빌거리며 지내야 했다. 시간은 잘도 흘러 추석이 돌아왔다. 친정 아버지는 그녀가 수술 받기 전 해인 2003년 12월 돌아가셨다. 췌장암으로 진단 받은 지 한 달 만이었다. 추석날 아버지 산소로 벌초를 갔다. 성묘를 하는데, 친구처럼 지내는 딸(나래)이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 흰머리가 왜 이렇게 갑자기 많이 생겼어?” 그러면서 그녀의 흰머리를 뽑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흰머리를 뽑던 딸이 스톱 버튼을 누른 영화 화면처럼 동작을 멈춰버린 것이었다. “나래야, 왜 그러니?”라며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딸의 손아귀에 가득 잡혀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흰머리만 뽑으려고 했는데, 추풍낙엽처럼 다른 머리카락들까지 우수수 빠졌던 것이다. 딸이 놀랄 수밖에. 말로만 듣던 항암 치료의 후유증을 보며 그녀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바로 가발 가게를 찾았다. 그녀의 머리에 맞을 성싶은 쇼트커트형의 가발을 고르자 주인이 머리를 밀어 주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스님처럼 삭발한 웬 낯선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 버리자 희한하게도 그녀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머리 아픈 증상이 없어지자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가슴도 한쪽만 있으면 얼마나 괴물 같겠어. 차라리 양쪽 다 없는 게 낫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 ‘덜 괴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직까지 대중목욕탕이나 찜질방에 갈 용기를 내진 못하고 있다. 이제 수술한 지 1년이 좀 지났다. 유방암은 수술하고 5∼10년이 흘러도 재발 안 하면 완치됐다고 한다. 그러니 완치 판정을 받으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설령 재발 안 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 요즘도 3개월마다 병원을 찾아 초음파와 뼈 검사를 실시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이 결정됐을 때 그녀는 의사들에게 ‘웃기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제가 달리기하는 데 수술해도 지장 없나요?” 병보다도 달리기를 더 걱정하는 어이없는 환자에게 담당 의사는 “괜찮다. 수술 뒤에는 오히려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그녀 또한 처음엔 달리기라는 힘든 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평소 체중 62kg으로, 마르고 왜소해 본 적이 없던 그녀에게 달리기는 칼 루이스나 이봉주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운동이었다. 런너스클럽과의 만남 직장에 다닐 때 그녀는 이메일을 통해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잘 받아 봤다. 그런데 토요일만 되면 ‘오늘도 아마동은 모입니다’라는 암호 같은 메시지가 떴다. 내용을 알아보니, ‘아침편지’를 받아 보는 사람들 중에서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토요일이면 잠실에서 어김없이 모인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궁금해 나가본 게 2003년 10월이었다. 모임에 나가보니 사람들 얼굴에 활력이 넘쳤다. 가정과 회사 일로 지쳐있던 그녀, 자신만을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그녀에겐 바로 그녀가 찾던 돌파구로 보였다. 그러나 아마동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 11월,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발병 한 달 만에 눈을 감으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신나는 달리기 모임”이라면서 런클을 소개해 주었다. 이미 ‘달리기를 통한 활력’을 맛본 그녀는 집(경기도 수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모임을 갖는 런클의 ‘과천 화달’(화요일 달리기 모임)에 가입했다. 2004년 1월 4일의 일이었다. 본명보다 닉네임으로 소통하는 클럽의 특성상 그녀는 ‘제이’라는 별칭을 지었다. 영문(英文) 성(姓)에서 첫 글자만 따온 것이었다. 과천 화달은 주로 서울대공원 부근에서 운동한다. 서울랜드와 서울대공원 이용객들은 주로 코끼리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 코끼리 열차가 한 바퀴 돌면 거리가 약 2.1km가 된다. 그녀는 처음에 이 코스를 한 바퀴도 달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두세 바퀴쯤은 거뜬히 돌 수 있게 됐고,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면서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마라톤대회에는 런클 가입 석 달 뒤인 2004년 4월에 처음 참가했다. 10km 종목이었다. 그로부터 매달 한 번씩은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그 해 춘천 마라톤을 신청해 놓은 상태에서 암 수술을 받아 첫 풀코스 완주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회수 차의 달콤한 유혹 수술 받은 이듬해인 2005년 10월 23일 오전 11시, 그녀는 드디어 춘천 종합운동장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춘천 마라톤에 참가 신청을 했고,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다. 가족들도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대회장에 들어서니 기분이 한껏 고조됐다. 무사히 결승점을 밟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고비는 32km 지점에서 찾아왔다. 주변의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다리가 풀려 도저히 계속 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엔 함께 뛰어주는 동료라도 있었지만, 그녀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동반주 해줄 사람도 없었다. 혼자 뛰다보니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통 통제는 이미 풀려 있었다. 인도로 달리는 그녀를 회수 차가 계속 따라왔다. 대회 관계자는 “이제 그만 차를 타라”고 권유했다. 달콤한 유혹에 마음이 여러 차례 흔들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다리로 결승점을 통과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드디어 6시간32분 만에 춘천 종합운동장에 다시 들어섰다. 진행 요원도 몇 명 안 보이고, 기념 사진을 찍어주는 카메라맨도 이미 철수했지만, 그녀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를 마중나온 어머니와 딸을 보면서 “어떤 시련도 이겨내겠다”는 결연한 마음이 들었다. 춘천 마라톤 완주는 ‘암과의 전의’를 북돋우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은 대회에 참가하며 건강을 다지겠다는 그녀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녀1남의 맏이다. 서울 염광여중과 염광여상을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83년부터 대한생명에서 근무했다. 결혼은 25세에 했다. 중매로 만나 3개월 보름 만에 결혼식을 올린 남편(김석호)은 그녀보다 네 살 위로, 건설회사에서 근무한다. 남편의 취미는 그녀와 달리 정적인 바둑. 부부의 취미가 같아야 대화가 많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게 열심히 달리기를 권유하는 중이다. 남편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그녀가 달리는 데 대해 “무리하지만 말라”는 쪽이다. 아들(승현·중3)과 딸(나래·중1)은 혹시라도 병세가 악화될까 봐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려는 그녀를 말릴 때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달리기를 그만둘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안 겪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암 수술이라는 극한 경험까지 해봤고…. 제게 달리기가 없었다면 이런 시련이 닥쳤을 때 쉽게 무릎꿇었을 겁니다. 달리기를 통해 시련을 이겨냈듯, 앞으로도 마라톤을 통해 더 여유 있게 살면서 건강하게 가정을 유지하고 싶어요.” 그녀의 달리기 목표는 기록 단축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다.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
첫댓글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선 찡허네요^^*
`제이`대단하오. 당신은 신이 주어진 날을 멋지게 사시는구려. 신은 극복 할 수 없는 시련은 주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겁니다. 마라톤으로 승리하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제이` 화이팅, 화이팅. 제가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차운선회원님, 마음 뭉틀한 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글을통해 많은것을 느낌...열심히마라톤할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