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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幕之地, 석막(石漠)의 땅(地),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2022년 10월 04일
○ 『석막(石幕)』이란 무슨 뜻을 내포(內包)하고 있는 단어(單語)일까? ‘네이버한자사전’을 찾아보면 :
➊ 『石幕』 : 『땅 이름. 함경북도 부령(富寧)의 옛 이름. “富寧”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령(富寧)”이란 또 뭘까?
➋ 『富寧』 : 『부(府) 이름. 함경북도 부령군 지역에 있었다. 본래 경성군(鏡城郡)의 석막성(石幕城) 지역이었는데, 조선 세종(世宗) 31년(1449)에 부거현(富居縣)과 회령부(會寧府)의 땅을 떼어 붙여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로 삼았다.』고 하였다.
즉(卽), 『경성군(鏡城郡)의 석막성(石幕城)』을 말하는 것이다. 뒤에 이곳을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로 만들었다는 것이니, 결국(結局) “석막(石幕)”이란 곧 “땅 이름(地名)” 을 말하는 것이다.
땅의 이름 즉(卽) ‘지명(地名)’이란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석막(石幕)”이란 무슨 뜻인 건가? 그냥 아무 곳에나 만들어본 이름일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 “결과론(結果論)”적인 이야기지만, “석막(石幕)”이란, “석막(石漠)”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대사막지대(大沙漠地帶)에 있는 “특이(特異) 사막(沙漠)”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따라서 『반도(半島) 땅에 “석막성(石幕城)”이란 곳은, 존재(存在)할 수가 없다.』 지명(地名)의 근원(根源), 연유(緣由), 고사(古事), 전고(典故)등이 반도(半島) 땅에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게 요점(要點)이요, 핵심(核心) 포인트(Point)다.
본래(本來)의 『대륙(大陸)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지명(地名)을 차용(借用)하여 만들어 놓은 말 그대로 “짝퉁 지명(地名)” 일 뿐이다.』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1) 新增東國輿地勝覽 50권 / 咸鏡道 富寧都護府 : 〈본시 경성군(鏡城郡)의 석막(石幕)의 땅이다【本 鏡 城 郡 石 幕 之 地】〉라고 하였다.
이곳에 살고 있었던 백성(百姓)들의 성씨(姓氏)를 들여다보면, “성씨(姓氏)들의 백화점(百貨店)”과 같다. 과연(果然) 가능(可能)한 일일까? 당시(當時) 그곳에 얼마나 많은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성씨(姓氏)들이 존재(存在)했다는 것일까?【姓氏 / 孟, 金,姜,宋,白,權,劉,李,申,朴,崔,鄭,徐,曺,扈,南宮,張,朱,韓,甘,邕,裵,康,盧,兪,吳,蔡,梁,黃,鞠,廉,薛,辛,庾,郭,延,趙,孫,玄。竝來。童,崔,李,金。竝投化】 모든 것이 이해(理解)될 수 없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얘기로 점철(點綴)된 것이 조선사(朝鮮史)다.
‘제영(題詠)’ 편을 보면 : 《路入胡沙天盡頭 :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 간 데로 들어간다. 박맹지(朴孟智)의 시에,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 간 데로 들어가는데, 남쪽과 북쪽으로 분주히 말달리는 것 언제나 끝나려는고. 10년 동안 글과 칼을 배운 뜻을 가지고, 전쟁에 격문을 쓰고 남는 여가를 이용하여, 원유 편(遠遊篇)을 더 지어 보네.” 하였다. 題詠 / 路入胡沙天盡頭 。朴孟智詩:云云,馳驅南北幾時休?却將書劍十年志,草檄餘閑賦遠遊》
➤ 딱 맞는 말이다. “석막성(石幕城)의 땅이 호사[胡沙 : 오랑캐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길”이란 뜻이다. 즉(卽) 『“석막(石漠)은 곧 석막(石幕)이니 사막지대(沙漠地帶)에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가 있었다.”』는 뜻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이르기를 : 《현(縣)의 서(西)쪽 산(山)에는 옛 무덤이 만여(萬餘) 개가 있고 모두 석곽(石槨)인데, 어느 시기(時期)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게 대단(大壇)한 기록(記錄)이라고 할 수 있다. 석곽(石槨)을 발굴(發掘)해 보면, 엄청난 역사(歷史) 유물(遺物)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나 이건 불가능(不可能)하다. 한반도(韓半島) ‘석막성(石幕城)’에는 이런 유적(遺跡)이 존재(存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짝퉁 지명(地名)”이기 때문인데,
《현(縣)의 서(西)쪽 산(山)에는 옛 무덤이 만여(萬餘) 개가 있고 모두 석곽(石槨)인데…》 라는 말은, 비로 ‘석막(石幕)=석막(石漠)’과 통(通)하는 말이다. 즉(卽) “석막(石漠)=석막(石幕)”이란 ‘돌(石) 밭으로 이루어진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석막(石幕)은 석막(石漠)이다
○ 석막(石幕)이란 의미(意味)가 무엇일까? 이게 핵심(核心)이다. 우선(于先) “막(漠)”은 “막(幕)”과 같은 말로 “사막(沙漠)”을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와 같다.
(1) 〈대막(大漠)은, 즉(卽) 대막(大幕)이다. 사막(沙漠)은, 사막(沙幕)이다.〉라고 하였다. 즉 사기(史記)열전(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즉(卽),
《史記列傳 / 蘇武 : 陵 起 舞 ,歌 曰 :「徑 萬 里 兮 度 沙 幕 ,為 君 將 兮 奮 匈 奴。路 窮 絕 兮 矢 刃 摧 ,士 眾 滅 兮 名 已 隤 。老 母 已 死 ,雖 欲 報 恩 將 安 歸! :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사막(沙漠)이란 사막(沙幕)과 함께 쓰이는 말이며, 대막(大漠)은 또 대막(大幕)』이란 뜻이다.
前漢書 卷6, 武帝紀 第6 :《夏四月,衛青復將六將軍絕幕大克獲【注 : 應劭曰:幕,沙幕,匈奴之南界也. 臣瓚曰:沙土曰幕.直度曰絕. 李陵歌曰,徑萬里兮渡沙幕.】》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막(幕)”이란 “사토(沙土) 즉(卽) 모래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면 : 〈대막(大漠)은 대막(大幕)이요, 사막(沙漠)은 사막(沙幕)과 같은 것이며, 석막(石漠)은 석막(石幕)과 같다.〉 이해(理解)가 되리라 여겨진다.
(2) ‘석막(石漠)=석막(石幕)’이란?
讀史方輿紀要 石漠 : 《石漠在塞北.自陰山而北,皆大漠也.其間有白漠,黑漠及石漠之分. : 석막(石漠)은 새북에 있다. 음산(陰山)의 북(北)쪽은, 모두 대막(大漠)이다. 그 사이에 백막(白漠)[흰모래사막], 흑막(黑漠)[검은 모래사막]과 석막(石漠)[자갈로 이루어진 사막(沙漠)]으로 나누어진다. 白、黑二漠,以色為名,石漠以地皆石磧而名。: 흰(白), 흑(黑)의 두 사막(沙漠)은 땅의 색깔이 이름이 되었는데, 석막(石漠)은 땅이 모두 석적(石磧)이므로 이름이 된 것이다. 白,黑二漠間.白漠蓋在黑漠西也.亦謂之大磧. : 백막(白漠), 흑막(黑漠)의 두 사막(沙漠)사이인데, 백막(白漠)은 모두 흑막(黑漠)의 서(西)쪽이며, 또한 대적(大磧)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서역(西域)편에서는, ➊ 대적(大磧) 지대(地帶)는 천산북로(天山北路)의 북(北)쪽 지대를 이르고 있으며, ➋ 적중(磧中)지대에 사타(沙陀)가 있었고, 사타(沙陀)란 “모래언덕”이라고 하였다. 이에 「적중(磧中). 적북(磧北). 적서(磧西)」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 하였고, ➌ 음산(陰山)이란,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두 번째 큰 뫼(峰)인,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 또는 가장 큰 뫼(峰)인, 한등격리산(汗騰格裡山 : 6,595m)을 말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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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막(石幕)=석막(石漠)’이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다?
○ 블랙코메디(Black Comedy) 장르(genre)에서 벌어지는 웃기는 역사해설(歷史解說), 그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꿈(몽:夢)’스러운 이야기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막(大漠) 곧 큰 사막(沙漠)으로, 세 종류(種類)로 구분하는데, 곧 『백막(白漠). 흑막(黑漠). 석막(石漠)』이다. 이 모두는 “대막(大漠)”지대에 있으며, 사막(沙漠)에 있는 모래(沙)나 땅(地)의 색깔로 구별(區別)했는데, “석막(石漠)=석막(石幕)은, 자갈이 많은 사막(沙漠)지대를 일컫는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성군(鏡城郡)’ 땅은 ‘큰 사막(沙漠)’에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석막성(石幕城)이 있는 땅은,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진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어, 땅의 이름(地名)을 아예 “석막(石幕)”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위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석막(石漠)”편에서 이르기를 : 『음산(陰山)이북(以北)에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으며, 그곳에 석막(石幕)도 있다』라고 하였다.
➤➤➤ 그렇다면 ‘경성군(鏡城郡)과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바로 『음산(陰山)이북(以北)』에서 찾아야 함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음산(陰山) : ‘구장춘(邱長春) 서유기(西遊記)’에서는 박격달봉(博格達峰 :5,445m)을 말한다. 이러 미뤄보면 : 천산산맥(天山山脈) 이북(以北)지방이 대사막지대(大沙漠地帶)였다는 뜻이다.
○ 이러한 “옛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에 대한 이해(理解)”는, 모두 국민(國民)들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論理) 및 논거(論據)에 대해 신뢰(信賴)를 하든, 신뢰(信賴)할 수 없다고 하든, 이건 모두 국민(國民)들의 몫이란 이야기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선인(先人)들이 자신(自身)들의 선조(先祖), 조상(祖上)이라고 하면서 진본(眞本)도 아닌 1970-80년대의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족보(族譜)라고 자랑하며 “아무개, 뭐 뭐가 내 몇 대 할아버지다.” 라고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인사(人士)들이 주변(周邊)에 많다. “그때 같았으면 넌 죽었써?” 물론(勿論) 농담(弄談)이지만 이런 말도 하는 자(者)가 있다.
그러면서도 옛 조상(祖上)이 어느 곳에 세가(世家)가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 그저 만들어진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수백(數百)년을 세가(世家)로 있었다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이야기에 흡뻑 빠져 있을 뿐이다. 이 땅에 수백(數百)년을 이어온 양반(兩班)이나 문중(門中)이 있다고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한다. 허나 자세(仔細)히 그것을 들여다보라!
무슨 재주로 수백(數百)년을 이어올 수가 있었겠는가? 이건 국민(國民)들을 속이는 행위(行爲)와 같다.
생각해 보자. 한반도(韓半島)! 이 땅에서 정승(政丞), 판서(判書), 대감(大監)이니 하는 분들이 살면서 정무(政務)를 봤을까? 그들이 정무(政務)를 보아야 할 곳은 ‘왕성(王城)’이며, 한반도(韓半島) 땅에는 ‘왕성(王城)이니 도성(都城)’이란 곳 자체(自體)가 존재(存在)할 수 없다. “필요(必要)에 의해 20-21세기(世紀)에 세트장으로 만들어진 것 들 뿐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궁궐(宮闕)이라는 곳을 잘 보라. 그 곳에서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궁중(宮中)사람들이 복작대며 살아가려면 무엇이 가장 먼저 필요(必要)하고 무엇이 가장 많았을까?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면 가장 잘 있을 것이다.
➤ 〈오늘날의 서울(Seoul)에 있는 ‘궁전(宮殿)=궁궐(宮闕)’이라는 이름의 건물(建物)들은 필요(必要)한 자(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트 장‘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영화(映畫)를 촬영(撮影)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트 장“을 그려보면,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그저 ”세트 장“에 불과(不過)한 것들이다.
국민(國民)들, 스스로 사고(思考)의 전환(轉換)과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필요(必要)하며, 사회(社會)는 늘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을 필요(必要)로 하는 것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썩는 일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판단(判斷)은, 국민(國民)들 각자(各自)의 몫이다.
2022년 10월 04일 [글슨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