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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선생님 이야기마당
- 몸과 마음과 차 2회차 직립 보행자(直⽴步⾏者)와 꿈 - 몸과 생각의 대화 (1부)
(2026.07.28)
1. 왜 ’인간’이 아니라 ’직립 보행자’인가?
오늘 드릴 말씀은 지난번에 이어서, 제가 사람을 굳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또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휴먼이라고 부르지 않고 직립 보행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과거 역사에서는 인간이라고 불리던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다르게 불리던 인간이 공존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과 신, 그리고 신약에서 보이는 신은 다른 존재예요. 구약에서의 하느님 또는 신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신이지 하느님은 아니에요. 야훼(YHWH-히브리어)는 신으로 번역돼야 되지 하느님으로 번역되면 안 돼요. 어느 시기에 인간이 문명화됐을 때 초고도로 먼저 문명화된 종족이 소수 있었고, 아니 극소수 있었고, 그리고 문명화가 진행되지 못한 종족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죠.
2. ’신(神)’이라는 이름의 기원
그 절대다수의 문명과 극소수의 문명 차이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중국의 일부 소수 민족, 즉 지금도 풀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가리고 있는 종족과, 상하이에서 구걸조차도 위챗페이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차이가 과거에는 더 심하게 있었다는 거죠. 지금은 위챗페이로 거래하는 중국인이 다수이고 문명과는 거리가 멀게 존재하는 소수 민족들이 극소수지만, 과거에는 반대였던 거죠. 과거에 문명화된 사람들은 소수 중에서도 극소수, 0.001%가 안 될 정도로 극소수고, 점점점 넓어져 가죠.
그때 문명화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극도로 문명화됐던 사람들을 부르던 이름이 신(神)이었어요. 신이라는 말은 원래 비문명적인 존재 상태로 있던 분들이 문명적인 상태로 있던 분들을 일컫는 칭호였던 거죠. 그래서 구약의 신은 그런 신이에요. 신약의 신은 다른 신이에요. 그냥 우리가 하느님으로 번역해도 되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보면 구약과 신약은 완전히 다른 거죠.
3. 인간의 본능은 집단적 지성이다
아무튼 그 얘기를 드리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두 갈래가 있을 때 어느 쪽을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면은, 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문명 인자를 말하는 것인지 과거의 문명의 범위 밖에 있던 대다수를 일컫는 말인지 불분명할 수 있어서 오늘 그냥 ‘직립 보행자’라고 표현한 겁니다. 크게 보면 인간입니다.
근데 직립 보행자를 얘기하자 그러면, 제가 이런 얘기를 했었죠. “모든 동물은 자기들만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본능 없는 존재가 없죠. 사람들은 약해지고 있다고 표현하는데 본능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본능은 그 존재답게 늘 평균값으로 존재하죠. 단, 인간은 그 본능이 집단적 지성과 그 수용이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집단적 지성이라는 게 별도의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종적(種的)인 본능이라는 뜻이죠. 집단 지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적인 동물이라는 거죠.
4. 의(意)와 지(志) — 점과 선분
인간은 왜 지적인 동물이 되었고, 지적인 동물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특징이 생겼을까? 그게 오늘 꿈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진화의 과정 속에서 뇌의 용량이 늘어나요. 뇌의 용량이 늘어나면서 이상한 일이 생겨요. 다른 동물들은 우리가 생각이 없다고 표현할 때가 있죠.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생각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한자로 한번 써 볼게요. 오랜만에 쓰네요. ‘의지(意志)’라는 표현을 우리가 쓰죠. 의지라고 해서 그냥 뜻이라고 하죠. 뜻의 뜻지!
사실 의(意)와 지(志)는 완전히 다른 글자예요. 동물들도 다 의(意)는 있어요. 몸에서부터 하나하나 반응해요. 맛보고 만지고 듣고 보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의(意)예요.
그러니까 ʻ이 맛 긍정적이네’, ʻ이 맛은 어…’ 인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신경 단(端)에서 이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어떤 일어남을 의(意)라고 불러요. 그런 동물들에게 지(志)가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의만 있다 보면, 이게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지라는 건 뭐냐 그러면, 이런 (의)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구조를 갖추는 거예요. 이 의가 점이라면, 생각을 할 때 하나의 기본 요소인 점이라면, 이 지는 선분(線分)이에요. 선분이 되어서 하나의 정보가 된 것을 우리는 한자로는 지(志)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지라는 것은 이 의가 모여서 선분을 이루고, 이 선분이 하나의 정보가 될 때 지라고 부르는 거죠.
5. 지(志)로 사는 존재가 되다
근데 이렇게 지가 되는 이유. 이 지(志)를 가지고 인간은 뇌 용량이 늘어나고 뇌의 구조가 바뀌고, 즉 뇌의 회로가 바뀌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이 선분의 점인 의(意)가 선분인 지(志)가 되는 거죠. 이 지를 가지고 살게 되는 상황이 뇌 용량, 뇌 구조에 의해서 인간에게 변화를 가지고 오죠.
그 순간 인간은 상대적으로 정보화된 지를 갖고 사는 존재로 바뀌는데, 이것이 인체에 있어서는 엄청난, 동물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의(意)를 중심으로 사는 동물의 경우, 지(志)라는 면 또는 앎이라는 면에서 보면 생각이 없어 보이죠. 우리가 미촉법(味觸法), 안이비설신의(眼⽿鼻⾆⾝意) 할 때 이 모든 것들의 작용이 다 의(意)인 거죠.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생각의 단위, 이 단위 속에서는 몸이 움직이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순이 발생하지 않아요. 이게 일어나는 대로 실행하고 일어나는 대로 반응하고, 이 일어남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대응해 가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선분(線分)을 갖춘 지(志)가 움직이는 존재가 되잖아요. 이 순간 변화가 와요.
6. 몸 안의 무수한 중생, 그것이 의(意)다
이 의(意)의 작용에 대해서. 지금 몸의 작용이죠. 이 의라는 건, 불경에 이런 말 나오죠. “내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들어서 무수무변무량(無數無邊無量)한 중생(衆⽣)들을 구제하리라.” 그 무수무변한 중생들은 바로 이 의(意)예요.
내 안에 혹은 내 밖에 있는 수많은 삶이 중생이 아니라, 거기에서는 내 안에 있는 수억 또는 그 이상에 이를 수 있는 세포들이 다 중생이에요. 그들이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죠. 그 이야기가 의인 거죠. 그래서 “이 의를 다 멸하리라”, 아니면 “건지리라”. 그때 무수한 그 중생의 작용이 바로 의인 거죠.
이 의가 어느 날 지(志)로 전환이 됩니다. 뇌 용량에 의해서, 뇌 구조에 의해서. 뇌 용량으로 친다면 뭐 한 300cc밖에 안 되던 용량이, 네안데르탈인으로 넘어가면 1,400cc를 넘어가잖아요. 근데 용량만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가 존재하죠. 회로의 구조 문제죠. 그래서 날레디(Homo naledi)는 700cc밖에 안 되는데도 네안데르탈인보다도 더 앞선 생각을 하잖아요.
7. 의와 지 사이에 흐르는 강
그렇게 가요. 그러면 이때(志)부터는 이것(意)이 묻히기 시작해요. 어느 순간 지(志)를 갖고 살게 돼요. 그리고 이 정보를 가지고 살게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정보를 가진 지적 운동을 하는 존재인 거죠. 이 순간 인간에게는 복잡한 일이 벌어져요.
이 의(意)가 일어나는 것이 어디에선가 차단이 돼요. 직접 내 행동을 결정하는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단위가 아니라, 이미 무언가를 통해서 자기를 호소하지 않으면 실행을 할 수 없는 단위가 돼 버려요. 굳이 이걸(지) 생각이라는 걸로 간다면, 이런 뜻이 생각으로 간다면, 생각과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意 사이에 간극이 점점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더욱더 지적으로 전환하면 할수록 그 간격은 커지거나 심지어 끊겨요.
현대의 많은 고도의 지식인들, 어쩌면 지식의 범위에 갖춰져 있다는 전제하에 많은 지식인들은 거꾸로 이 의의 작용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없다고 여기거나, 별것이 아닌 그냥 감각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죠. 그만큼 간격이 커지면, 이 간격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의(意)와 지(志) 사이에는 큰 강이 흘러요.
이 강을 어떻게 메우느냐? 이 강을 메우는, 서로 협상하고 서로 달래고 가끔은 호소하고 가끔은 협박하는 그러한 작용들이, 그런 상호작용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 작용이 안 일어나면 의와 지 사이의 간극이 메워지질 않는 거예요. 이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그 진행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 때는 지를 가지고 살잖아요.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밥 먹다가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그 어느 순간에도 지를 벗어나질 않아요. 그렇죠, 지에 의해서 살아요. 지가 아닌 다른 것의 호소를 들을 틈이 없어요.
8. 낮은 지(志)의 시간, 잠은 대화의 시간
그 호소는 志를 중심으로 생활하지 않는, 노동이라든가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좀 여유를 가지는 시간에 일어나요. 그러나 그 시간마저도 이 지의 연장선에 있는 경우가 많아요. 집에 돌아오죠. 뭐 노트북을 펴든지 태블릿을 펴든지 핸드폰을 보든지 TV를 보든지, 다 지적인 작업에 의해서 시간이 이어져 가요.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시간이 자는 시간이에요. 잘 때, 자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나무들이 낮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밤에 산소·이산화탄소의 관계를 변화시켜서 마시고 내뱉는 것처럼, 인간은 공기를 통해서 그렇게 하진 않지만 밤에 다른 작용을 해야 돼요. 그래야 다음 날 또 살 수가 있어요.
즉 이 몸 안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 또는 존재들이 일으키고 있는 작용들과 이 생각이 대화를 해야 돼요. 그 몸은 끊임없이 치받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해야 돼요. 생각은 그 사이에 끊임없이 몸에게 전달해 줘야 돼요. 그래야 다음 날 그 활동이, 내가 생각한 대로 몸이 받아주면 행위가 일어나는 거죠.
안 받아주면 몸이 덜 따라와요. 몸이 굼뜨고 어딘가 공중에 뜬 것 같고. 그래서 조정이 일어나는 시간이 없이 다음 날 일어나면, 다음 날 내가 공중에 떠서 사는 것 같아요. 이 시간만 있으면 돼요. 잠자는 시간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몸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 그냥 몸이라고 할 게요.
몸과 생각의 대화, 조정! 이게 이루어져서 그 조정된 상태로 나가야 몸도 생각이 일으킨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그 몸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줘야 쉴 때 쉴 수 있고 또 자기 생각도 고칠 수도 있고 조정할 수 있죠.
9. 꿈은 몸과 생각의 대화다
그게 뭐냐? 그게 꿈이라는 형태로 일어나요. 꿈이라는 것은 몸과 생각의 대화예요. 물론 몸과 생각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몸이 내 생각만 만나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 밖에 있는 땅과도 만나고 있고 바람과도 만나고 있고 구름과도 만나고 있고 수많은 것들과 만나고 있죠.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요소들과 만나고 있을 수도 있죠. 그 이야기들을 몸은 꿈이라는 형태로 얘기를 해야 돼요. 엄밀하게 말하면 꿈은 조정되고 있는, 때로는 질서정연한 타협의 과정이고 어떤 때는 어수선한 투쟁의 과정이에요.
10. 협상이 실패하면 살 수 없다
어쨌든 몸과 생각! 생각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 협상이 없으면 안 돼요. 이 협상이 계속 실패로 끝나면 죽는 거예요. 심지어 이 협상이 7일만 제대로 안 일어나면 그 다음 날 죽어요. 8일째를 못 버텨요. 우리가 잠만 못 자면 8일째 죽는다는 게 백 퍼센트 그런 건 아니에요. 체격이 좋거나 뭐 기력이 좋은 분들은 좀 더 갈 수 있죠.
어떤 분은 3일밖에 못 갈 수도 있고. 7일이 중요한 건 아니고, 그렇게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못 산다는 뜻이에요. 잠만 못 자면 못 사는 것은 피로가 안 풀려서 못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워요.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피로는, 미래의 과학이 와서, 지금은 아직 부족합니다만, 피로 물질을 해소하는 약을 마시고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는 약을 먹고, 심지어 뭐 더 간단해질 수도 있고, 심지어 ’피로 회복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캡슐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 풀릴 수 있어요.
그러나 못 푸는 거는, 몸과 생각의 대화를 그것이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11. 생각이 몸을 독재할 때
몸과 생각의 대화라는 부분을 생각 안 하고, “꿈은 그냥 인간의 의식 작용의 연장선에 있는 그 무엇이야”라고만 생각하죠. 왜?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어요. 내 생각이 내 몸을 독재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요. 수많은 세포들을 내 생각이 독재를 하고 있거든요. 이끌고 가고 있거든요. 의지대로 산다고 하면 심지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몸하고 대화가 안 일어나면, 어느 순간 지나치게 의지적으로 살던 분들의 최후는 비슷하죠. 결국은 몸이 못 견디고 항의를 하고, 항의조차 반응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탁 쓰러지죠. “와, 열심히 살다, 의지대로 살다 가셨다.” 우리 인간은 또 그렇게 평가합니다.
왜? 사회적으로 그는 중요한 기능을 했으니까요. 낮의 영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판단되니까요. 그래서 낮의 사회는 계속 굴러가야 되니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자기 몸에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그 중생 세포들의 이야기도 안 들은 사람이에요. 꿈에서 엄밀한 형태로 조정조차 안 한 사람이에요.
12. 꿈이 없는 사람
실제로 생각이 없어요.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어요. 뭘 하겠다는 의지적인 생각이 없어요. 근데 이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오늘 자고 나가서 또 일하고, 들어와서 자고 또 나가서 일하고 할 때, 이 사람은 꿈이 없어요. 별로 꿈이 없어요. 왜? 조정할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그냥 늘, 그냥 늘 그대로 굴러가요. 몸도 별로 항의를 하지도 않고 견딜 만하니까. 이 사람도 뭐 생각이 특별하게 이 몸을 더 어떻게 부려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저절로 하루가 그냥 굴러가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식으로 그냥 굴러가요. 꿈도 없어요. 꾼 것 같기도 한데 안 꾼 것처럼 느껴지고 기억도 없어요.
많이 그렇죠.
13. 몸이 항의하는 꿈
반대로, 몸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데 생각이 막 몸에게 지시를 해요. 자기 생각이 하면, 그 생각 자체가 의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신경을 타고, 신경이 연결된 수많은 선을 타고 그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몸의 요소들에게 전달돼야 되죠. 우리는 그렇게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경만 갖고 내가 부려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몸이 자동차인가요? 아니란 말이죠. 그렇게 전달이 되는 과정 속에서 몸은 일단은 받기는 받았죠. “다음 날 해 보죠.” 그러니까 일단은 그럴 때는 꿈이 약하게나마 꾸고 있는 상태로 있죠. 근데 다음 날 해 봤더니 몸이 못 견디겠는 거예요. 다음 날 깼더니 피로해서 막 몸이 어지러워요. 그래서, ʻ그렇게 꿈이 어지러운가 보다.’ 그러죠. 그런데 아니에요.
몸이 엄청나게 항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 죽겠어. 이거 아니야. 철회해 줘.” 철회할 생각이 첫날 없어요. 버텨요. 다음 날 갔더니 몸은 더 힘들어요. 이제는 항의가 아니라 그냥 뭐 거의 폭력 수준의 정신 작용을 하고 있어요. 꿈에서 막 쫓겨요. 이게 인간적인 형태의 기억의 왜곡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런 거겠죠. 막 쫓겨요. 압박을 받아요. 도망을 가요. 놀라요. 뭐가 쳐들어와요. 어디 떨어져요. 이렇게 몸이 엄청나게 항의를 하고 있는 거죠.
그 항의의 옷은 우리가 살아온 인문(⼈文)의 옷일지 몰라도, 그 항의 자체에 구체적인 옷들을 벗기고 나면 몸이 생각에게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거죠. 또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거죠. 그럴 땐 꿈이 어수선해요. 왜? 이놈은 이렇게 항의하고 저놈은 저렇게 항의하고, 항의가 다 모여 갖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항의는 여기저기서 일어나는데, 어떤 땐 쫓겼다가 갑자기 딱 그랬더니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이 돼요. 그래서 좀 조정해 줬는데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또 해요. 그럼 똑같은 꿈을 또 꿔요. ʻ내 이거 어디 가 본 데 같은데. 내가 만났던 사람 같은데. 이 옛날 또 쫓겨 본 거, 또 쫓기네. 내가 이 나이에 군대를 왜 가지. 내가 이거 또 이제 그 저기 예비고사를 왜 보는 거야.’ 아 지금 수능시대인데, 죄송합니다. ʻ지금 예비고사’ 그러는데 가만 앉아 계시는 분은 예비고사 보신 분이에요. 아무튼 그런 게 반복되는 거죠.
14. 몸을 거쳐 오는 제3자의 이야기
형태는 그런 식으로 반복되지만 몸의 항의(抗議)예요. 그래서 어쨌든 몸을 통해서. 어느 때 누웠는데 너무 차갑고 수분이 많고 기분이 안 좋아요. 우리가 그냥 몸이라는 면에서 얘기하면 그래요. 그럴 때도 몸은 몸을 경과해서 또 얘기를 하죠. 그러니까 제3자를 몸을 통해서 표현하는 경우도 꿈에 있을 수 있죠.
그 3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햇빛일 수도 있고 물일 수도 있고 다리일 수도 있고 구름일 수도 있고 비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어요. 내 밖에 있었던 다른 누군가와의 만남일 수도 있죠.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날 저녁에 이 사람이 막 꿈을 어수선하게 꿔요. 그러면 누군가를 만나서 몸이 항의할 만한, “저 사람 만나지 마. 내가 힘들어.” 이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까지 인정을 해 버려요. “그래 뭐, 내가 겪은 건 아니지만 귀신이 있다고 쳐요.” 신은 있어도 귀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러면 그것도 몸을 통해서 반영이 되겠죠.
15. 집단적 지성이라는 좌표, 그리고 소시오패스
지적인 존재가 되고 점이 아니라 선분으로 사는 존재가 되는 순간 가져야만 되는 집단적 지성이라는 게 본능이란 말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ʻ중용(中庸)’이라 그러는 거, 이 집단적 지성에 해당되는 것을 내 안에 체화하는 거예요. 내 안에 체화되어 있는 인간의 집단적 지성의 형태인 거죠.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본능적인 거죠.
그것이 체화되지 않고 내재화되지 않으면 자기의 좌표가 다르게 그려지죠. 이 집단 지성으로부터, 좌표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심지어는 상상할 수 없는 범위까지 가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사람을 우리가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하기도 하죠.
소시오패스라고 할 때 ’소시오’는 복잡할 수 있어요. 일반 소사이어티가 아니라, 소사이어티 속에 움직이고 있는 그 본능체, 그 본능으로부터 그려지는 구심력이 작용하는 범위까지, 그 범위를 벗어나면 얘기가 좀 복잡해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지적인 사회가 되면 될수록, 지(志)라는 것에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간극이 점점 멀어지죠. 소위 말해서 소시오패스는 일반적인 대중들의 모습으로 전환하게 되죠.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랬다가 대다수가 그렇게 되죠.
16. 초고도 문명과 절대다수의 야만
초기 문명 시기에 어느 시기에는, 전에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모헨조다로라든가 수메르는 엄청나게 고도한 문명이고, 당시로 보면 기획된 문명이라는 것은 모든 고고학자들이 인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시 7천 년 전에 일반 휴먼들은 야만 내지 거의 원숭이 수준의 문화를 유지하고 살아요. 지금 현재의 중국의 두롱족(獨⿓族)과 상하이의 위챗페이 쪽이 내는 간극보다 훨씬 간극이 크게 있어요.
고고학자들은 편견에 빠져요. 그 시대 사람들은 어느 정도 평균적이었을 거라고! 그래서 평균을 벗어난 고도화 문명이 나오면 해석을 갑갑하게 해요. 그 시대에도 초고도 문명으로서 이끌어 가는 존재, 왜 초고도 문명 족이 따로 있는가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요. 그들이 뭘 하는 데 필요하면 여러 가지 필요가 있을 수 있죠. 우리 단군 신화 얘기를 제가 드렸잖아요. 홍익인간(弘益⼈間)이라고 그랬잖아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을 다르게 보는 거죠.
17. 홍익인간(弘益⼈間) —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관점
인간은, 초고도 문명을 가진 소수 집단이 아니라 그 아래 문명화되지 않은 집단을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던 거예요. 즉 홍익(弘益)이라는 것은 자기들 내부에서 해 봤던 거예요. 자기들 문명 안에서는, 소위 말해서 수메르인은 수메르 안에서는 해 봤던 거예요. 그런데 수메르 정도의 문명이 아닌 그 주변에, 고립되거나 고립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문명의 수준이 그 2만 년 전과, 수메르를 기준으로 2만 년 전과 동일했던 사람들이 있는 거죠. 인간적으로는 같죠.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 ‘인간’이었던 거예요. 홍익인간은 자기들끼리 해 봤던 ‘홍익(弘益)’을 그 인간에게도 적용시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관점은 초고도 문명자들이 아래로 인간을 바라보고 하는 관점이에요. 단군 신화는 위를 바라보고 하는 관점, 즉 비고도(⾮⾼度) 문명자들이 문명화되어 가면서 위의 문명들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쓰는 관점이 아니에요.
재세이화(在世理化) 역시 이화(理化)가 관점이 아니에요. 우리 해석은 ’이화, 이치대로 문명화’라고 하죠. 문명화돼 산다! 그런데 자기는 문명화 해 봤던 거예요. 그 문명화된 것을 어디에, 인간 세상에도 적용시켜 보겠다는 거예요.
단군 신화는 문명화된 존재들에 의한, 비문명화된 존재들을 바라보는 태도의 하나예요. 재세(在世)라는 게 엄밀하게 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더 중요한 점이에요. 마찬가지로 홍익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했던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만약에 ’다 같이’라고 했으면 아니죠. 어느 순간에 오면 ’다 같이 해 보자’라고 바뀌어요. 왜? 비문명 인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문명 인자로 바뀌니까요. 그때 가서 문명 인자들과 비문명 인자들은 서로 나누지 못해요. 나눌 만한 명분이 없어요. 그때는 같이 ’우리’라고 표현해요. 그 시기에 나타나는 개념이 뭐냐? 대동(⼤同)이라는 개념이에요. 같이 잘 살아보자!
그때 드디어 구약시대의 신과 구약시대의 인간이, 인간이라는 걸로 하나로 만나는 거예요. 모헨조다로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이지만 모헨조다로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어요. 수메르가 7,500년 전이잖아요. 괴베클리 테페는 1만 2천 년 전이에요. 수메르의 석조 건물들과 하나도 차이 나지 않는 문명이 있었어요. 그것마저도 기획 도시예요. 아무튼 과거에도 문명 차이는 엄청 심했어요.
18. 문명은 통곡에서 시작되었다
지난번에 그랬죠.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새벽 별을 보고 나가서 자기의 우주적 고독감과 공백감과 그런 것을 자기도 모르고 느끼면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마침내 황소 울음 같은 통곡이 터져 나오던 사람들이 일으켜 낸 게 초기 문명이라고!
궁금하잖아요. 처음에는 통곡이 나죠. 이 우주적 고독감의 이유를 몰라요. 어느 순간 이 의(意)가 한꺼번에 확 들어온 것이 탁 받아들여진 거예요. 그게 딱 충돌하는 순간 무한한 통곡이 나오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이 무한한 고독감에 황야에 나가서 울었던 것처럼! 제자들을 안 데려가요. 물론 제자도 아니고 같이 사는 동료들이죠. 제자라는 건 사도 바울이 만든 거죠. 어쨌든 그들을 안 데리고 나갔죠. 왜? 황소 울음소리 내면서 끄윽거리며 우는 자기 모습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두 번 나가 봤더니 그런 걸 알아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잖아요. 탐구하잖아요. 그 탐구의 주제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잖아요. ʻ나는 어디서 왔지, 왜 왔지, 언제 왔지, 어떻게 왔지, 그리고 누구지?’ 답이 없어요. 이건 아직도 화두(話頭)예요. 심지어 ʻ이 뭐꼬?’ ʻ내가 어디서 왔노, 내 어디로 가노? 내 왜 왔지, 나 어떻게 온 거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왜? 육하원칙(六何原則) 중에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육하원칙 중에서 그걸 풀 수 있는 접근의 유일한 실마리는 ʻ왓(what)’이에요. ’나 뭐 하는 놈이지? 나 뭐 하고 있지?’ 관찰한다고 그랬잖아요. 관찰하는데 움직여요. 보여요. 그래도 안 풀려요. 여전히 눈물은 그치지 않아요.
19. 번식은 환경이 결정한다
어느 날 관찰을 끊임없이, 이 관찰이 수만 년에 걸쳐 이루어졌겠죠. 대를 바꿔 가면서 이루어졌겠죠. 어떤 때는 열심히 번식해 가면서 어떤 때는 번식을 거부해 가면서 그랬겠죠. 어떤 때는 번식을 거부하고 어떤 때는 번식을 좋아하는 건 환경 때문이죠.
그러니까 자기 개인에게 다가와 있는 환경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다가와 있는 환경이 살 만하면 번식 잘 안 하려고 그러죠. 자기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다가와 있는 환경이 너무 불안하면 번식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사회적으로도 그래요.
그래서 우리 개개인은 살기 힘들어도 자본주의라는 게 안정돼서 살 만해지면 번식 안 하려고 그래요. 소위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번식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거예요. 오히려 자본주의적 초기 단계에 있는 아프리카에서 번식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거예요. 번식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성욕도 줄어들어요. 객관적인 것만 놓고 보면 한국의 5·60대와 2·30대 중에 5·60대가 성욕이 높아요. 왜? 그분들은 불안했던 시대를 살아 봤거든요. 번식의 시대를 살아 봤거든요.
그런데 74년 이후로부터는 번식이 줄어들죠. 아무튼 뭐 그런 시기를, 빙하기를 겪으면서 열심히 번식하고 하죠. 내가 못 누리니까 번식하는 거예요. 내가 누릴 수 있으면 누리죠. 지금은 성을 누리고 있는 거지 번식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의 성은 마약 내지 유희에 가까운 것이지 번식의 성은 아니에요.
판다는 안정된 환경 아래서 자라지 않는 판다가 없어요. 소수이고 전부 보호 지구 안에서, 먹을 것 천지인 조건에서 누구의 공격도 받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자라다 보니까 모든 판다는 번식을 잘 안 하는 것으로 보이죠. 걔들도 아주 힘든 데 갖다 놓고, 대나무도 별로 없고 천적도 있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번식 열심히 할 거예요.
20. 뼈를 세다가 수학이 생기다
아무튼 그런 시기, 빙하기도 거치고 혹한의 시기도 거치고 하면서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어느 날 관찰하지요. 그냥 시간적으로 보면, ‘어… 죽은 내 동료를 한번 보자!’ 뭐 아버지일 수도 있고. 동굴 속에 갖다 모셔 놨잖아요. 갔다 봤더니, (이 내용은) 지난 시간의 반복입니다. 뼈가 삭아 있죠, 뼈만 남았죠. 목을 보니까 뼈가 7개 있어요. 등을 보니까 뼈가 12개가 있어요. 꼬리뼈를 빼고 보니까 허리뼈는 5개가 있어요.
상하가 있어요. 다리도 다섯 개 다섯 개, 열 개가 있어요. 뭐지? 해골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거 보면서 수학이 생기는 거예요. 어느 날 또 세월이 흘러야죠. 10진법이 생기고 12진법이 생기고, 이것과 5개와 결합해 가지고 60진법도 생기고 7진법도 생겼죠. 7진법은 해 보니까 불편하니까 서기전 2천 년경부터 사라졌죠. 지금도 12시간 쓰고 60갑자(六⼗甲⼦)도 쓰고 10진법도 써요. 이 7은 버렸지만 문화적으로 남아 있죠. 어느 나라는 7은 다 좋다고 하죠. 럭키 세븐! 천강칠성(天罡七星)! 이런 차원의 북두칠성(北⽃七星)이죠.
그게 다 몸에서 오는 거죠. 거기 따라 가지고 이 수학들이 굴러가고, 굴러가면서 결국은 문명화로 이어지는 거예요.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고독으로 말미암은 통곡 없는 문명화는 없었다는 거예요. 그 문명화는 어느 순간 엄청 빠르게 진화돼 갖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엮어서 문명을 만들어요.
21. 긍(肯) — 뼈와 살
그렇게 문명으로 진화될 수 있는 구조를 한자로는, 우리가 ʻ긍정(肯定)하다’ 그럴 때 ‘긍(肯)’이라고 그래요. ’긍정하다’라는 글자 대부분 아시죠? 긍(肯) 자를 이렇게 쓰지 않습니까? 밑에 있는 이 달 월(⽉)은 고기[⾁]예요, 살이에요. 요 위에 있는 요건 뼈예요. 그러니까 뼈가 있으면 살이 생기는 것, 뼈와 살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이게 가능성이 되는 것이란 뜻이죠. 그래서 이 긍(肯)은 뭔가 엮어서 만들 수 있는 게 생기는 거예요.
22. ’만든다’는 것은 재배열이다
‘만든다’는 것을 복습하면, ʻ만든다’ 할 때 만든다가 뭐라고 그랬죠? 만든다는 것은 영(零)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예요. 이 사람들이 어디서 돌을 주웠어요. 깼어요. 돌 깬 것도 얘기 드렸죠. 돌 깼을 때 중요한 것은 희한한 돌도 다 깨 봤을 거라는 거죠. 마제 석기(磨製⽯器)는 갈아 봤다는 거죠.
우리는 거기서 도출된 산물인 마제 석기만 본다고 그랬죠. 하지만 돌가루가 남잖아요. 가루에 집중해서 봤어야죠. 불이 있었으니 가루를 태워도 봤을 거고, 물과 개어도 봤을 거고, 물감도 만들었을 거고 화장품도 만들었을 거고, 그 가루 가지고 금속도 만들죠. 그러니까 신석기와 금속기의 시기가 1만 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건 상식에서는 맞지 않아요. 돌가루를 갈아야만 석기가 나오는데. 아무튼 석기 하나 두고, 그거는 갈아내거나 떼거나 했어요.
그 다음에 어디서 나뭇줄 같은 거 말려 갖고 탄력 있는 걸 구했어요. 나무 자루를 하나 구했어요. 엮어요. 그럼 이것은 만든 것이지만 의미는 뭐죠? 자연에 있는 것을 재배열한 거잖아요. 메이크(make)라는 것은, 마크·마키르·마케르라고 불리는 이 언어는 ’재배열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만들다’는 것도 재배열하다는 거예요.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준 오만이에요. 재배열을 할 뿐이에요. 재배열을 하는데 막 불을 열심히 온도를 주고 놀라울 정도의 뭐 기술을 주고 섞음을 해 가지고 만드니까 진짜 만든 줄 아는 거예요. 따져 보면 그것도 다 재배열이에요. 재배열해 놓고 우리는 그것이 진짜 새로운 탄생이라고 생각해요.
23. 굿모닝, 그리고 ʻ크리에이티브’
여러분! 이런 표현 쓰시죠? 굿 모닝! ʻ굿’은 뭐죠? 그런 거 실체하지 않잖아요. 실체가 아니라 뭔가 감각에 대한 판단이죠. ’모닝’은 아침인데, 아침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둠이 밀려나고 해가 뜨는 것이 존재하지 아침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굿모닝’이라고 해서 우리 다 통해요. 그렇게 막 만들게 되는 오만한 시대에 우리가 살면서 메이크를 무슨 창조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크리에이티브(creative)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크리에이티브도 ’기리따부’라는 언어 원형으로 봤을 때, 그리고 진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기리따부는 보이지 않거나 너무 작아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기르는 것이 기리따부예요. 길러내는 거예요. 크리에이티브는 창조가 아니라, 창조에 가까울 정도로 미세한 양자 하나가 있다면 그 양자 하나를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처럼 길러내는 것이 크리에이티브지, 진짜 창조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한 것이 진짜 창조를 관념적으로 설정한 것은 불교가 나오기 직전 단계인 영(零)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설정된 이후예요. 그런데 기리따부라는 언어는 그 이전부터 있던 언어예요. 그래서 구약에 있는 기리따부는 그 씨앗을 길러낸 거예요. 어디에서? 흙 안에서! 또는 흙을 이용해서! 그리고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었다고요? 부속품이네? 아니에요. 복제란 뜻이에요. 갈비뼈 한 개라 그랬어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인성화된 이 부분이 마치 세포 복제되듯이 복제를 했다! 즉 쌍이라는 이야기예요. ’너나 나나’라는 얘기예요.
24. 민주주의라는 선언
아무튼 이제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점점 점점 소수는 다수가 되고 다수는 소수가 되고 이제는 하나로 만났어요. 그 완성의 선언이 뭐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민주주의를 선언한 거예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비문명과 문명 인자의 구분 없이 전부 문명 세계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인류의 최후의 선언이에요.
그런데 이 선언이 정당할까? 사회주의라는 문제가 등장했을 때 저는 이렇게 얘기했었습니다. “사회주의! 너무 좋은 관념이다. 공산주의! 너무 좋은 관념이다. 그런데 인간의 현재 수준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그 얘기가 이런 겁니다.
통곡을 해서 문명을 창조해 왔고 그 문명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받은 사람도 창조를 (문명을 창조하라는 뜻은 아니니 이제 오해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문명을 키워 온 사람들의 입장처럼 그걸 반복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다수라면, 이거는 기술과 지적 내용과 정보만 받아들인 거예요. 그것을 만들었던 그들의 초기적인 정신 세계는 없는 거예요. 그들은 애초에 이 의(意) 없이 지(志)만 가지고 문명이라고 해 온 거예요. 이게 우리 세상의 다수라면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다수인 거죠. (2회차 1부 끝)

첫댓글 신적인 사람들은
초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
그리고 무지 몽매한 무리들은 인간
인간을 홍익하고 이화시키는 신들이
그리되게 길러내는 것
참되게 키우는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