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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훌륭한 아내는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잠언의 말씀 31,10-13.19-20.30-31>
10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11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12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13 양모와 아마를 구해다가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19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20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30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31 그 손이 거둔 결실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한 일을 성문에서 칭송하여라.
† 제2독서
"주님의 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 5,1-6>
1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 복음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시각장애인 이재서 교수님 자전 에세이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아픔이지만 창조를 위한 기회입니다.
고난은 언제나 설명서 없이 불쑥 찾아옵니다.
하지만 설명서는 언제나 나중에 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고난이 끝인 줄 알고 쉽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인내하고 참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기쁨과 감사로,
그 고난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말해주는 설명서를 받아 읽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에세이에는 15살 때 찾아온 실명(失明)을
다정한 친구로, 축복 중 축복으로 여기는 이 교수님의 특별한 인생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실명한 것에 대해 억울해 하지 않고, 원망도 않으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외칩니다.
"실명,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실명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실명한 이후 기나긴 좌절과 고통의 세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네 가지 눈'이라는 제목의 강의였답니다.
"사람은 사물을 보는 육안(肉眼), 지혜를 터득해 가지는 지안(智眼),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
종교의 힘으로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靈眼) 등 네 개의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육안은 잃었지만 나머지 세 개의 눈은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모진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눈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그런대로 견딜 만하게 됐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가끔씩 마주서는 절벽 앞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됐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탈렌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찾아냈고,
그것을 키워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 교수님은 보란 듯이 우뚝 섰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강단에 서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북한 장애인 지원 사업에 열정적으로 투신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귀감이자 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각자가 받은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할 것을,
그래서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고 노심초사했던 종에게 주인은 화가 잔뜩 나서 호통을 칩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주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맡긴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고 빈둥거리며 게으름을 피운 종을 주인이 잘 봐줄 리 없습니다.
그는 주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결실 없는 인생, 자신의 인생에 불충실한 삶, 숱한 은총의 선물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나이가 만만찮게 들어가면서, 수도 생활 연륜도 점점 늘어만 가는데도
제대로 된 열매 한 번 맺지 못하니 하느님 앞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으면서, 특별한 불편이나 어려움도 없으면서
'나는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하며 자신을 비관만 해왔습니다.
그 숱한 황금 같은 시간들을 아깝게도 그저 '죽이며' 지내왔습니다.
아직도 새파란 나이에 '이 나이에!' 하며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건강한 몸 하나만으로도
저는 참으로 큰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약점, 상처, 고통, 십자가조차도 일종의 탈렌트들입니다.
우리를 보다 큰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들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하루,
어떠한 시련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하루,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사오정 친구가 사오정 집에 놀러갔습니다.
날이 갑자기 더워져서 시원한 음료수가 먹고 싶어진 친구가 말했지요.
“사오정아, 나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 좀 먹어도 되니?”
그런데 사오정은 아무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친구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지요.
“사오정! 나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음료수 좀 먹어도 돼?”
그러자 사오정이 대답했습니다.
“야, 너, 구시렁대지 말고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음료수나 꺼내 먹어.”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유머입니다.
사오정은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유머를 보면서
우리 곁에도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 자신이 사오정으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 어떤 글을 보았는데,
세상에 있는 우울증 환자의 80퍼센트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내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남의 얘기 듣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기술이나 능력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아무런 기술도 또한 능력도 필요 없이
상대방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귀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정도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음을,
우리 각자의 체험을 통해서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그리고 정말로 답답함을 느낄 때,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그 어떤 사람으로 인해 고통과 시련의 순간을 극복한 체험을
아무리 못 가져도 한 두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닙니다.
바로 그의 말을 들어주는 내 귀가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존재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능력과 재능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과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것은
조용히 들어주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많은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새기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이들이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탈렌트는 무시하고, 특별한 탈렌트만을 주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들어주며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탈렌트를 우리 모두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나의 소명은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새기면서
내가 받은 탈렌트를 최대한 발휘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각자의 소명을 찾아보세요.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의 씨앗>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형에게 재산의 반을 나누어주면서 그것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에게 하얀 종이를 두 장 주면서
한 장은 대장간에 또 한 장은 미술가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대장간에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종이를 화로에 넣어 불을 땠습니다.”
아버지는 또 다시 물었습니다.
“미술가에게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미술가는 그 종이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똑같은 종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화로에 던져지기도 하고 그림을 담는 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가 재산을 가지고 참으로 귀하게 쓸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머지 재산을 네게 주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그것을 잘 사용할 줄 알 때에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아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이미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데 모르고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주인이 떠나면서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적은 돈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워낙 충실한 종이기 때문에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런 칭찬까지 받았을 것입니다.
“너는 가장 적게 받고도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해 한 달란트를 더 벌었으니 여기 있는 종중에 가장 뛰어난 종이로다. 너에게 내 재산의 총 책임을 맡기겠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망하게 된 이유는
주인의 뜻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더 뛰어난 사람이라 교만하고 있었기에
주님의 달란트 분배가 불공평해 보였던 것이고
그러니 주님의 재산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만이란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종은 주인이 무서운 분이라 자신이 그것을 사용하다가 잃었을 경우가 두려워 감추어 두었다고 변명을 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작은 능력만 준 것 때문에 주인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실제로 한 달란트를 받고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큰일을 이루어 낸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무말랭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게릭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 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까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당사자인 호킹(Howking)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영국 케임 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 수학 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박사 둘 중 하나에게 상을 내리시려한다면
누구에게 더 큰 상을 내리실까요?
불우한 조건으로 시작했던 호킹 박사가 아닐까요?
따라서 마지막 날 하느님께 평가를 받게 되는 기준은 큰일을 많이 이루어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썩히지 않고 발전시키려 노력하며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내놓으라고 하실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 능력을 발휘하여 번 돈이나 성취한 명예 등을 말할까요?
그런 것들은 하느님께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은 우리의 사랑이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씨앗을 잘 키워 당신께 활짝 핀 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한 사랑을 주시지 않고 그 씨앗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노력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는 뜻입니다.
만약 활짝 핀 꽃을 우리에게 주셨다가 그것을 다시 받는다면
주님께나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당신 자녀 되는 영광을 주셨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하느님을 불공평하다고 할 것입니다.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연꽃 씨의 수명은 무려 수백 년, 어떤 것은 수천 년이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지나도 조건만 맞으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그 씨는 더러운 물 바닥에 잠겨 있다가
좋은 온도와 햇빛 등 조건이 맞으면 아름다운 꽃을 물 위에 피웁니다.
사랑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른 종은 사랑의 씨앗을 묻어놓고 꽃을 피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씨앗을 피울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은 마치 알맞은 햇살과 같이
진흙 속에 묻혀있는 씨앗을 자극시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따라서 게으른 종이란
자신 안에 성령님을 받아들이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현세에 ‘말씀(성경)과 성체’로 현존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는 통로를 ‘성사’라 부릅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성사란 미사(말씀, 성찬을 모두 포함)를 의미하겠지요.
그러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종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매일매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명확하지 않습니까?
- 로마 유학중
* 배광하 치리아꼬 신부님의 묵상글 *
<착하고 성실한 종이 받을 기쁨>
어느 본당엘 가든 반드시 있게 마련인 분열에는 그 원인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은 사목 책임자인 주임 신부에게 그 잘못이 있습니다만,
지역 유지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에 가득 차 신앙 생활을 하는 교우들도 한몫을 합니다.
그 같은 교우들에게 볼 수 있는 잘못을
기원전 106~43년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이며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어떻게 예견하였는지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여섯 가지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꼬집고 있습니다.
첫째, 남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사람,
둘째, 어떤 일을 자신이 이룰 수 없으니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셋째,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로 걱정하는 사람,
넷째, 대중의 잘못된 편견을 생각없이 따르는 사람,
다섯째,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며 독서하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
여섯째, 다른 사람에게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지적대로 본당 발전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뒤에서 말이 많고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변화와 발전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며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들 곁에는 늘 불만과 마찰과 불화와 분열이 따라 다닙니다.
그들이 자주 쓰는 말은 언제나 ‘전에는’, ‘옛날에는’, ‘전임 신부 때에는’ 등의 과거형입니다.
그 때에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서 생색내기에 급급했던 그들은
늘 과거에 집착하며 떠벌립니다.
그리고 남이 칭찬받는 것에는 쌍심지를 켜고 험담을 하다가도
자신이 무슨 직책을 맡았을 때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또한 자신의 그릇된 의견을 따르는 이들과 어울리며
주임 신부를 자신의 손안에 주무르려 듭니다.
그들은 언제나 보이는 성과나 행사에 만족하려 하며,
거기에서 인기를 얻고 흐뭇해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냉담을 밥 먹듯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훌륭한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탈렌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아집이
그 귀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마지막 날 듣게 될 경고의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밝히십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5, 30)
글을 쓰다 보니 착한 교우들이 아닌 제 이야기를 썼습니다.
2007년 12월 31일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는 487만3447명으로
총인구 5003만 4357명의 9.7%를 차지하고 전년에 비해 2.2%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직자 수는 총 4148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직자 1명당 1175명을 책임져야 하는 숫자가 됩니다.
물론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도시 본당의 경우에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부 1명당 천 명이 넘는 교우들일 경우,
보좌신부 없이 사목한다는 것은 사목이 아니라 ‘사무’가 될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제가 교우들을 목자의 마음으로 가까이 하며 사목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사무적으로 대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칭찬받는 착하고 성실한 교우, 많은 일을 맡길 수 있는 교우들이 더욱 절실한 실정입니다.
사제 혼자 사목을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일이 분업화,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역할이 그만큼 커지게 되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은
아직도 교우들 중에 사제의 애로 사항과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에
사제들이 살아갈 수 있고 보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늘 한결같은 심성과 믿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씀과 행동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맡았던 교회 내 직책에서 물러나면,
그 직책에 대한 어려움과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말없이 후임자를 보필합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을 때가 좋았었다는 입에 발린 소리에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때론 그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가지고 어찌 본당과 역사가 진보하겠는가?”하며 꾸짖기까지 합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패거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때문에 분열과 상처없이 모든 일이 원활히 해결되어 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은 작은 일에 성실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탈렌트를 썩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사제의 영원한 협력자인 평신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을 기쁘게 초대하십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 21)
-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 이기양 신부님의 묵상글 *
<세상을 성화시키는 평신도>
프랑스 루이 왕 시대에 바르나베라는 가난한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헐어빠진 깔개에 공과 칼을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저녁도 굶은 채 잘만한 헛간을 찾아 걸어가던 곡예사는
마침 같은 길을 걷는 수도자를 만나자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수도자는 바르나베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의 순박한 마음에 감동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베 친구,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바르나베는 수도자가 됐습니다.
그가 들어간 수도원에는
적지 않은 수사들이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식을 봉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박식한 모리스 수사는 글을 양피지에 옮겨 쓰고,
알렉산드로 수사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밀화를 그려 넣었으며,
마르보드 수사는 쉬지 않고 석상을 깎고 있어서 수염과 눈썹, 머리칼이 온통 먼지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또한 시인들도 있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송가나 산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퉈 하느님을 찬송하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쌓이는 것을 보고
바르나베는 자신이 단순하고 무지한 것을 탄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바르나베는 기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달려가더니
한 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저녁 식사 후에도 또 성당을 찾았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성당이 비어 있는 시간이면
바르나베는 어김없이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하루는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수도원장이
고참 수사를 데리고 성당으로 가 문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르나베 수사가 성모님 제단 앞에 거꾸로 서서
허공에 쳐든 발을 여섯 개의 구리공과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수사가 분개해 그를 끌어내려 할 때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제단에서 내려와
푸른 옷자락으로 곡예사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나톨 프랑스, 「가난한 곡예사의 봉헌」)
평신도 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복음의 탈렌트 비유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그에 걸 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 재능은 최선의 노력을 통해
나와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특히 세상 안에 사는 평신도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야 할 곳은
성당뿐만 아니라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 뜻을 드러내며 살기란 여간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사에는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 천민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루는 백정인 황일광이 세례를 받고 신자들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양반들이 천민중의 천민인 황일광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자기들 모임에 들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내노라 하는 석학들은
그를 '형제'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일광은 그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 곳이 있다.
지금 여기가 천당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당이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한 백정에게 눈부신 천국을 살게 한 것은
양반 신분의 그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한 복판에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누구에게는 왜 다섯 탈렌트를 주고 두 탈렌트를 주며, 또 왜 한 탈렌트를 주었느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기보다는 남과 다른 재능을 받은 만큼 부지런히 잘 활용해 세상을 복음화시키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에디슨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이 무엇이며,
나는 지금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는 말과 함께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