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지적으로 실천하는 예술교육
-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원정기
글 l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난 3월 6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왔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의 수도 리스본의 풍경은 뭐랄까, 제국의 도시답지 않게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텔로'나 '신트라' 성, 그리고 도심의 오랜 건축물들은 과거 영광의 유산들이면서 동시에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 리스본 현재의 감정을 고스란히 발산한다. 권위롭긴 하되 귀품스럽지 않은 풍경들, 제국의 스펙터클보다는 중세의 영광의 흔적이 느껴지는 리스본은 아마도 과거의 이미지였다기보다는 오늘의 소박한 도시 리스본의 일상의 거울에 투사된 모습이다. 일상 속의 문화유산, 튀지 않지만 유서 깊음이 느껴지는 거리들, 시각적인 편안함을 갖게 해주는 건축물들, 그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심 좋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표정들, 이런 것들을 위해 예술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10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 내가 스케치한 풍경은 네 가지이다. 첫째 예술교육에 대한 참가자들의 인식과 이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 둘째 예술교육 개념의 나이브한 인식 하에서도 현실의 벽에 도전하는 현장실천적인 전문가들이 존재한다는 점, 셋째 예술교육의 국가별, 지역별, 영역별 차이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논의할 토픽들이 많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방으로만 여겨졌던 한국의 예술교육 정책이 국지적인 대안 사례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예술교육 대회를 스케치한 서로 다른 네 가지 풍경은 각기 다른 문제의식과 해결 과제들을 갖고 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예술교육의 궁극적인 좌표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지적인 네트워크의 활성화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네 장의 스케치, 그 뒤의 풍경들
국제단체의 모든 세계대회의 개막식과 플레너리 세션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형식적인 인사말과 예술교육의 현황을 설명하는 의전행사와 대표성 발표들은 별다른 영양가가 없었다. 참가한 전문가들이 공히 체감했겠지만, 예술교육의 정의와 효과에 대해 나이브하고 보편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발제문이 공유하고 있는 가설들은 사람들을 내내 지겹게 만들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예술교육에 대한 각자의 감수성과 스타일,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 대해 인식의 공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예술교육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창의성"과 "상상력"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창의적이지도 상상력을 유발하지도 않게 언급이 되었다면 왜 이런 반응이 나왔는지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모든 발제자들이 언급한 '창의성'과 '상상력'은 어떤 의문의 여지없이 예술교육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문제는 이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 용어를 말하는 방식에 있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 창의성과 상상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전제가 문제의 발단이 된다. 발표자들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이 개념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의 이입 없이 대단히 무미건조하고 자명하게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사용된 이 개념들, 그리고 사전적인 의미를 되풀이하는 설명들이 과연 감동적일 수 있었을까? 발제자들은 대게 창의력과 상상력에 붙는 동사들로 '개발하고', '증진하고', '활성화하고'를 사용한다. 창의력을 개발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상상력을 증진한다는 것은 또 뭔 말인가? 사실 창의력 증진이야 '웅진싱크빅'이 탁월하게 잘하고, '상상력 증진'이야말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원더풀하게 잘하는데, 예술교육의 진정한 창의성과 상상력은?
탈규제적, 탈산업적 경제론자들. 혹은 글로벌 콘텐츠 기업가들에 의해 개발된 창의성은 사실 예술적 창의성 그 자체의 힘을 강조하기 보다는 사회운영원리를 혁신하기 위한 수단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사회발전원리로서 창의성은 창의적으로 살아라, 창의적으로 돈을 벌어라, 창의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하라는 등의 보이지 않는 경쟁논리를 갖고 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창의성과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고 제도를 혁파하며 일상에서 제 스타일대로 살 것을 주문하는 자유로운 삶의 강령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개발하고' '증진하는' 것은 사실 예술교육의 실천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며, 일종의 정책적인 언어에 국한되는 말이다. 창의성과 상상력은 또한 예술교육의 지식교육이나 과학교육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미학적 가치이면서도 예술교육을 특권화하게나 절대시하는 권위적인 가치도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창의성과 상상력은 개발되거나 증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문화적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생적인 정념(affect)을 말한다.
플레너리 세션에서 발표한 발표자들의 예술교육에 대한 견해들이 진부했던 것은 사회의 변화와 지식과 학문을 분화를 대단히 이분화 시켜 설명했다는 점이다. 가령 예술교육을 과학과 단순 대비하는 경우라든지, 예술교육의 출현 배경을 산업사회와 탈산업사화로 이분화해서 설명하는 경우들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주하려는 예술교육의 본래 의미와 전제부터 어긋나 있어 보였다. 사실 이런 식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설명이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현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카니발, 페다고지의 변형적 실천
예술교육 현장의 실천적인 고민들이 대회 기간 내내 간간히 논의되긴 했지만, 논의의 중심 주제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중립적인 예술교육 개념과 긴장감 없는 발언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는 예술교육의 현장의 실천에 대한 고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중 3월 8일에 위기사회를 위한 예술교육의 실천과 전망에 대해 발표한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다니 린더세이(Dani Lindersay) 박사의 발언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그가 말하는 예술교육은 페다고지의 변형적 실천으로서, '카니발적 페다고지'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카니발 페다고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맥락을 요약해 보면, 예술교육의 사회적 실천을 즐겁고 재미있게 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은 자본과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참여와 쾌락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교육이 사회의 부패, 범죄, 빈곤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교화와 훈육의 차원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공유일 것이며, 이는 글로벌 시대 지역의 시민들의 문화주권을 강화하는 것과 연계될 수 있다. 다니 린더세이 박사가 언급한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은 카니발리즘이 페다고지나 인간개발론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지향점이자 이념이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예술교육의 개념에 현황에 대한 진부한 설명과는 달리 실제 국가별, 장르별, 권역별 현장은 서로 다른 생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사례발표 자리나 질의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나기도 했다. 예술교육을 설명하는 발표자들은 서로 다른 층위들을 말한다. 가령 유럽 선진 국가들이 언급하는 예술교육은 특성화된 사례들과 시민들의 문화향수권 신장이라는 차원에서 중시되는 반면, 저개발 국가들의 예술교육은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희망으로 설명되며 개발도상국들이 말하는 예술교육은 대체로 공교육에서 실시하고 있는 예능수업 혹은 아티스트 교육에 집중한다. 그래서 논의과정에는 시민들의 문화향수권으로서 예술교육인지, 공교육 내 예술교과수업으로서 예술교육인지, 아티스트 양성으로서 예술교육인지가 구분되지 않고 논의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예술교육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NGO 그룹들 간의 연대가 적극 모색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국제음악교육협회'(ISME), '국제연극교육협회'(IDEA), '국제미술교육협회'(INSEA) 회장단들은 예술교육 세계총회가 열리기 이전에 모여 예술교육의 통합적 교육실천을 위해서 공동의 워크?斌? 인적교류, 학술교류를 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개막식에 발표함으로써 참가자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국제연극교육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댄 베런 코헨(Dan Baren Cohen)이 발표한 선언문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NGO 간 예술교육의 구체적인 통합 교육과정과 통합 주제들을 설정하고 고민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둘 수 있었고, 이들 단체들의 워크?斌? 공동토론들이 서로 다양한 장르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들의 의견수렴을 하는 데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국제연대와 네트워킹의 상상들
유네스코에서 제시한 로드맵의 구체적인 토픽이 3월 7일에 발표되었는데, 로드맵의 항목에 대한 많은 참가자들의 의견개진이 있었다. 학교교육을 넘어서는 예술교육, 디지털 뉴테크놀러지에 대한 예술교육의 관심, NGO 그룹의 협력과 파트너쉽 강조, 문화환경의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과 대응, 예술교육으로서 체육교육 질적 향상의 중요성, 서양 중심적인 예술교육 아젠다 비판 등의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그러나 로드맵에서 제시하고 있는 목적이나 개념들, 구체적 전략에 대한 기본 방향이 제대로 논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없었다. 로드맵 문건에서 제시하는 문화적 참여로서의 인권향상, 문화다양성 표현 증진, 개인능력의 개발, 교육의 질 향상과 같은 목적들이 제대로 설정되고 있는지를 개별 워크?事犬? 플레너리 세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대회 프로그램들은 사실상 로드맵 작성을 위한 세부 토론이었다기보다는 별개의 논의 주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어도 개념과 전략에 있어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각이 반영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들만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특히 예술교육의 권역별 격차를 해소하는 공동의 노력이나 국지적 예술교육의 교류에 대한 로드맵들은 생산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로드맵 작성 시간에서나 국가 간 예술교육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나 마지막 플레너리 세션에서나 한국의 예술교육 정책과 교육사례들이 국제적인 대안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예술교육의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지난 몇 년 사이 적극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많은 재정을 투여해서 제도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과정은 역시 '다이나믹 코리아'로 부르기에 충분한 급성장의 사례가 되었다.
예술교육 세계대회가 끝나갈 즈음 한국이 차기 대회 개최지로 선정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예술교육의 국제적 연대에 대한 많은 시도들이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국가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보다는 국가 대 국가, 도시 대 도시가 직접 만나서 함께 다양한 예술교육의 국제 연대와 네트워크의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카니발적 페다고지로서의 예술교육의 국제연대와 네트워크라는 생각이 대회 내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도 했다. 서울과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서울과 자메이카의 킹스턴이, 서울과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로가, 서울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 함께 만나서 서로의 문화다양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국제적 연대활동을 통해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의 사례를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의 강사풀제, 사회문화예술교육, 학교-지역 간 연계교육, 전국문예회관 교육 등 제도로 강제하는 예술교육을 넘어서 일상의 자유로운 삶에서 나오는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이 이러한 국지적 실천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교육을 바꾸는 실마리를 제공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P.S.
3월 8일 저녁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 만난 벤피카와 리버풀 경기를 보기위해 일정을 취소하고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로비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전반 40여분 쯤, 벤피카의 포워드 시망 사브로사의 중거리 슛이 터지는 순간, 평소에 리버풀 서포터즈였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리스본은 연고로 하는 벤피카는 지난 10여 년간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가 작년 리그 우승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 예선에서 맨체스터를 물리치고 16강에 진출하더니 급기야는 작년 우승팀 리버풀을 연파했다. 리스본에서 벤피카와 리버풀의 경기를 리버풀 서포터즈인 한국인 내가 경기를 시청한 것에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글로벌한 문화의 위용을 절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리를 만끽하는 리스본 시민들에게서 국지적인 일상의 소중함으로 발견한다. 그리고 평상시 소박한 리스본 시민들의 카니발적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2003년 챔피언스리그에서 FC 포르투갈이 우승했을 때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 시민들의 광란의 축제를 TV를 통해 목격한 바 있다. 2002년 광화문이 생각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예술교육도 이러한 리스본 대중들의 일상적 카니발을 위한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오버한 말일까?
----------------------------------------
'문화예술교육, 세계적인 교류의 물꼬를 트다'
- 2006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글 l 박남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기획홍보팀 팀장)
지난 3월 6일부터 9일까지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on Arts Education)가 나흘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는 세계 97개국에서 1,200여 명의 문화예술교육 관련 정책 담당자, 학자, 전문가 및 NGO 관계자가 참여했으며, ‘21세기 창의력 개발(Building Creative Capability for the 21st Century)’을 주제로 전체 회의, 주제 발표, 워크숍, 세미나, 프리젠테이션 등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을 통한 활발한 정보 교류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번 세계대회는 파리에 본부를 둔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비교적 오랜 기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포르투갈 정부가 함께 공동 주최를 맡아 몇몇 국제적인 민간 예술교육 NGO의 협력을 바탕으로 마련되었다. <2006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의 철학적 근간은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국제회의와 1998년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열린 <개발을 위한 문화정책>에 대한 국제회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1997년의 파리회의는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고 지원하기 위한 회의로 이루어진 것이며, 1998년의 스톡홀름 회의는 국제사회에서 예술교육을 상호교류하기 위한 정부 상호간의 첫 번째 시도였다는 의미가 있다. 이 두 회의를 통해 부각된 쟁점들은 유네스코의 정례회의들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2003년의 32번째 정례회의에 이르러서는 <2006년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를 포르투갈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게 된 것이다.
대회 첫 날 축하공연을 곁들인 개막식과 기조연설로 나흘간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기조연설 가운데 특히,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공교육이 예술교육의 가치와 중요성에 주목해야 함을 역설한 켄 로빈슨(Sir Ken Robinson)은 특유의 호소력 있는 화법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어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주제로 전문가 패널과 예술교육이라는 공공영역 활성화에 필요한 다양한 파트너십을 다룬 라운드 테이블이 이어졌다. 이와 함께 같은 시간대에 음악, 무용,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별로 사례 발표와 소그룹 형태의 워크숍도 병행 진행되어 참가자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 장소를 바꿔가며 네트워크를 넓히고, 정보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술교육의 사회, 문화, 경제적 효과에 대한 논의로 시작된 이틀째 행사의 두 번째 패널과 같은 시간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구체적 실천 과제를 논의하는 ‘액션 아시아 플랜(Action Asia Plan)’이 진행되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김주호 원장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 관련 기관 및 전문가 간의 예술교육에 대한 지식의 공유 및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온라인 기반이 되어줄 옵서바토리(Observatory)의 모델로 문화예술교육 사이트 ‘아르떼’를 소개하여 주목을 받았다.
대형 공연장 객석에서 진행된 이틀간의 회의와 달리 사흘째 행사는 소강당에서 열렸으며, 각 지역별, 국가별로 세분화된 주제 하에서 치러졌다. 먼저 이번 세계대회를 위해 4개 권역별로 개최된 준비회의의 결과가 권고안의 형태로 보고되었는데, 창의력 향상을 예술교육의 주목표로 삼고 있는 점과 파트너십, 새로운 교수학습방법론, 전문 인력 양성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공통의 관심사로 다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진행된 주요 국가의 문화예술교육 정책 사례 발표에서는 문화관광부 용호성 문화예술교육과장이 문화부를 중심으로 교육인적자원부, 여성가족부, 국방부, 법무부와의 협력을 통해 다각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사업과 지난 해 12월 통과된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에 대하여 소개했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은 벤치마킹 사례로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회의 기간 동안 향후 협력과 교류 여부를 넌지시 타진하기 위한 접촉을 시도해오기도 했다.
오후에는 세계대회 이전부터 온라인 형태로 세계 각지 전문가들을 연결해 가동된 ‘예술교육 로드맵 위원회’에서 작성한 로드맵 초안이 발표되었다. 로드맵은 예술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공통의 이해 증진을 위한 주요 개념, 목표, 실천 전략, 연구 및 지식 공유 방안 등을 내용으로 포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나흘 간 회의 기간 가운데 가장 뜨거웠는데,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각자의 처한 입장과 견해에 근거한 다양한 이견이 제기되었고, 항목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인도나 아프리카권 중심의 저개발 국가는 물론, 프랑스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 대표들도 각자의 의견을 보탰다.
한국 대표단에게는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나흘째 회의는 장관급 인사들이 문화예술교육 활성화와 관련된 각국의 정부 역할과 비전에 대하여 발표로 시작되었다. 대표단 단장으로 연단에 나선 문화관광부 박양우 정책홍보관리실장은 우리의 교육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종합계획’, ‘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설립’ 등을 예로 들어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예술교육 활성화 정책이 사회공동체성 강화와 창의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의 정례화 필요성에 대한 언급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강한 정책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 2010년으로 예상되는 차기 대회를 유치할 의사가 있음을 공식 발표하여 청중석으로부터 박수와 함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와 같은 차기 대회의 한국 유치 의사 표명은 대회 권고안(Recommendations)에 명시되었고, 유네스코 본부에서 회의가 끝난 후 배포한 보도자료에서도 이번 대회의 두 번째 주요 성과로 제시되기도 했다. 사실 차기 세계대회의 국내 유치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준비회의에서 회원국들로부터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은 바 있으며, 이번 예술교육 세계대회에서도 한국정부의 문화예술교육 지원정책이 모범사례로 부각되면서 차기대회의 국내 유치가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 마지막 날에는 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로드 맵과 권고안 초안이 채택되었는데, 예술교육이 문화적 감수성을 함양하고 창의력을 신장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인류의 번영과 평화적 공존에 기여한다는 공감대가 명문화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이번 세계대회에서 채택한 대회의 목표나 주제어와도 긴밀히 연관되는 것이다.
이번 세계대회는 첫째, 예술교육의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규정하고, 둘째, 창조력을 강화시키는 실용적 예술교육의 기회를 사회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제공하며, 셋째,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천명하고 그 교육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지적, 정서적 성장에 영향을 주도록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이 세 가지의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세계대회는 네 가지의 주제어를 채택하였는데, 예술교육에 대한 옹호(Advocacy), 예술교육의 영향(Impact), 예술교육의 구체적 전략(Strategies), 그리고 교육을 위한 교사의 훈련(Training)이 그것이다.
결국, 후기산업사회에 예술교육을 통한 창조력의 중요성을 옹호하고, 실제로 예술교육의 효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영향력을 설파하며, ‘모두를 위한 예술교육’ 이라는 유네스코의 목표처럼 각국의 정책을 연구하고 전파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동시에 예술교육을 담당할 교사들의 훈련을 강화시키고자 함이 이번 세계대회의 주요한 핵심이었던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전 세계적인 공감대나 정책적 교류와 함께, 한국대표단 차원에서도 이번 세계대회는 뚜렷한 성과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세계대회를 통해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한국의 위상에 대하여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간 한국이 추진해온 문화예술교육 지원정책 사례가 폭넓은 관심과 공감대를 얻었으며, 이를 밑바탕으로 차기대회 유치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많은 호응을 얻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예술교육 세계대회는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정책을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기대회의 국내 유치로 향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감과 동시에 학계, 교육계, 문화예술계를 아우르는 문화예술교육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국제회의를 유치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향후 세계대회를 토대로 또는 그 과정에서 어떤 결과물을 생산하고, 어떤 과정으로 준비해나가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번 대회는 각국의 서로 다른 환경과 출발점을 확인하고, 서로 다른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입장이나 견해의 차이 역시 확인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환경과 조건, 입장과 견해의 차이는 결국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범세계적인 교류의 현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번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는 나름의 한계와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회의로 평가할 수 있겠다.
예술교육의 교류와 국제적 연대는 그 한계와 차이를 서로 확인하는 것을 바탕으로 출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번 포르투갈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그 물꼬를 텄다면, 이 물꼬를 넘고 돌아 땅을 적시고 강을 흐르게 만드는 것은 한국에서 열릴 차기 대회에 맡겨진 책임이자 역할이라 하겠다.
------------------------------------------------------------------------------
'창의성과 사회적 인식 소통능력이 살아있는 문화예술교육을 꿈꾸다'
-리스본에서 만난 문화예술교육의 키워드들
글 l 정현선 (경인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2006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가 3월 6일부터 9일까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열렸습니다. "21세기를 위한 창의력 건설 (Building Creative Capacities for the 21st Century)"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유네스코와 포르투갈 정부가 주최한 이번 세계대회는, '국제음악교육협회'(ISME), '국제연극교육협회'(IDEA), '국제미술교육협회'(INSEA) 등 국경을 뛰어넘는 여러 비정부기구들의 협력과 각 지역별 준비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네스코 회원국들의 교육 및 문화관련 정부부처 대표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교육자, 연구자들이 이례적으로 한데 모인 이 나흘 동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웹진 땡땡은 세 편의 참관기를 통해 이번 세계대회의 면면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먼저 정현선 교수는 첫날의 기조연설에서부터 대회기간 동안 소개된 각국의 사례들에 이르기까지 차분하고 세심한 어조로 되짚어보면서,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를 조심스레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동연 교수의 글은 이번 대회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을 통해서 '카니발 페다고지'로서의 예술교육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박남진 기획홍보팀장의 글은 '문화예술교육, 그 세계적인 첫 걸음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입니다.
예술교육 세계대회의 다음 개최지는 한국입니다. 포르투갈에서 한국까지, 리스본에서 서울까지, 세계 각국의 상상력과 고민이 도시와 도시를 잇고 국경과 국경을 넘어 행복한 협주곡을 만들어내길 기대해봅니다. ㅣ 편집자주
유네스코 문화국이 주최하고 포르투갈 정부가 주관해 리스본에서 열린 세계예술교육대회에, 지난 2006년 3월 6일-9일까지 4일간 참여하고 돌아왔다. '21세기를 위한 창의적 능력 수립'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세계대회는, 지난 2000년에 유네스코가 수립한 '모든 이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과 '문화 다양성 프로그램'의 틀을 기반으로 기획된 것으로, 그 방향에 있어 '예술 자체의 교육(Education in Art)'보다는 '예술을 통한 교육(Education through Art)', 즉 예술을 통한 창의성 신장과 사회적 인식 및 소통 능력 향상에 초점을 두어 진행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차기 세계대회를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문화관광부와 교육인적자원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민간전문가로 대표단을 구성해 참가했는데, 필자는 이 대표단에 민간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번 대회에서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창의성과 문화다양성을 핵심어로 하는 예술교육의 철학과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며, 이는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커리큘럼, 이에 대한 연구와 평가, 교사교육 등에 의해 어떻게 뒷받침될 수 있는가를 이론과 실제의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시사점을 찾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분야에서 지난 몇 년간 정부 차원의 다양한 지원 사업들이 있어왔고,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다양한 분야의 우수 사례가 발굴되어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이 낯선 용어는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교육' 앞에 접두어처럼 붙어 있는 '문화'의 함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충분히 합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취지에 적합한 실천과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이 제기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교육'의 의미를 예술 자체의 교육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창의성 교육과 문화 다양성 교육에서 찾고 있는 이번 세계 대회 참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방향에 있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기대되었다. 참석 전에 살펴 본 대회 프로그램에 제시된 많은 강연자와 워크숍 참가자들의 이름과 소속기관은 필자로 하여금 이러한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화려했기에, 필자는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포르투갈로 향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본회의장에서 있었던 주제 발표와 사례 보고, 본회의장 밖의 사례 프리젠테이션과 워크숍 중에서, 앞서 밝힌 초점과 관련해 필자가 관심 있게 본 것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예술교육을 통한 성숙한 시민 만들기 대회 첫날 기조연설을 맡은 사람은 미국 남가주 대학교의 '두뇌와 창의성 연구소' 소장이자 심리학과 신경학 전공 교수인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였다.
두뇌 연구와 예술교육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 하며 들었는데, 그의 연설의 초점은 두뇌와 정서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놓여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예술교육이 요구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점 진단과 심리학과 신경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통해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연설의 핵심 내용은, 전통적으로 학교 교육에서 강조해온 수학과 과학 교육은 그 자체로 '시민'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예술교육과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속도'는 다양한 기술 발전과 세계화의 압력 하에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의 속도를 정서 체계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개인의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사회적 기능 장애가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마시오 교수는 이와 같은 사회에 대한 성찰적 이해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 형성에 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신경과학이 이룩한 연구 성과는 이러한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있어 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건전한' 행위는 정서적 발달을 요구하며, 정서적 발달에 예술교육이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로 첫째, 정서는 행위와 관념의 질을 규정하는 일종의 형용사로서 기능한다는 연구, 둘째,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구조가 사회적 정서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연구, 즉 관념과 행위는 정서와 병행해 발달한다는 연구 등을 들었다. 도덕적 발달이 완성된 성인도 두뇌 손상 시 정서 체계가 손상된다는 사실 역시 관념과 행위가 정서와 연관됨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정서와 인지가 날이 갈수록 더욱 분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한쪽에 치우친 학교교육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시민을 양성하는 일은 정서 체계의 발달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윤리적 행위는 성찰과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며, 이는 예술과 인문학 교육과정에서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마시오 교수의 주장의 전제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가 첫 번째 전제로 삼은 것은 인지와 정서를 분리하여 보는 양분법적 사고의 문제점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예술교육자들에 의해 널리 공감을 얻어온 주장이다. 이는 뒤에 연설한 켄 로빈슨 교수를 비롯해 많은 강연자들에 의해 대회 내내 되풀이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전제는 예술교육 역시 전통적으로 그것이 행해져 온 방식, 즉 예술 자체의 교육을 고립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문학적 교육과 맥을 같이 하며 장르를 넘나들어 보다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영화 등 개별 장르의 미학적 관습과 작품 이해 및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예술교육의 관행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적 방식의 예술교육은 그 자체로 다마시오 교수가 강조하는 시민 양성이라는 목표에 부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교육
이와 같은 다마시오 교수의 연설이 이번 세계대회의 첫 번째 기조연설이었다는 점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나흘간의 세계대회 기간 내내 예술교육의 개념과 접근법에 대해서 상당한 입장 차이가 발견된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특징만 살펴보면,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나 개인의 직업 창출과 같은 실용적 측면에 예술교육이 수단적으로 기여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다분히 경제 중심의 논리를 펴는 입장도 있었고, 이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입장도 있었다. 한편 문해력이나 수리력과 같이 근대 이후 학교 교육에서 전통적으로 중시해 온 학습 능력과 예술교육이 중시하는 창의력은 양립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럼에도 예술교육의 목표가 문해력이나 수리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다양한 예술교육을 통해 창의성이 신장되면 그 결과 문해력이나 수리력이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예술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회 셋째 날 OECD에서 온 연구자가 예술교육이 실제로 수리력과 문해력에 도움이 되는가를 상관도 조사를 통해 입증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문제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쇄도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마시오 교수의 연설은 예술교육이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에서 중시해온 학업 능력이나 직업 창출과 같은 예술 외적 목표에 수단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식의 실용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예술교육이 예술 자체의 교육이 아니라 시민 양성과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때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 연극, 소설, 영화, 음악, 그림 등의 교육에서 다마시오 교수가 중시하는 가치는, '예술을 통한 사회의 반성적 이해'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 형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인식했던 때문인지, 이후 예술교육의 권고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예술교육'이라는 용어 대신 '예술과 문화 교육'을 권고안 제목 자체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유네스코에서 말하는 예술교육에 이러한 문화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주장이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 교육'을 함께 권고안의 제목에 넣자는 주장은, 우리나라에서 '예술교육'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명칭을 정책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예술교육을 통한 성숙한 시민의 양성이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새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교사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교사와 예술가, 매개자들이 이와 같은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방향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너무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별 예술 장르에 고유한 특성의 교육에 치우친 나머지 문화예술교육의 큰 목표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또 구체적인 프로그램 자체는 재미나지만 막상 그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술교육, 수사와 실행 사이의 간극
다마시오 교수의 기조연설에 이어진 켄 로빈슨(Ken Robinson) 교수의 연설은, 문화예술교육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회가 열리는 나흘 내내 다양한 발언자들에 의해 반복해서 인용되었고, 이에 따라 필자의 고민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예술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정서 발달, 시민성, 사회적 감성의 세 가지 측면에 있음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술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면, 그 필요성에 대한 수사는 많은데 비해 실질적인 제공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술교육의 실질적인 지위와 질이며, 여기서 전체를 조직하는 주제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사실 이처럼 예술교육이 정치적 수사에 비해 실행에서 뒤처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지난 해 한국에서 열린 아태지역 준비회의에 참석했던 앤 뱀포드(Anne Bamford) 교수의 세계 예술교육 현황 발표에서도 지적된 바 있으며, 이 내용은 <'와우' 하고 탄성을 지르게 하는 요소(The Wow Factor)>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로빈슨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실천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라고 강조했다.
우리사회 내적으로 보면 보다 내실을 기하기 위해 성찰하고 평가해야 하는 문제가 분명 남아 있기는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추진되어 온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제도의 도입 측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관심과 부러움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만은, 비단 로빈슨 교수의 지적에서만이 아니라 회의장 밖에서 만난 많은 이들의 시선과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춘 문화예술교육의 제도를 실질적인 공급의 측면에서 질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더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로빈슨 교수는 특유의 유머 감각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 근거해 내내 청중을 사로잡으며 주장을 펴 나갔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교과목의 위계가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언어와 수학이 가장 우선시되고, 그 다음이 인문학 계열의 과목이며, 맨 마지막에 찬밥 신세가 되는 것이 예술 교과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왜 춤이 수학만큼 가르쳐지지 않는가, 혹은 두뇌와 같은 신체의 일부만이 특권화 되는가, 공교육의 목표가 최종적으로는 '대학 교수 양성'에 있는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은 간과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 현재의 학교 제도에 이론적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교 교육은 특정 방식의 사고를 강조해 왔으나, 이제는 보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공장'에서 '허브'로 : 변화하는 교육의 의미와 철학
그의 연설에서도 강조된 것처럼, 현재의 학교는 19세기 산업 혁명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사회에 공급하게 위해 생겨났다. 산업혁명기의 교육은 삶의 전반기(아동기)에 집중되어 있고, 교과목 중심이며, 위계질서에 사로잡혀 있고, 노동 분업을 원칙으로 하며, 순응성과 선조성(線條性)을 강조하여, 기본적으로 '공장'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전반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학습, 교과목이 아니라 지식 분야 중심, 위계질서가 아니라 균형, 노동 분업이 아니라 협동과 학제적 접근, 순응성과 선조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의성, '공장'이 아니라 '허브'가 되는 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와 관련해 로빈슨 교수 역시 예술은 문화와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도시에서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문화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예술교육의 시수를 좀 더 늘려달라는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를 아예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당연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교육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과 교사 양성, 대안적 평가 방식의 도입이 중요한데, 오히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의 목표가 지나치게 낮은' 데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실행 방안을 설계하고, 그 실행에서 애초의 목표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사실 대회가 치러지는 나흘 내내 '창의성'과 '문화 다양성'이라는 말이 어쩌면 자칫 남발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이 논의되어 대회 후반부에는 다소 식상하게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대회 첫 날 있었던 다마시오 교수와 로빈슨 교수의 연설만큼은, 새롭게 요구되는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적 기초로 작용하는 것으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아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를 바탕으로 교육 제도를 새롭게 디자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을 찾으려는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후 필자의 관심은 이와 같은 문화예술교육의 목표를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 어떤 커리큘럼이 개발되었으며, 교사 양성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평가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연구되었는가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들로 옮겨졌다.
본회의장에서 발표된 우수 사례들의 면모를 대체로 살펴보면, 우선 시각예술ㆍ음악ㆍ춤ㆍ연극ㆍ시 창작과 퍼포먼스ㆍ영화와 뉴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되, 문화 다양성과 사회적 문제 인식과 이를 예술적 소통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사례들을 소개하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만 스케치 형식으로 언급하면, 우선 영국의 경우 교사교육을 위해 2005년 2월에 디지털 방송을 시작한 '교사들의 텔레비전(Teacher's TV)'을 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다. 영국의 사례는 특히 ICT를 활용한 교사 교육이라는 기술적 측면의 진보, 내용적으로는 보다 큰 교육 목표를 위한 예술교육의 활용을 강조하는 방법론과 교과교육의 방법론으로서 예술교육을 활용하는 것, 예술교육을 통한 직업 창출 등이 강조되었다. '교사들의 텔레비전(Teacher's TV)' 사례는 특히 교사교육의 방법론과 기술적 측면에서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외에 소개된 프로그램 사례로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위해 퍼포먼스 하는 것, 오케스트라를 통해 사회 문화의 통합을 추구하는 음악 프로그램, 사진과 글 혹은 시를 결합시켜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고 슬라이드 쇼를 통해 소통하게 하는 것, 그리고 예술을 민주주의의 학습을 위해 활용하는 것에 대한 강조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예술을 통한 사회적 인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로빈슨 교수의 주장과 같이 문화와 예술이 구별되지 않고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은 주최 측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에 대한' 교육과 '예술을 통한' 교육
짧은 글 속에 대회의 면면을 세밀히 소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사례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미국 뉴욕시의 영상교육센터인 'Jacob Burns Film Center'를 들고 싶다. 이 사례는 우선 교육과정 개발 측면에서, 전문적인 '커리큘럼 매니저'가 센터에 상주하면서, 자체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학교 연계 교육 프로그램 역시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평가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개발과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또한 대회 내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예술 자체에 대한 교육'과 '예술을 통한 교육'을 훌륭하게 결합, 병행시키고 있는 점도 눈에 띄었다. 즉, 영화라는 예술의 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하면서도, 이를 사회적 주제나 이슈와 접목하여 배우게 함으로써,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교육 그리고 영화를 통한 사회적 인식을 중시하는 예술을 통한 교육 모두를 성취하고 있었다.
또한, 초등학교 연령대의 어린이를 위한 교육에서 중고등학교 연령대의 청소년을 위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정서와 사회적 발달 과정에 적합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개발해 적용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기조는 '이야기가 지니는 힘'의 이해와 '시각적 리터러시' 능력을 바탕으로 한 미디어 창작과 소통이었다.
이러한 일관된 기조 하에, 8-18세에 이르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상 언어 교육과 관람 포인트를 가르치는 교육, 짧은 애니메이션을 협동하여 만들어보게 하는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교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포나 꿈과 같은 정서와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영화를 보는 프로그램, 노인에 대해 조사하고 '대화적 과정'을 강조하여 영화를 제작하게 하는 상급 연령 청소년을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등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의 바탕에는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발달 단계에 대한 치밀한 진단과 그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문화예술교육의 철학 측면에서 상위적으로 조정하고 모니터하는 전문적이고 섬세한 안목이 있었다.
또한 실험적인 커리큘럼과 교육방법론을 디자인하고 이를 적용해 본 후 이에 대한 평가와 연구를 통해 잘 되는 사례를 기록으로 남기는 실행 연구의 노력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그 노하우를 학교 교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경험의 전수 노력도 있었다. 결국 교육을 받는 주체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예술의 근본을 잃지 않는 커리큘럼과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좋은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파트너십의 사례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 및 교육방법론 개발과 평가, 교사교육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영국의 실행 연구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관여(Engage)'라는 이름의 연구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이는 시각 예술과 미술관 교육 분야의 커리큘럼 및 교육방법론의 실험을 학교와 미술관, 그리고 대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3개 주체가 협동하여 디자인하고 실행한 후, 이를 연구 결과로 보여주는 공동 프로젝트이다. 이는 영국의 교육부와 문화부의 공동 프로젝트이기도 하며, 테이트 갤러리와 같은 주요 미술관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커리큘럼 및 교육방법론의 개발과 이에 대한 질적 연구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연구 문제로는 "미술관 교육이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웰빙(Well-being)'을 촉진하기 위한 지식, 기능, 자신감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미술관 교육의 경험은 학생들에게 자기 정체성과 창의성을 고려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가?"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문화예술교육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연구 문제를 선정하고,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을 실험적으로 설계한 후, 그렇게 디자인된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에 대한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연구의 설계와 실행에 대한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예술가, 학교 교사, 미술관 교육자들 간 파트너십을 강화하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2004년 12월-2006년 3월까지 1년 반에 걸쳐 시행된 연구의 최종 결과는 올해 9월에 웹사이트(http://www.en-quire.org)를 통해 발표될 것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7가지 측면에서 미술관 교육의 의의를 살펴볼 것이라 했다. 그 7가지는 ① 맥락: 사회적 배경, 학교의 정서(ethos), 자원, 교사의 경험 등 ② 프로젝트의 목표: 과정이냐 결과냐 ③ 가치: 커리큘럼과 자격(직업적 전망) 측면 ④ 공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이 지니는 해방적 가치 ⑤ 시간: 일반적인 학교 시간표 이외의 시간 ⑥ 자신감 ⑦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 등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연구 문제를 설정하고 그 문제에 답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을 설계하도록 하며, 실행되는 수업에 대해 탐구하는 연구자의 역할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연구자이자 교사교육자인 필자로서는 새삼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연구 역량을 재고하기 위해 현재의 미진한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찰적인 교수 설계와 이에 대한 반성적 연구일 것이다. 나흘간의 세계대회 내내 핵심어로 언급되었던 창의성, 사회적 인식, 문화 다양성, 소통 능력 등의 말들이 힘을 갖는 방법을 찾는 일은 바로 이런 시도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출처
http://arte.or.kr/mWebZine/2.aspx?bpro=view_41_11_1_12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