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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라(히11:13-16)-2024.2.11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거기에는 기라성같은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한결같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중심의 믿음은 히브리서11장6절을 보면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요,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은 존재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작이요, 결론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의 전부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자라면 반드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이라 함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 삶을 주관하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상주시는’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미스다포도테스’로서 보상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의도하는 상주심의 의미는 구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서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른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두 개의 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재하심이 내안에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이른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지요. 그리고 그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상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그 믿음도 역시 건강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음이요,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 증거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능력입니다.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았기에 그들의 세대는 물론이요, 후세대들에게까지 가장 참신한 신앙인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졌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면서 세상을 이기고 원수마귀 사단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살아있는 새우는 물을 거스려 올라가지만, 죽은 고래는 떠내려갑니다. 그것이 생명의 차이입니다. 우리 가진 믿음은 생명입니다. 내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진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1) 이 사람들을 보라(13절)
본문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에서 거론한 믿음의 선진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거론한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믿음의 살았던 모든 인물들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은 오직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 주변에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믿음을 따라 죽지 못하는 인물들도 상당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은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13절에는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숱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 우리 살아생전에 성취되는 약속도 있고, 그러지 못한 약속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당대에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거론한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대표적인 것이 어떤 것일까요? 사실 후손에 대한 약속도 그들 시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중에서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당대에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당대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보고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에서 의도한 것은 아무래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약속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약속의 땅을 획득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거주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육신의 눈으로는 받지 못하였으나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들이 일어날 것들을 믿음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히브리서11장1절의 말씀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을 바라보고 믿었던 것이지요. 조금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비록 그것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는 말은 멀리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사실 가나안에 대한 약속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가장 먼 거리에서 보았을 것이요, 야곱보다는 이삭이 더 먼 거리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지요. 이것이 이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의 믿음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우리는 금방 이뤄지지 않으면 믿음이 식어버립니다. 냄비근성이 강한 우리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인 것이지요. 하지만 믿음의 선진들은 비록 당대에 그런 약속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신빙성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2) 이 사람들의 의식구조
오히려 그들은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여기서 환영한다는 뜻은 탄성을 자아내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내게 주어진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을 지금 되어진 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중단됨이 없이 계속 정진하는 믿음의 역사인 셈이지요. 그들이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 땅을 천년만년 살고 지는 세상이 아니라 잠간 머물다가 떠나가는 정거장으로 본 것이지요. 주님이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달려갈 세상으로 본 것이지요.
그런 의식을 갖고 사는 데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오늘밤이라고 부르시면 지금까지 목숨 걸고 쟁취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남겨두고 떠나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아등바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외국인은 잠간의 체류기간이 지나면 떠나가야 합니다. 만약 떠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되어 추방당할 수 있습니다. 혹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본국으로 떠나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의 본국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빌립보서3장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외국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언제 본국으로부터 소환명령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소환명령이 떨어지면 즉시로 귀국해야 합니다. 이 땅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고 숨을 곳이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지체할 곳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외국인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항상 본국을 사모하며 살아야겠지요.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은 나그네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는 잠시 스쳐가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순례하는 여행객입니다.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필요한 짐만 가지고 이동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원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우리처럼 이곳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곳은 잠간이지만 저 영원한 천국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지요.
실제로 아브라함도 자기가 거주하는 곳은 어디든지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 헤브론에서 살던중 아내 사라가 127세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헷 사람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창세기23장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로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매장할 땅 한평도 없이 그곳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그곳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방백으로 불렀습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련만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그곳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던 것이지요. 그곳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자기들의 묘실에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금할 자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매장지를 합법적으로 구입합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상당한 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입니다. 물론 그냥 쓰시라는 호의를 거절하고 구입한 것이지요. 은 4백 세겔로 말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땅 한평 없던 자였습니다.
야곱도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자기를 나그네로 지칭합니다. 창세기47장9절에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 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자기 삶의 흔적이 나그네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많이 가져야 하고, 많이 누려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나그네 의식이 없는 것이지요. 나그네는 장막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나그네는 잠간 있다고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배낭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가벼운 짐만 챙겨서 떠납니다. 나그네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미련이 없습니다. 나그네는 본향에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본향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이 땅이 좋아도 본향보다 좋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이 힘들어도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잠시잠간 받는 이 땅의 어려움으로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오직 나은 바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 이 사람들의 믿음
얼마든지 그들에게도 자기가 나온 바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떠돌이처럼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자기가 떠나온 본향으로 돌아가면 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도 얼마든지 그런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 아비 데라를 따라 나오다가 하란지방 이르러 아비 데라를 잃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비를 장사지내야 하는 아들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솔직히 떠돌이로 살다가 아비를 장사지내야 하는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최소한 갈대아 지방에서는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들의 아픔에 동참해주었으련만 객지를 떠돌아다니던 그들에게 누가 그들의 슬픔을 알아주었겠습니까? 어쩌면 너무나 비참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아버지가 자기들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의 꿈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고향을 떠나왔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가족중에 누군가 제안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 가족의 인도자가 데라에서 아브람으로 순식간에 바뀝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을 상대하기 시작하십니다. 그에게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도저히 아브라함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미션과 함께 비전을 선포하시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장차 자기들의 일정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미션을 주시고 비전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감히 갈대아 지방으로 떠날 생각을 추호도 못하게 막아버리신 것이지요. 결국 데라를 통해서 갈대아 우르에서 꺼내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는 이미 나은 바 본향을 향해 예비된 영혼이었던 것이지요. 그것도 히브리민족의 믿음의 시조로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가 나온 바 본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지요. 이로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애굽으로 가지 않고 자기가 떠나온 본향 갈대아 우르지방으로 돌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것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자꾸만 옛것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세상을 동경하며 그리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심을 이겨내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긋지긋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으름장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푸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또한 나온 바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거듭났다가 율법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심리를 말합니다. 절대 믿음의 사람들은 이전 것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이 나온 바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나은 바 본향이 예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온 바 본향은 육신의 고향이요, 나은 바 본향은 하늘 본향입니다. 더 나은 바 본향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땅에 있는 본향은 잠간 있다가 없어질 곳입니다. 그러나 하늘 본향은 영원한 본향이지요. 고린도후서4장1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육신의 사람들은 보이는 본향제 집착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그래서 영적 본향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성을 예비하고 계십니다(히11:16). 그리고 믿는 자들은 그 성을 찾은 사람들입니다(14절). 그래서 날마다 그 예비된 성을 바라보고 그 성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10절). 오늘 우리는 본문 13절에 나오는 이 사람들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들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들의 믿음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입니다. 그분들은 마지막까지 믿음을 따라 죽은 자요, 항상 그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외국인이었고, 나그네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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