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임에서 고향의 봄노래가 나오는데, 어머니와 함게 온 꼬마녀석이 저 노래는 어디서 나왔는데? 라고 묻는다. 그 어머니도 주위의 어른들도 나도 대답이 잘 나오질 않아 어물쩡 넘어갔다. 이 참에 그 어린이를 통해 고향의 봄노래의 유래를 함께 배우기로 해요.
저 북쪽 두만강에서 부터 한라산까지 남북한 7천만 겨레 모두가 가슴으로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 " 나의 살던 고향은~~~~" 은 1926년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져 남북이 함게 부르는 노래로 우리 민족이 세상 어디에 가서든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고향의 봄 / 하모니카 연주
고향의 봄(이원수 시, 홍난파 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 / 어린이 합창
고향의 봄 가사를 지으신 이원수 선생님은 1911년 11월 17일 양산에서 태어나 돌이 되기전에 창원 소답리로 이사를 와서 11살 까지 살았다.마산공립보통학교(소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함안금융조합에서 근무 하면서 해방될 때 까지 마산에 계셨고, 해방후 서울로 와서 돌아 가시는 날 (1981년 1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생활 하셨다.
고향의 봄 노랫말은 이원수선생님이 나이 15세 되던 1926년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발표한 동시로 당시 방정환 선생님이 펴낸 아동잡지 "어린이"에 실려 홍난파 선생님이 작곡하여 동요로 불리워진 삼천리금수강산은 물론 저멀리 간도땅 일본 미국 중국등에 흩으진 민족의 마음에 조국을 심어준 민족의 노래이다.
창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원수선생은 다시 마산으로 이사를 와서 학교에 입학하여 글짓기대회 동시부문에서 "고향의 봄"이란 제목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이
"고향의 봄" 동시의 배경은 창원 소답리였다. 소답리에서 마을 서당을 다녔는데 이곳은 오래된 큰 기왓집과 큰 고목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천주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지고 마을집 돌담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어린마음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뒷산에서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 봄이면 앞들의 파릇한 보리밭 물결, 공기와 바람까지 어린마음을 아롱지게 하였다. 이렇게 창원 소답의 어린 시절 어린 가슴에 새겨진 아름다운 고향 봄의 情感을 추억으로 더듬어 이원수선생님으로 하여금 詩心을 불러 일으켜 마산 글짓대회에 당선되어 이 동시가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노래를 선물하게 하는 동요를 낳게 했으니, 창원의 소답리는 고향의 봄의 産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 어린 학생이 어쩌면 이렇게 좋은 시를 썼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니 훌륭한 선배님을 두신 우리는 행복할 뿐입니다.
방정환 선생님과 함께 이원수(호는 동원)선생님은 1981년 1월 24일 돌아가시 전까지 어린이문학.문화운동의 선구자로서 어린이문학을 어른의 눈이 아닌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쓰신 분이었습니다.
첫댓글 가사중에 ' 꽃대궐을 차리인 동네 ' 란 글귀가 15살 소년에서서 어떻게 나왔을까~ 요즘 중학교 교과서를 보면 제가 학교다닐적에 배우던 시들일랑은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중에 한 구절을 기억하자면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는 구절이 있거든요, 두고 두고 되뇌이고 있답니다..시의 말이란 맘을 바꾸어요.
다시 한번 되돌리는 시간들이 되었었습니다... 쌍무지개님
지개님 덕택에 고향의봄 노래 내력을 잘알게되었습니다.이노래를 들어면 누구나 어린시절과 고향생각이 나겠지요...
""아기 진달래, 꽃대궐 차리인 동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어떻게 이런 보물스런 우리말을 마음에 떠올렸을까!!!!! 생각만 해도 이원수선생님이 존경스럽습니다.
글을 쓰신 쌍무지개님은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신가봅니다.
또 다시 노래 감사에 적어봅니다....
새삼스럽게 들리는 노래입니다. 어릴적 살던곳이 생각나네요,
고향의 봄노래가 마음이 괴로울 때나 울적할 때 위로가 되고 힘을 다시솟게 하는 활력소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