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내용 설명
C. S. 루이스 : 1898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 출생. 무신론자였는데 톨킨 등의 영향으로 영국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기독교 변증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존중했다. 누군가가 편지를 하면 꼭 답장했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라도 봉투에 넣어 보냈다고 한다. 그의 편지를 엮은 책으로는 『당신의 벗, 루이스』 『루이스가 메리에게』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가 있다. 그의 『순전한 기독교』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1944년에 BBC 방송국 요청으로 라디오로 방송한 내용이다. 그는 성삼위일체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한다.
머리말
그가 작업하고자 했던 것은 “순전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 이 책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밝힌다. 그는 다양한 교파가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하나를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합의할 수 있는 내용, 기독교적으로 가장 공통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가 된 이후로 나는 믿지 않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신앙을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순전한 기독교”의 의미다. 그는 ‘응접실’로 비유한다. 하나의 응접실에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람들을 그 응접실로 인도하는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는 총 4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 우주의 의미에 대한 옳고 그른 단서 제2권.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가? 제3권. 기독교인의 행위 제4권. 삼위일체 교리
제1권. 우주의 의미에 대한 옳고 그른 단서 : 사람은 모두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제1장. 인간 본성의 법칙
모든 사람은 “옳고 그름의 법”(자연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법”을 의미한다.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말다툼 할 때 이미 상대방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기준을 가지고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는 내 자리야. 내가 먼저 차지했어”라고 말할 때는 먼저 맡은 사람이 그 자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상대방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약속을 어겼다”고 했을 때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스스로 상대방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기준에 호소한다.” 일상 대화에서 ‘법칙, 규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서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일치가 없다면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는 법칙, 규칙을 사람은 가지고 있다.
모른 물체는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것을 따를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모두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의 법에 복종할 것인지 여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옳고 그름의 법칙이 없다면 전쟁에 대한 말은 모두 허튼소리가 되고, 나치에 대해서 악하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 알기에 나치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문화와 시대가 달라지면 도덕성도 달라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 차이는 총체적이지 못하다.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찬양받는 나라,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배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라와 문화가 있는가? 이기주의자들이 높이 평가받는 경우가 있는가? 자연법이 없다면 공정과 불공정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자연법이 있음을 알고도 그 누구도 그 법칙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자연법을 지키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아나 그것을 모두 지키는 사람,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서 시험을 볼 때 커닝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것을 덮으려고 합리화시키는 논리는 전개한다. 그 덮으려는 변명 자체도 사실은 자연법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제2장. 반론들
루이스는 변증가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첫째, 도덕률(Moral Law)을 “우리의 군거(群居) 본능”으로 보는 것이다. 즉 집단 본능으로 본다. 도덕률은 해야 할 법칙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서 모성애, 성적 본능, 식욕 등과 같은 욕구로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도덕률을 그런 본능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돕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위험을 피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때 돕고 싶든 그렇지 않든 안전하든 그렇지 않든 도덕률은 도우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욕구가 있든지 없든지 불쌍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것은 법칙으로 이미 존재한다. 도덕률은 우리의 본능 중 하나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돕기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원하겠지만(본능임) 도덕률은 그 사람을 도우라고 말한다.
피아노를 예로 든다. 본능들은 건반들과 같고 도덕률은 악보와 같다. ‘도’를 눌러야 하는데 ‘미’를 눌렀다. 그것을 잘못했다고 말해주는 것은 악보다. 도덕률이 본능을 지배한다. 충동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성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마땅하다. 문제는 성 충동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다른 여인에 대해서 일어날 때 그것을 정리해 주는 것이 도덕률이다.
둘째, 도덕률은 사회적인 관습과 교육에 의해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주장이다. 도덕률은 타고난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선천적이지 않고 후천적이라고 본다.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운다. 배웠으니까 타고난 것이 아니고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좌측통행, 우측통행이라는 관습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옳은 행위의 규칙은 배웠다고 해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수학과 같은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국가 사이에 동일한 법으로 꿰뚫고 있다. 도덕률도 그러하다. “당신의 도덕적 사상들이 나치의 사상보다 더 참된 것이 되려면, 그것이 무엇에 대해 참된 것인지를 밝혀주는 진정한 도덕(Real Morality)이 있어야 한다.” 도덕은 상대적이라고 해석하면 문제가 많아진다.
제3장. 법의 실체(실제성)
“자연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것과 옳고 그름에 관한 인간의 법칙이 무엇이 다른지 설명한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탐구해서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돌을 떨어뜨렸을 때 땅에 떨어지는 것을 가지고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연이 늘 하고 있는 일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을 중력의 법칙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인간성의 법칙은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행해서는 안 되는지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보편적 법칙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데 그 법칙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 사람이 행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 법칙은 존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는데 화를 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내가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쁜 의도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내가 넘어지지 않았어도 화를 낸다. 상대방이 나쁜 의도로 넘어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분명한 도덕적인 기준이 존재하고 있다.
루이스는 “유익”의 관점을 가지고도 설명한다. 내게 유익하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자기 유익의 관점으로만 판단할 수가 없다. 반대로 내게 유익하지 않다고 그것이 반드시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루이스는 “정의와 악에 대한 법, 또는 인간성의 법칙은 실재하는 것,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특정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이 특정의 방법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일 뿐이고 인간성의 법, 또는 정의와 악의 법은 인간의 행동이라는 실제의 사실들을 초월하여 그것들을 다스린다.
제4장. 법의 배후에 있는 것
루이스는 지금까지 인간에 대해서 다루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법칙 너머에 그 법칙이 있게 된 무엇이 있지 않는가? 이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주는지 살펴보려고 한다.”고 한다. 그는 우주에까지 범위를 넓혀서 우주에도 그런 법칙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나아간다. 우주가 있게 된 원인을 확대해 간다.
우주의 물질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 유물론자들의 견해가 있다. 그들은 “우주와 물질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주의 존재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원인이 없으니까 목적도 없다.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적인 견해가 있다. 우주의 배후에는 정신과 비슷한 무엇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의식과 목적 등이 있다. 루이스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 배후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의식하게 한다.
과학은 사물을 보고 관찰한다. 그 사물이 왜 존재하는지 그 사물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은 과학의 질문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 검토할 수 없다.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과학을 벗어난 일이다.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자의 개인적인 주관을 넣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무리한 일이다. 과학이 우주를 낱낱이 분석하고 파악하나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알 수 없다.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유일하게 인간이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파악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파악할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내적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다. 1장에서 살폈던 도덕률을 인간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 밖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은 과학으로 관찰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집을 지은 건축가가 자기 집의 벽이나 벽난로 같은 건축 재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건축가의 몸이 건축의 골재가 되지는 않는다. 건축가의 정신이 깃들이는 것이지. 창조주가 우주를 창조할 때 내면에 어떤 법칙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 창조주가 창조물일 수는 없다. 그래서 과학적인 관점보다는 종교적인 관점이 낫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직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5장. 우리에게는 불안의 원인이 있다
루이스는 예상된 반박을 얘기한다.
첫째, 종교는 이미 끝났다는 얘기다. 종교는 옛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루이스는 발전이 무엇인지 숙고한다. 발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시계가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계의 바늘을 돌려놓아야 한다. 발전이란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 잘못 설정되었다면 아무리 앞으로 전진 한다고 해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 잘못된 길에 서 있다면 발전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옳은 길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다. 시대가 바뀐 것이 진보가 아니라 바른길로 가는 것이 진보다. 수학 문제를 풀 때 틀렸으면 빨리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 것과 같다.
둘째, 루이스는 아직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 지금 도덕률의 배후에 있는 존재, 사물의 배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배후에 대한 증거는 첫째, 우주를 통해서 둘째, 그가 만든 도덕률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이나 교회는 언급도 되지 않고 있다. 우주만으로 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그 신은 위대한 예술가이고(우주는 아름답다) 지극히 무자비한 분이기도 하다. 우주는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주보다도 더 좋은 증거는 인간의 내면이다. 도덕률을 통해서 좀 더 하나님을 많이 알 수 있다고 본다.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률이 있다는 것은 옳은 행동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분은 선한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덕률과 같다면 도덕률 자체는 냉혹하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딱 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한다. 신이 인격이 있어야 용서를 말할 수 있다. 루이스의 증명에는 아직 기독교 하나님을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 회개는 용서를 약속한다. 그분은 자신이 회개할 일을 행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할말이 없다고 한다.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에게 도덕률이 있고 그 배후에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법을 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는 진리 안에서 위로를 주는 것임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