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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청금석은 마치 청명한 밤하늘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때로는 휴가지의 해안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들의 머리카락이 청금석으로 돼 있다고 믿었다.
인류가 청금석을 사용한 것은 기원전 5~6천 년 전의 일로 추정된다. 안데스산맥의 원주민들은 칠레 중북부의 광산에서 청금석을 채취했으며 이를 신의 피부를 묘사할 때 사용하였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동부 판지시르 계곡에 위치한 광산에서 채굴된 청금석은 동방견문록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광산이었는데 이 광산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유일한 청금석 광산이었다. 이 광산에서 나온 청금석은 기원전부터 그 선명함과 아름다운 색으로 군주들을 매료시켜 세계 각지로 팔려갔으며, 서쪽으로는 수메르 문명의 여러 도시들과 고대 이집트까지 교역품으로 거래되었다. 심지어 중국까지 수출되었는데 이 청금석은 독특하게도 불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부처의 머리가 파란색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족들이 화장을 할 때 청금석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눈가에 발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에 있는 푸른색 보석이나 투탕카멘의 묘에서 출토된 주요 부장품을 장식하는 파란색 부분들은 청금석이 아니고 파이앙스(faience)라는 유리와 구리를 섞어 만든 세계 최초의 인조 보석이다. 다만 투탕카멘 마스크의 눈 부분과 무덤 내의 벽화 일부에는 진짜 라피스 라줄리가 사용됐다. 또한, 로마인에게도 이는 매우 귀중한 보석이었는데 아르메니아 지방의 소량 산출을 제외하면 전량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로마인들은 청금석을 사파이어의 일부로 간주했었다.
또한, 12세기 이후 몽골제국의 발흥으로 동서양 교역로가 안정되자 레반트 지역과 몽골인들 모두에게 청금석이 유통되었고 이는 획기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과정에서 청금석에 (지중해를 건너온) 울트라마린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르네상스 유럽에서는 청금석을 갈아 울트라마린이라는 파란색 원료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매우 비싼데 당시에도 마찬가지여서 르네상스 시대와 그전 미술품들에는 그림에 파란색이 거의 없다. 그나마 사용된 그림은 예수 혹은 성모 마리아 등 성인과 관련된 그림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청금석과 하양 원료, 검정 원료를 섞어서 파란색이 너무 짙거나, 또는 너무 연해 파란색으로 안 보일 정도이다. 광물에서 추출한 염료이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나무위키-
이 문명권 간의 문화적 교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되었고 광범위했다. 그 교류의 예를 이집트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전인 나카다시대(기원전 4000~기원전 3000년대)에 발견된 상아로 만든 인형에서 찾을 수 있다. 풍요를 상징하는 이 인형은 가슴과 성기 부분이 강조되었다. 특히 눈에는 특별한 보석이 박혀 있다. 파키스탄에서만 출토되는 청금석인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다. 기원전 3600년경 이집트에 문자와 도시가 등장하기도 전에, 한 동네 유력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동네 세공업자에게 인형을 주문했는데 이 세공업자는 파키스탄에서 청금석을 수입하여 인형을 제작하였다. 최초의 무역로인 ‘청금석’ 무역로는 기원전 4000년부터 존재했다.-주간조선-
청금석과 블루 그리고 그리움.
청금석과 블루
청금석(靑金石)은 감청색의 불투명한 가장 오래된 보석 같은 돌(준보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류가 사용한 역사는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귀하게 여겼지요. 찬란하게 광택이 나서 장신구와 조각에 널리 쓰이며, 특히 황금과 잘 어울려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들의 황금 가면에 사용된 유물도 나오고. 최고의 용처는 청색의 물감 안료로 사용되었다고 백과사전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자기 중에 최고의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는 청화백자의 안료로, 어느 것 보다 오랜 세월 바래지 않는 최고의 불루계열 서양 유화의 안료였습니다. 지금은 값이 저렴한 화학안료로 대체되었다고 하지만. 청금석의 한자어로 보더라도 푸름의 금으로 불려진다는 것은 자못 보석의 활용가치가 높다는 것이겠죠. 광물들은 겉보기 색상은 분말 가루 형태 즉 조흔색과는 전혀 생뚱맞게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청금색은 겉보기와 속이 한결같은 색으로 또 변치 않는 불변의 색으로 블루 최고의 질료이기도 하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 중에 블루를 사람들의 40% 정도가 으뜸으로 꼽습니다. 블루의 미묘한 차이는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의 청각 감각으로 비례하여 미분한다면 인간의 가청 음역 구간보다 더 많은 100여 개의 블루로 나눌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염색공이나 화가는 블루계열이 110개 이상의 블루 색상표로 규정하여 사용한다고 하니 절대 시각 감각자가 부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절대 시각 감각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스카이 블루나 페르시안 블루 아니면 검푸른 바다의 검청색 정도, 색을 아는 전문가들에게는 코발트블루나 울트라 마린 그리고 시안도 뚜렷이 차이 있는 블루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과 색의 대대적 관계
빛의 3 원색은 빨강, 초록, 파랑(저는 블루라고 씀)이고 블루의 보색은 노랑이죠. 재미있는 것은 빨강은 초록과 파랑과 대비되는 2대 1 구조입니다. 흥분의 색 빨강과 냉정하고 차분한 색 초록과 파랑으로. 그래서 생활 도처는 기능적인 면을 계산하여 색이 활용되기도 합니다. 시원하고 청량감 있는 여름철 더위 식히는 음식인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는 블루계열로, 핫한 술과 음식은 빨강계열을 포인트로, 정신병원에서 조울증 환자의 방엔 빨강계열의 벽지를 그리고 폭력성을 보여주는 정신질환자인 경우 블루계열로, 대기실은 차분함과 지루함을 달래주는 블루계열로 장식을 반면에 많은 손님들이 순환하여 받기를 원하는 음식점이나 카페 등은 빨강계열의 장식을 하여 손님들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느낌을 받도록 하면 손님 회전이 가속된다고 합니다.
색이 주는 인간의 문제는 다양한 색만큼이나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스펙트럼 이 단어가 나와서인데. 대낮에 무채색의 빛엔 수백 색의 빛으로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죠. 스펙트럼을 통해서 7개의 대표 무지개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모든 빛을 합해놓으면 탁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말해서 흰색 즉 무채색이 된다는 것은 색의 3 원색과 비교해보면 다소 철학적입니다. 빛의 3 원색(빨, 초, 파)의 합은 흰색, 색의 3 원색(빨, 노, 파)이 합은 검정색. 그래서일까, 밝음과 어둠이 대대적(對待的)이듯, 빛과 색이, 불행과 행복이, 이별과 만남이, 채움과 비움이, 감춤과 들춤이.... 어둠이 걷히는 새벽에서 어스름이 물밀 듯 오는 석양 녘까지. 그렇게 돌고 도는 빛과 어둠의 우리들의 순환적 삶.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아득하고 머나만 그리움의 삶일 것 같은.
색과 빛의 총합 그리고 소리
색과 빛의 총합은 각각 흰색과 검정색으로 아우러진 이 총합들은 지극히 편안함과 행복감을 준다. 태중에서 나올 때 고고성으로 세상에 고하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에 그러하지요. 태아와 엄마가 합체된 어둠의 자궁에서 빛의 세계로 던져졌을 때, 빛의 총합인 밝은 세계에 있다는 당황스러움으로 고고성을 울리죠.
그리고 자궁 안에서 아이는 청각적으로 적분 된 엄마의 온갖 소리(심장박동 소리, 소화기관의 꾸르룩소리, 몸밖의 온갖 소리)는 백색소음과 똑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아이는 이런 백색소음이 편안하여 울음을 멈춘다는 사실. 또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주면 울음을 그치고 편안하게 잔다는 실험도 있었습니다.
또한, 갓난아기에게 엄마의 양수를 거즈에 묻혀 코에 대주면 울음을 그친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양수라는 바닷물과 같은 농도로 배어있는 짭조름한 내음에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바닷가 내음에 취하는 것도 생명체가 바다생물에서 진화되었다는 생물학 관점에서 이해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우리가 다시 그 자궁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상상이 가능한지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중에 자리 잡고 있는 태아처럼 낙원의 환경일까? 생존 가능한 상태이고 단지 의식은 태중 밖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자연의 쾌적한 공기 호흡의 그리움, 온갖 백색소음으로 머리의 지끈거림, 짭조름하며 비릿한 양수 냄새의 후각 마비,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공간의 아득함, 게다가 피보나치 수열 방식의 최적 공간으로 옴짝 달싹 못하는 웅크림. 어느 곳이 낙원이고 연옥인지 태중 안일까, 밖일까?
푸름의 그리움
이 해맑은 세상에 변치 않는 청금석 같은 사랑을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살다가 여러 아픔의 인연 중에 청금석 같은 그리움의 추억 한 편이 자신의 일기장 어느 페이지 책갈피로 접혀 있다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슬픈 연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래서 물로도 축여줄 수 없는 목마름 같은 사랑을 한 사람에게는 청금석 블루로 가슴속에 남아 있기도 한다.
블루는 하늘의 색이며 영원성을 가진 신비의 색으로, 눈 만 뜨면 바라볼 수 있어서 안정감을 주는 색이지만 한 편으로는 차갑고 냉혈한 색이기도 하죠. 태곳적 신비를 품고 있는 곳은 이 푸름의 색이 서린 곳이 태반이죠. 동토의 빙하지 얼음이든, 심연의 검푸른 바닷물이든, 지구 밖 우주선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이든, 가을철 청초한 코스모스 들녘의 머나먼 산 너머 하늘빛이든, 다 태곳적 시원(始原)의 시간을 담고 있는 푸름의 색.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아득한 그리움도 그런 이마쥬로 다가오는 색으로써 청금석 블루였을 것 같은 그런.
청금석(靑金石, 라틴어: lapis lazuli, 라피스 라줄리, 래피스 래줄리, 래피스 래줄라이)은 감청색의 불투명한 보석이다. 보석으로 여겨진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돌 가운데 하나로 인류가 사용한 역사는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귀하게 여겼다.
청금석은 하나의 광물이 아니라 여러 광물이 혼합되어 있는데 주 구성 물질은 감청색 광물인 천람석(라주라이트 lazurite, 25-40%, 화학조성식: (Na,Ca)8(AlSiO4)6(S,SO4,Cl)1-2[1])이다. 대부분의 청금석은 또 방해석(calcite, 흰색), 방소다석(소달라이트 sodalite, 청색), 황철석(pyrite, 황색)도 포함한다. 이외에도 보통휘석(augite), 투휘석(diopside), 완화휘석(enstatite), 운모(mica), 남방석(hauynite), 각섬석(hornblende), 노제안(nosean) 등이 청금석의 조암광물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석회암 속에서 발견되는데 접촉변성작용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생산지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 주(Badakshan)가 최고급 청금석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청금석 광산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청금석을 공급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청금석을 공급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속 채취가 행해진 광산일 가능성이 있다.
칠레의 오발레 부근 안데스 산맥에서도 청금석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청금석은 감청색이라기보다는 더 연한 청색이다. 이외에도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부근, 앙골라, 미얀마, 파키스탄, 미국(캘리포니아주와 콜로라도주), 캐나다 등지에서 청금석이 발견된다.
용도
청금석은 잘 닦으면 찬란하게 광택이 나서 장신구와 조각에 널리 쓰인다. 특히 황금과 잘 어울려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들의 황금 가면에 사용되었다. 갈아서 재처리하여 청색의 물감 안료로도 쓰였다가 19세기 초 더 값싼 인공 안료(이른바 '프랑스 군청')로 대체되었다.
[중국도자기]'우과천청'(雨過天靑)의 아름다움, 관요官窯
입력 2015.08.06 16:35
▲ 관요봉황쌍이병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중국 북송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명·청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골동품의 수집 역사를 확인하면 송나라때 사대부들이 관요를 모으는 취미부터 시작하여 명·청대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역사에서 진정한의미의 관요는 명홍무2년에 어요공장을 경덕진에 설립하였다. 최고의 장인을 모으고 최고의 자토를 이용해 황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도자기는 민간에서 사용하고 매매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구워만드는 방법과 배합방법은 대외로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다.
중국도자기는 큰 틀에서는 '관요'와 '민요'로 나뉘어지고 관요는 황실과 귀족을 위한 어용품을 진상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민요는 수출용자기와 서민들의 실생활도구로 생산되었다.
14세기 중국 도자기 산업은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하이테크 산업이었으며 수출을 위해 많을 땐 1년에 1,000만개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란의 아르데빌궁전에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청화백자 618점· 백자 80점·청자 58점 등 여러점의 다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또 터키 톱가프궁전은 세계최대의 총1만358점의 중국 수출 자기들이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중기부터 일부 문인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수집 열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조선 말기부터 실학사상과 함께 다시 살아나고 일제 강점기 경제적 이익에 의해 활성화 되었다.
관요는 송대5대 명요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국제경매에서 그 가치가 여요와 더불어 쌍벽을 이룰 만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우과천청(雨過天靑)이라는 말처럼 맑고 청아하고 깨끗한 비 온 뒤의 하늘의 푸르름에 비유하고 있다.
관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송의 휘종 대관(1107∼1110) 정화(1111∼1118) 연간에 변경에 직접 가마를 설치하고 가마를 제조하였다. 이를 관요라고 명명했는데 그 태토(재료)는 치밀하고 윤기가 있으며 태체(색감)는 박질(엷고 미세한 느낌)이다. 유색은 청색에 분홍색을 띠며, 농담은 일정하지 않고 유면에 해조문이 있다. 구연부는 자색을 띠고 족부는 짙은 흑자색을 띠는 이른바 '자구철족(紫口鐵足) 현상이 나타난다.
북송관요에 대한 송대 사료로는 도종의의 '철경록'(輟耕錄)과 엽치의 '탄재필형'(坦齋筆衡)이다. 탄재필형에는 "정화연간, 수도에 가마를 설치하여 그릇을 굽는데 관요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남송천도 이후 소성장이 후원의 제거(提擧)가 되어 소국이라 불렀는데 북송의 제도를 받들어 수내사에 가마를 설치하고 자기를 소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당초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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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만초무늬[蔓草紋]라고 부른다. 일정한 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줄기와 덩굴이 만들어낸 무늬 모두를 일컫는 것이다. 덩굴 사이에 접속된 식물의 종류에 따라 인동당초·포도당초·모란당초 등으로 분류된다.
당나라에서 유행한 중국 전래의 초화무늬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지만 원래는 이집트에서 기원한 것이다. 측면형의 연꽃과 기하학적인 호형(弧形)의 줄기를 반복하여 소용돌이 모양을 형성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이후 식물무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줄기의 형태가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여러 가지 당초무늬 형식이 이루어졌다.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가진 이집트 당초무늬는 그리스에서 경쾌하고 율동적인 리듬이 강조된 파상형 혹은 S자형의 당초무늬로 변형되었다. 여기에 측면형의 연꽃 2개가 합쳐진 원형의 팔메트(palmetto)가 접속된 당초무늬가 아시리아로부터 전해져 이른바 인동당초무늬의 초기양식이 완성되었다. 또한 줄기에 톱니형의 돌기가 돋은 아칸서스(acanthus) 잎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이렇듯 그리스의 당초무늬는 유려함과 화려한 장식성이 강조되어 사실적인 형상과는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무성한 잎을 가진 당초무늬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헬레니즘 물결에 편승하여 그리스풍의 팔메트 파상무늬와 함께 인도로 퍼져 간다라 미술에서 굽타 미술로 이르는 동안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동남아시아의 당초무늬는 로마 계통의 잎이 무성하게 달린 것인 데 비해 중앙아시아에서는 단순히 도안화된 반팔메트 인동당초무늬가 성행했다. 이것이 실크로드를 통해 한대(漢代)에 중국으로 들어와 큰 변화없이 남북조시대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북위의 둔황[敦煌]이나 윈강[雲崗] 석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특히 삼엽(三葉)의 반팔메트가 즐겨 사용되었다. 남북조 말기와 수대·당대에는 꽃을 접속시키는 것이 유행했고, 시리아 방면에서 영향받은 포도당초무늬도 출현했다. 그 결과 그리스 로마풍의 당초무늬와는 다른 중국적인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대에는 국제적인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듯 호화스런 모란당초무늬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식의 당초무늬가 성행했다. 이후 명대·청대까지 꽃을 접속시키는 유행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시대부터 건축·공예·회화·조각 등 조형미술 전반에 걸쳐 장식의장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쌍영총·각저총·강서대묘·통구사신총, 백제의 능산리 벽화고분 등의 천장이나 벽면 각종 구조물에서, 전국시대 이래 한나라 고유의 유운무늬[流雲紋]와 함께 많이 나타난다. 이외에도 고분출토의 각종 금속장신구류, 기와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불화·청자·동경, 조선시대의 백자·분청사기에도 보편적인 장식문양으로 애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