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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해당 성경 구절 |
해 석 |
첫번째 인; 흰 말 |
계 6: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활”은 대량 살상 무기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쏘아 넘어 뜨리는 무기로 복음의 화살에 비유하여 18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친 세계적 복음 운동과 식민 전쟁으로 해석. 요한 웨슬리와 드와이트 무디의 영적 부흥운동에 즈음한 영국 미국 중심의 세계 선교가 이루어 지고 허드슨 테일러 등 수 많은 선교사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시아, 아프리카로 파송 됨. |
두번째 인; 붉은 말 |
계 6: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림’, ‘서로 죽이게 함’, ‘또 큰 칼을 받음’ 등의 요절에 주목하여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의출현과 이를 통한 이데올로기 전쟁 즉, 사상전쟁으로 해석 함.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러시아 혁명을 통하여 레닌이 정권을 잡는 과정 뿐 아니라 이후 중국, 한국, 베트남, 남미 등 공산주의가 출현 한 나라들의 내전에서 는 나라와 나라를 넘어 세계의 화평이 제하여 졌고, 동족끼리 이념의 차이를 이유로 ‘서로 죽이는’ 동족상잔이 빠짐 없이 있었으며 이런 이념 갈등은 현대 역사에서 여러번의 큰 전쟁을 일으킴. |
세번째 인; 검은 말 |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
경제전으로 해석 함. ‘말’은 전쟁, ‘저울’은 상행위를 의미하므로 경제전쟁으로 보는 것은 여러 성경 학자들 사이에 공통된 견해임. 특히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란 표현은 말세의 전세계적 기근에 따른 물가 폭등과 서민의 삶의 질 저하라는 면에서 오늘날 우리 경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더 해 줌. 오늘날 전 세계의 이슈는 경제문제로 집약되고 있으며 국가간의 외교는 경제 전쟁을 치르는 첨병의 역할로 바뀌고 있음. 저자는 ‘경제전’ 이라는 단어가 언론에서 사용되기도 전인 1960년대 초에 이미 이 본문을 “경제전쟁” 으로 해석하고 이를 강해설교에서 제시해 오고 있으며 아울러 유럽의 경제통합운동을 1951년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발족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고 있음. |
네번째 말; 청황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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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6: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가진 세력으로 가장 걸맞는 집단은 현대사를 조명 해볼 때 통틀어 이슬람권 세력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음. 2000년 대 초 기준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국가의 수는 55개국으로 전 세계 국가수의 4분의 1에 정확히 육박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은 오늘날 알카에다, 탈레반 등을 통하여 확인 되고 있듯이 ‘사망과 음부’가 그 뒤를 따를 만큼 호전적이며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 중동을 망라하여 전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음. 강력한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국제적으로 전략 무기화하고 있는 석유를 보유하고 있는 세력이 또 이슬람 국가이며 이슬람 근본 교리에 세뇌된 나이 어린 이슬람교도 전사들의 잔인성은 가히 ‘짐승’의 수준으로 볼 수 있음. |
2. 첫째 인; 흰 말
본문 해석
계 6: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흰 말” ; 말은 고대로부터 전쟁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 중에서도 흰 말은 왕이나 총사령관 등 지휘자가 타는 말이었다.
“면류관”; 그 탄자가 쓰고 있는 면류관 역시 왕만이 쓰는 관이요 왕이라는 신분의 상징이다. 고로 이 흰 말 탄자는 왕의 신분을 가진 자라고 해석된다.
“활”; 대개 그 당시의 왕은 전투에 임하여는 손에 검을 들고 나오는데 이 본문에서는 검 대신 활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 활은 공격 무기이기도 하면서 또 대량 살상 무기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쏘아 넘어 뜨리는 무기이니 이는 집단보다는 개인 개인을 상대로 한 어떤 싸움을 암시하고 있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이는 전쟁의 계속적인 승리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상의 각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암시의 뜻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 어떤 왕이 엄청난 힘과 전략과 지혜를 가지고 전쟁터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계속 쓰러 뜨리며 계속적인 승리로 그 영토가 확장되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날로 증가되어 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 흰 말을 타고 면류관을 쓰고 활을 가진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이 첫째 인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일곱인의 상징과 해석은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지는 사건들이므로 그 연대의 순서가 중요한데 만일에 첫번 해석이 틀려 빗나가 버리면 다음으로 오는 사건들 모두의 연대가 다 틀리게 되는 까닭이다. 마치 출발점의 좌표 입력이 틀리면 목표 지점이 빗나가게 되는 것과 같고 또 셔츠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단추가 다 잘못 끼워지는 것과 이치가 같다.
백마를 타고 계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한다면 ‘활”은 복음의 활로 화살은 복음의 화살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왜 복음을 활과 화살로 상징했을까? 화살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쏘아 쓰러 뜨리는 무기이다. 이것이 복음의 특색이다. 모친이 잉태 당시에 믿고 있었다고 해서 믿는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가 다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 한 바, ‘신 앞에 선 단독자’이며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나만의 제사장이다.
복음의 살을 맞고 쓰러져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로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개인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활과 화살로 상징하여 요한에게 보여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계시한 것은 매우 적합한 상징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흰 말 예언의 성취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난 흰 말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선교운동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면 기도교가 전세계로 전파된다는 예언이 실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고찰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이 땅에 40여일을 더 계시다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8-20) 하시며 복음 전파에 대한 과제를 제자들에게 부과하셨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최우선 순위의 사명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였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야 성령의 강권적 역사 속에서 비로소 ‘흩어져’ 사마리아 등지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복음 전파와 선교의 역사는 사도 바울이 회심한 이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고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로부터 불러들여 공동 사역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엄청난 속도로 탄력을 받아 드디어 복음은 소아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와 유럽 여러 지역으로 까지 전파된다. AD 325 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종교회의로 마침내 로마 제국 전체의 공식 종교가 된 기독교는 이후 전 유럽을 관통하여 유럽 전부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 유럽을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 시킨 4세기 이후 중세 1,000년을 거치는 동안 – 12세기의 십자군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 기독교는 더 이상 선교를 하는 종교가 아니었고 이러한 선교 부재는 16세기의 종교 개혁 시대에까지 계속되게 된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으나1517년의 종교 개혁 이후 적어도 1세기 동안은 로마 카톨릭과의 교리적, 영적 전쟁과 물리적 격돌 상태로 개신교의 해외선교는 별로 강조 되지 못하였다.
흰말의 세계적 복음 운동과 선교의 세계화에 가장 걸맞는 폭발적 선교의 부흥은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영국의 영적 부흥운동에 힘입은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1800년대 이전에 선교의 개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는 선교단체는 역시 모라비안 형제단이다. 오스트리아의 귀족 진첸도르프 백작 (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 – 1760) 의 보호와 감화 아래 탄생한 모라비안 (Moravian)은 18세기 보헤미아에서 등장한 복음주의자들을 말한다. 보헤미아에서 살던 모라비안들은 1722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독일의 드레스덴의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하게 된다. 3년뒤에는 1백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영지로 이주했는데, 거듭난 그리스도 교인이 된 진젠도르프 백작 자신도 모라비안들과 기도회를 가질 정도로 모라비안의 경건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인 모라비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청 제국, 페르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벌였고,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 창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2년부터 1752년까지 약 20년 동안에 모라비안 교단은 교인 60명당 선교사1명 꼴로 중앙 아메리카, 남미, 알래스카, 남 아프리카 심지어 티베트의 국경지대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8 - 19세기 개신교의 폭발적 해외 선교 운동
본격적인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운동은 18세기 초 영국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요한 웨슬리 ( John Wesley 1703-1791)가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라는 그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고 전 영국에 복음 부흥의 불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의 원동력은 항상 영혼을 구제코자하는 구령의 열정에서 시작되는데 이후 세계도처에서 일어 난 선교운동은 성령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에서 시작된 것이다. 요한 웨슬리의 부흥과 각성운동의 영향은 비단 메소디스트 (감리교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영국에 영향을 주어 요한 웨슬리 이후에 영국의 선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되기 시작했다.
1792년에는 윌리암 케리를 중심으로 대영 침례 선교회가 발족되었고, 1799년에는 대영선교회, 그리고 1804년에는 우리나라의 복음화에도 크게 공헌한 대영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에 우후죽순처럼 영국과 유럽 각국에서 크고 작은 선교회들이 조직되어 근대 선교운동을 조직적 이고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이렇게 범세계적인 선교운동을 일으킨 것은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이제 기독교는 유럽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의 종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 웨슬리 이후 1800년대 초 영국에서 일어난 또 다른 강력한 선교운동은 윌리암 케리 (William Carey 1761- 1834) 로부터 시작되었다. 윌리암 캐리는 인도에서 1793년부터 40년간 사역하면서 선교지 개척과 성경 번역, 현지인 교육 등에 탁월한 성과를 기록하였고 특히 인도와 동남아시아 35개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한 것은 그 지역으로 파송한 많은 선교사의 후기 사역을 돕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윌리암 캐리가 주도한 대영침례선교회의 창립은 개신교 역사상 새로운 한 시대를 열게 되었다. 대영침례선교회의 뒤를 이어 1795년에는 런던선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창립되었고, 1797년에는 유럽에서 네덜란드 선교회, 그리고 1804년에는 외국어 성경 번역과 출판에 크게 공헌하게 되는 대영성서공회가 조직되었다.
다시말해, 18세기 영국의 개신교 영적 부흥과 대각성 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인 선교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 도화선이 됐고, 마침내 ‘위대한 선교 시대’라 평가되는 19세기에 전 세계 각 대륙을 향하여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은 것이다.
또 다른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들 몇 사람을 더 살펴 보겠다.
1814년 이후 미얀마에서 사역한 아도니람 저드슨은 37년의 사역 기간 동안 미얀마 성경 번역과 미얀마 영어사전을 편찬하고 교인 7000여 명과 선교사 163명을 감독했으며, 1807년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로버트 모리슨은 27년간의 사역을 통해 중국어 성경 번역과 6권짜리 중국어 사전을 편찬하였다. 선배 선교사들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아시아 지역에는 더 많은 선교사들이 자원하게 되었는데 중국은 제임스 레그, 칼 구즐라프, 허드슨 테일러, 그리피스 존, 티모시 리처드 등 능력 있는 선교사들이, 인도 지역은 알렉산더 더프, 레지날드 허버, 제임스 도번, 윌리엄 밀러 등 뛰어난 선교사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일본을 선교지로 택한 제임스 헵번, 기도 버벡, 사무엘 브라운 등은 일본에 기독교 전파의 기초를 세웠고, 19세기 후반인 1885년 부활 주일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 불리던 조선 땅을 밟은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 등도 새로운 동방 선교의 시작을 알렸다.
남태평양 지역에서 사역한 존 패튼, 존 페테슨, 존 게디 등은 남태평양 군도 원주민을 위해 준비된 선교사들이었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56년을 사역한 루드비그 노멘슨은 식인종을 개종시켜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였다.
중동 지역에서는 엘리 스미스와 반다이크가 담당한 아랍어 성경 번역이 꼭 필요한 사역이었고, 학교 설립과 같은 교육 선교도 병행하였다. 아프리카는 베쿠아나 지역에서 50년 넘게 사역하며 성경 번역과 교회 설립을 감당한 로버트 모펫과 그의 사위 데이빗 리빙스턴, 단 크로포드, 제임스 스튜어트, 알버트 슈바이처 등이 사막과 같은 땅 위에 복음의 꽃을 피우는 위대한 사역을 해내었다.
이 시대 18세기와 19세기의 해외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 한복판에서 살해 위협과 질병, 척박한 환경의 어려움과 언어 문제 및 인종 차별, 기근과 자연재해 등과 맞서 싸워야 했고, 때로는 인간적인 절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에게는 오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방인들을 향한 한 없는 동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불타는 열정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그 분들의 귀한 전기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
식민 제국주의의 부상과 서구열강의 침략
한편, 19세기의 선교사들이 구령의 열정으로 세계 각국으로 파송되고 있던 당시는 또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에 대한 식민 침략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다수 역사가들과 피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의 국민 대중들은 이 시기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아직 거둬 들이지 않고 있는데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을 향한 가장 큰 비난은 그들이 각 선교 현장에서 침략한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제국주의적 선교를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 와 자국 군대에 선교지역 즉, 그 나라에 대한 문화, 지리 등 정보를 제공하고 군대의 침략을 선도했다는 비난조차 없지 않다. 특히 유럽 열강의 침탈을 받은 아시아 각국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볼 수 있는 중국의 경우, 미국 영국 등 외국의 선교사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1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별로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선교와 국력의 상관 관계이다.
왕왕 한국의 목사님들이 ‘미국, 영국은 선교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라는 요지의 설교를 하는 것을 듣게 된다. “선교를 열심히 하여” 복을 받았는지, “선교를 열심히 하라고” 복을 주셨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의견은 후자, 즉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그 나라를 들어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교를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국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대서양, 태평양을 건너 극동 지역, 아시아 각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는데에는 먼저 항로, 즉 뱃길이 열려 있어야 하고 또 선교사를 파송할 선단이 있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뗏목을 타고 대양을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선교사를 외국에 보내려면 선교를 지원할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내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경제력과 국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선교가 가능해 진 것이다. 6.25 전쟁 직후나 1970년대 산업화 초기의 한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해외선교가 오늘날 가능해 진것은 한국의 국력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한인 교민들이 살고 있고 한인 슈퍼 마켓이 있고 영사관 대사관이 있고 주재 기업, 주재원들이 있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있고 전 세계로 취항하는 자국 항공사가 있는 이 시대이기 때문에 한국이 선교사를 내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국력이 최고에 달했을 때 남미에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선교사를 왕성하게 내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와 영국도 그 국력이 최고점에 달했던 시기에 전 세계로 선교사를 내 보내었다. 즉, 선교 강국이 선진국, 강대국이요 국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선교사를 해외로 내 보낸 사실은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19세기 선교 사역 전체를 회고해 볼 때, 이 시기 선교 사역을 통해 비로소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음과 이들의 헌신을 통해 해당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명백한 사실, 그리고 그 각각의 선교 사역의 이면에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또 100년 전 한국의 경우와 같이 이들 선교사들이 지닌 시대적 안목과 헌신이 선교 지역의 미신 타파와 사회 악습 폐지, 교육기관 설립과 의료 시설 건설 등 선교지 민중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사실도 간과 할 수 없다. 비록, 스페인, 포르투갈의 선교 역사 이면에 피로 얼룩진 콩키타도레스의 남미 원주민에 대한 야만과 학살이 있었긴 하지만 나는 그런 비극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크고 높으신 뜻은 아직 다 모른다. 다만, 이런 역사를 통하여서라도 ‘말씀’을 모든 민족, 모든 열방에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 맥박치고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계시록의 일곱 봉인 중 첫째인을 떼실 때에 나타난 흰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져 나간 18-19세기의 세계의 복음 운동을 상징적으로 예시한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흰 말’ 해석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하고 지지를 보내는 편이다. 다만, 한가지 나의 의견을 덧 붙이자면 ; ‘말 탄 자의 정체에 대해, ‘그 탄자’ 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굳이 무리하게 그 신분이나 정체성 (Identity) 즉, 인격적 실체 규정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말’은 탄 자 없이 홀로 출현하는 법이 없으니 반드시 그 탄 자가 있어야 ‘말’ 출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곱 봉인 중 첫째인에서 넷째인까지에 나오는 네 마리 말은 ‘그 탄자’의 인격적 실체 즉, 정체 때문에 그 사건의 성격이 규정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총체적인 상황을 하나의 현상으로 그리고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옳은 접근 방법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첫째 인의 흰 말 탄자를 그리스도라, 또는 적 그리스도라, 아니 순교자의 영혼이라 하는 식으로 그 인격적 실체 (Who he/she is?) 를 억지로 해석 하려 한다면 둘째 인, 셋째 인, 그리고 넷째 인의 ‘말 탄 자’는 누구로 해석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두된다. 둘째 인의 붉은 말을 공산주의의 출현으로 또, 셋째 넷째 인의 검은 말, 청황색 말을 경제전, 자원전이라는 세계적 사회 현상으로 해석한다면 첫째 인의 흰 말 출현도 그냥 “세계적 복음 전파와 선교 운동” 이라는 당대의 큰 시대적 조류 내지 세계적 사건으로 규정하면 충분한 것이다. 한편, 그 탄 자의 정체 즉, 인격적 실체를 굳이 밝혀 내어 그가 누구인지, 역사상 등장한 인물 중 누구에 가장 근접하느냐하고 따지고 든다면 당장 두번 째 말, 붉은 말을 탄자의 정체부터 문제가 된다. 즉, 붉은 말 출현을 1900년대 초의 공산주의의 출현과 이후 1900년대 말까지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양대 진영의 냉전 상태로 해석 할 때 붉은 말 탄 자가 카알 마르크스가 되어야 하는지, 레닌이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스탈린 혹은 모택동 또는 김일성이 되어야 하는지 의미 없는 논쟁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탄자의 모호한 정체성으로 말미암는 문제는 오히려 깊이 파고 들수록 더 오류의 함정에 빠지기가 쉬운 데 이는 셋째, 넷째 인의 검은 말, 청황색 말 탄자의 경우에도 역시 같이 적용 될 수 있다.)
흰 말이 나타 난 시기
현대 역사에서 흰 말이 나타 난 시기 즉, 개신교의 복음 전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를 다시 한번 정리 해 보자. 먼저 이러한 복음 전파 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건들을 연대 순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1732년 – 1752 년 ; 모라비안 성도들의 해외 선교 시작
1770 년 – 1791 년 ; 요한 웨슬리의 영국 복음 부흥 운동
1792년 ; 윌리엄 캐리의 대영 침례 선교회 발족
1804년 ; 대영 성서공회 설립
1853 년- 1875년 ; 허드슨 테일러 중국 도착과 CIM중국내지선교회 설립
1885년 ;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 조선 도착
1890년 ; 호주 장로교 선교사 J.H. 데이비스 조선의 부산 도착
위와 같은 근대 개신교 선교 운동 중에서 이 모든 활동의 기폭제가 되는 사건을 영국의 영적 부흥운동이라 본다면 이 흰 말이 역사속에서 나타 난 시기는 자연스럽게 요한 웨슬리가 활동하던 시기 즉, 1700년대 말과 대영 성서 공회가 설립된 1800년대 초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 할 것 같다.
( 또한 우리는 이 흰 말이 활동하던 시기 즉, 개신교 해외선교 운동의 ‘절정기’를 극동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미국 장로교, 감리교와 호주 장로교의 선교사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데이비스가 도착한 1885년 무렵으로도 볼 수 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수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국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이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내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선교 운동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러나 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뜨거운 영혼 구원의 열정은 이제 절정기를 지나 다소 쇠퇴 국면에 이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앞으로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의 해석에서 계속 살펴 보겠지만 각각의 말이 나오는 시기와 다른 말이 연이어 나오는 상황에서 그 전의 말이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 즉, 그 상황의 전개 양상은 절정기를 지나면 다소 수그러드는 경향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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