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가 낳은 세계적인 유물이자, 그 아름다움으로 말한다면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표현도 부족하다할 탁월한 예술품이 바로 백제의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의 대형 향로이며, 현재 국보(國寶) 2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난 1993년12월12일 부여(扶餘) 능산리(陵山里)에서 발견되었다.
제작시기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으로 조선의 남해(南海)였던 현 대륙의 장강(長江)을 건너 동정호(洞庭湖)아래 현 형양(衡陽)의 좌측 샤오양(邵陽)시인 부여(夫餘)로 도읍을 옮기고 안정기를 갖게 되는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554-597)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5단에 74개의 산봉우리, 여섯그루의 나무, 12개의 바위,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42마리의 동물과 서로 다른 모습의 인물상 17개가 조각되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한 향로(香爐)의 정상에는 봉황(鳳凰)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민족에 있어서 대표적인 태양새이고, 신조(神鳥)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숭조(崇鳥)사상은 북방유목민족들의 고유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가 고증한 백두산(白頭山)이 현 알타이산임과 더불어 우리 조선민족의 시원터전 또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그 터전에서 상고조선(朝鮮)-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로 그 혈맥이 이어져 왔음을 안다면, 우리 문화에 왜 숭조(崇鳥)사상이 태동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백두산(白頭山)을 시원으로 하여 동남(東南)으로 일만리를 뻗어내린 조선이란 정체(政體)의 문화속에는 북방유목민족이었던 우리 과거의 모습이 숭조(崇鳥)에 투영되어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2.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는 능산리(陵山里)고분군(古墳群)과 부여 나성(羅城)사이 작은 계곡의 배수로 공사중 물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반도에서 나타나는 많은 유물(遺物)들이 발견당시의 미스테리와 더불어 많은 의구심을 남기는 것이 사실인데, 백제(百濟)라는 나라가 이 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놓고 본다면,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또한 이 반도땅의 유물이 아니고, 역사의 부여(扶餘)였던 대륙 호남성(湖南省) 소양(邵陽)시에서 출토된 것을 반도로 옮겨 일제강점기에 묻었던지, 아니면 1993년에 가지고 들어와 땅속에 묻어놓고 실력자를 통해 배수로 공사를 재개하여 실제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가 반도에서 발견되었으니 반도백제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어설픈 가짜 역사를 진실의 역사로 위장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의 유령을 부활해 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한 조유전(1942~현재)박사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義慈王의 庶 왕자 41명중 하나였던 이가 일본 미야자카 현 남향촌에 자리를 잡고 百濟마을을 가꾸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가도(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그로부터 1300년이 훌쩍 지난 1993년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扶餘 陵山里古墳을 찾았다. 이들은 先大王들의 告由祭를 지냈다 이후 한달 반이 지난 12월12일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의 녹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에 대해서는, 정양모 중앙박물관장(中央博物館長)의 말을 인용해 "130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녹이 슨 흔적이 없다뇨, 원래 靑銅製品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스는 데, 이 香爐는 오랜 세월 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부식을 피한 겁니다." 라고 반도역사오천년의 정당성을 애써 부연하고 있다.
반도역사가 가공된 가짜역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는 가짜반도역사를 진짜로 위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간교한 일본과 반도내 친일부역자들의 합동작전으로 일본에 보관중이던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반도로 들여와 땅속에 묻어놓고 한편의 드라마틱한 쇼를 벌인 것이다. 그 쇼에 어리석은 반도 대한민국의 주류언론과 지식인들은 열광했고, 무관심한 대다수 국민들은 신문의 가십(gossip)정도로 받아들이며, 간교한 세뇌작업에 물들어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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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발굴현장 사진을 보면 향로 뚜겅부분 안쪽에 진흙으로 가득 차있고 진흙 물구덩이 위에 향로와 뚜껑이 놓여 있습니다.. 이말은 뚜껑안쪽에 진흙이 있다는거는 묻혀있었다는말 아닌가요?
말이 안되는 발굴사진에 진흙구덩이에 유물 향로에 진흙을바르고 올려놓은거란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진짜 발굴한거면 절반정도 진흑에 묻혀있는사진 조금씩 진흙을 걷어내면서 발굴해야지 갑자기 덩그러니 향로가 진흙에서 기어나온거보면 진흙에서 향로를 쑥 뽑아서 옆에 고인물에 흔들어 씻고 다시 그자리에 두고 사진을 찍은건가? 이런 생각을했습니다.
이것과 비슷한걸로 기적의 신라불상..지진으로 넘어진 불상얼굴 5cm앞에는 바위가 있지만 기적으로 닫지않아 상처하나 없는 불상....이거 조작할려고 갖다놓고 잠깐 기대어둔건데 기어이 하지못하고 잊혀진게 근래에 발견한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와 친일파는 유물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주의의 유령을 불러내 마치 이 반도가 오천년역사의 터전이라고 재단하고 있습니다. 강역이 이 반도가 아닐진대...유물유적 또한 이땅의 것이 아님을 안다면, 님과 같은 혜안이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유물은 일본의 유물 조작 사례처럼 묻었다가 발견됐다는 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 없습니다. 참고 자료 정도로만 보는 게 오히려 타당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