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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8일
말씀 : 롬5:8
제목 : 십자가에서 흐르는 사랑
세상을 보는 방식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단계는 현실만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검다, 희다, 푸르다, 달다, 쓰다 등등 있는 그대로를 보고 느낍니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움직입니다. 자기 신앙의 가치나 정체성 없이 그저 육신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2단계는 현실을 보고 그 뒤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가능합니다. 따래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3단계, 즉 십자가를 통해 본 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회개를 통해 눈앞의 현상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삶'인데, 이를 위해 날마다 십자가를 적용하며 살아가면 그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실 모든 질병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현실을 보는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통이나 질병이 외부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스트레스, 강박관념, 공허함 등이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니까 자신은 보지 못한 채 늘 불평하고, 원망하며, 짜증을 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보면 질병이나 고통은 내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탐욕, 시기심, 이기심 등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것들을 죽이기 위해 애씁니다. 이는 곧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며 이를 통해 외부에 있는 것들을 해결함으로써 결국 그들 자신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결국 모든 삶의 문제는 내부에서 해결해야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입니다. 사실 내부에 있는 것들이 외부로 발산됩니다. 미움이 싹터서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살인 의지는 절대로 외부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기와 같은 외부의 강한 압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은 본질적으로 내부의 잔인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음,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내부의 회개를 통해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시내산과 십자가 중 어느 곳의 주위를 맴돌기를 원하십니까? 시내산 주위를 맴도는 삶은 불안하고 초조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스스로 만드는, 내가 주인 된 삶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주위를 맴도는 삶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길을 걷는 삶입니다.
시내산을 맴돌고 있으면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교리와 율법의 의무로만 살아가며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생활은 하지만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려하고 멋있는 교회, 찬양, 설교에서 주님을 찾으며, 헌금, 봉사, 헌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을 통해, 또 어떤 이들은 책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참혹한 십자가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드러우면서 강한 힘에 이끌리어 겸손과 사랑이 머무는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고난과 사망이 있는 그곳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평강을 되찾을 수 있으며, 오랫동안 사모하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삶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십자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 사랑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교리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그 사랑을 우리의 생각 속에 다 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어떤 설교자도 그 사랑을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목사가 받은 사랑을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설교를 통해 목사의 능력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십자가의 사랑은 첫째, 고난받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유익이 되어서가 아니라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신 사랑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사랑은 능력입니다. 불이 무쇠를 녹일 수 있는 것처럼 그 사랑은 무쇠같이 굳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능력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십자가 사랑의 능력은 강함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나약함으로, 때로는 오랜 인내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역사는 시작됩니다.
죄는 우리 본성의 가장 섬세하고 깊은 곳까지 침투하여 우리를 침몰시킵니다. 얼마나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찢어놓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능력의 원천인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거룩하고, 고상하며, 오래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태초 이전에 간직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인생의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십자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현장입니다. 그곳은 사랑을 설명하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
또한 참된 회개 속으로 들어가려면 십자가 현장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의 참혹한 죄와 그것을 사하시는 용서와 사랑을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십자가의 현장 속으로 초청하삽니다.
넷째,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지식적, 교리적, 이론적으로가 아닌 영적,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강령은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통해 죄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봅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장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만듭니다. 보이는 세계에 마음이 빼앗기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나라를 보는 자는 양보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미래의 약속을 현실에서 이루며, 장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만듭니다. 심령이 가난한 그들은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끌어들입니다. 만약 이렇게 살고 계시지 않다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성장과 도전의 계기로 삼고 회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클락에서 있었던 일을 자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2주 다녀오고 2년을 우려먹을 태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면, 새벽 3시 경에 일어나서 찬양하고 묵상기도하는 중에 무언가가 제 영혼을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계속 머물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데 십자가의 피가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끔씩 강대상에서 기도하면서 십자가의 보혈을 철저히 의지하고 나아갈 때 보혈이 제 머리 위에 부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한 방울만 뚝 떨어졌는데 주님께서 제 옆에서 지켜보시는 것 같아서 숨이 멈추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쳤습니다. 평소 회개할 때 종종 가슴을 쳤던 적은 있었지만 가슴이 꽉 막혀서 쳐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숨 막히는 감동 속에서 필름처럼 수많은 것들이 스쳐가는 것을 느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내가 먼저 십자가를 체험하고, 십자가에 젖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침대 위에 앉아서 세미한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나에게 주님께서 강력한 빛을 던지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렘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을 증거하고, 좋아하고, 고집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와 성도들 모두 거짓을 원했고, 이는 곧 사나운 이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거짓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진리를 좋아하십니까? 우리는 진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당시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진리의 빛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을 좋아했기 때문에 마땅히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했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조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리의 빛이기 때문에 조상들이 받은 심판은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조상들과 정확하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거짓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거짓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즉 13절의 '거짓'은 '평강이 없는데 그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안이 아닌 '생명과 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함께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의 ‘샬롬’과 같은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마음이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 그들의 삶의 모든 곳에 그분의 운행하심과 생명이 넘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평강과 생명과 복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종교 의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약속이 소멸된 시대였습니다. 렘7: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 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제사나 번제에 대해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주된 명령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이 떠오르면서 '나도 예레미야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신약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목사가 아닐까' 하는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으로 내려가 저를 바라보면서 '내가 거짓 선지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많이 울었습니다. '내 생각과 행동이 설교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일을 때우기 위해 형식적, 가식적으로 설교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제 신앙관을 다시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슥12:10)'
율법을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죄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로 끌어당기시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삶입니다.
탕자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유산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 왜 빨리 안 돌아가세요. 빨리 죽지 않을 거면 재산이라도 주세요’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나쁜 짓입니다. 그런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온 동네가 잔치로 떠들썩했습니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본 큰 아들은 종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받아 동네 창피한 꼴을 당하게 하더니, 그 돈마저도 창기들에게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는게 가당합니까? 한번 속으셨으면 됐지, 왜 동네 창피하게 잔치까지 베풀어서 민망하게 하십니까?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여신 적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해코지할까 봐 보자마자 달려가서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을 비난하거나 문제 삼지 말라는 뜻으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만약 큰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었다면 그의 반응은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너무 기쁜 아버지께서 동생을 보호하시기 위해 이렇게 잔치를 베푸셨구나. 이제 우리 동네에서 동생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것이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동생을 바라보면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변화의 삶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일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바라보는 변화의 삶은 오직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광야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 후 간 곳도, 침례 요한이 있던 곳도,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 시험 받으신 곳도 광야입니다. 궁핍이나 시련의 의미를 지닌 광야는 어렵고 고통스런 장소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광야는 연단과 훈련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모두가 꺼리는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광야에는 어려움과 궁핍함, 그리고 말씀과 임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수고 다듬어서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종종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광야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장소입니다.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것과 말씀을 듣는 것은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설교가 홍수처럼 밀려와 빠져 죽을 정도로 많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설교 잘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후임자를 구하기 위해 공고를 냈습니다. 이를 보고 지원한 사람들 중 다섯을 추린 후 그 중 설교를 가장 잘하는 사람을 추대하기 위해 다섯 명 모두에게 설교를 시켰고, 모든 설교를 들은 목사님과 성도들은 동일하게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이 될 것 같으니까 준비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하고 돌아오는 주일예배 시간에 성도들에게 알릴 일만 남은 상황에서 어떤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 중 후임자로 임명하기로 한 사람을 이야기하니까 그 목사님이 '그 사람 사기꾼인데'라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잘하는데 사기꾼이라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예전에 사역했던 곳을 알아내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니 그 사람에게 사기 당한 교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의 고통 중 하나는 설교대로 살지 못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의 평생의 기도 제목 중 하나가 '설교대로 살게 해주세요'입니다. 예배 후 성도님들이 "목사님, 오늘 은혜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실 제 마음이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대로 완벽하게 살지 못해서 양심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저에게 주시는 말씀을 제가 먼저 먹고 여러분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저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저도 가슴을 찢으면서 순종하기 위해 애씁니다. 결국 성화의 길, 연단과 훈련의 길은 평생 가야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문학이나 교훈이 아닌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십니까? 그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몸부림치십니까? 우리는 그것이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애통하며 긍휼을 구하는 변화의 삶이 얼마나 복된 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변화를 깨닫고 늘 승리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