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팔월이 살아있으니 팔팔하게 뛰어야 합니다. 서두를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느긋하게 살 것도 아닙니다. 덥다고 쳐져 있으면 그대로 쳐집니다. 움직이고 일해야 합니다. 땀을 낼 때는 땀을 내고 쉴 때는 쉬는 것이지요.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합니다. 여름도 살고 겨울도 살아야 합니다. 이 날이 있으면 저 날도 옵니다. 그냥 견디며 지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인생이 가는 겁니다. 다만 그 안에서 만나고 나누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만들고 지나가면 됩니다. 치고 박고 서로 상처 주며 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산다한들 편하겠습니까? 정치인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곧 8월도 하순입니다. 이 달까지는 땀 좀 흘리도록 하지요. 그 땀으로 가을이 풍요로워진다면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사 거저 되는 일이 있답니까? 카르텔로 잔뜩 벌어놓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고 펑펑 쓰며 사는 것보다는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반세기 지나면 주름살을 피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가져갈 것도 없는데 그냥 있는 대로 누리며 살면 됩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노인들 기초연금은 나오니 그럭저럭 먹고는 살잖아요. 나이 들어 서러워하지 않으려면 이야기 나눌 친구나 만들고 살면 됩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 만세!!
청포도 익어가는 좋은 시절입니다. 팔팔하게 또 한 주를 멋지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3년 8월 19일 김종우 목사 드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사무엘상 17 : 47)
<비공식작전>
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것은 해외근무를 꿈꾸는 것을 포함합니다. 문제는 그 해외근무가 보기에도 멋지고 우아하고 고품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로 매우 위험하고 힘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으로 발령받아 가서 근무하느냐 하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안전한 문명국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무원인데 근무지를 자기가 임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시나 명령이 내려오는 대로 가야 합니다. 물론 사전에 본인의 의사를 타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명감을 가지고 위험지역을 스스로 택하여 갈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외교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생활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외교관이라 하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의 위신과 품격을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치외법권이라는 특별한 권리를 비롯하여 그 나라에서 자국민과는 다른 권리도 가지고 있지만 그 지역이 당하고 있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한 나라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니 테러집단에게 있어서 몸값이 높은 대상이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보다 더 위험한 처지에 놓인 사람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지역으로 선뜻 나서서 근무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근무실적에 높은 평가를 제공함으로 그 기간을 지나 한결 나은 곳으로 전근해 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랜 시간 외교부에서도 중동과를 담당하여 일하고 있는 ‘이민준’은 미국 근무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평불만 속에서 늦도록 사무실을 지키다 나갑니다. 그런데 전화가 옵니다. 마지못해 자리로 돌아와 수화기를 듭니다. 그런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상한 신호가 들려옵니다. 가만 들어보니 뜻이 있는 소리입니다. 연전에 납치 실종된 외교관의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바로 보고합니다. 모두 놀랍니다. 우리 외교관입니다. 동료입니다. 구해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숙제가 따라옵니다. 함부로 공개하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일단 외교부 단독으로 처리하자고 내부결정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일을 맡아서 추진할 것인가? 그래도 중동과에서 일하는 이민준이 적격입니다. 그러나 나라 안에서 일하는 것과 현지에서 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그 위험한 곳으로 선뜻 가겠습니까? 그래 잘만 끝내주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발령 내줄게. 중동 사태에 관련하여 정통한 사람을 찾아내 교섭을 합니다.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니 대가를 어떻게 지불하고 받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액수가 5백만 불입니다. 일단 반을 주고 구출 후 잔금을 내주기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현금 전달 방식도 알려줍니다. 현금을 가지고 공항을 통과할 수는 없기에 그 방법도 알게 됩니다.
현지에서는 외교관의 몸값을 가지고 사람이 들어온다고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벌써 군부대부터 나서서 혈안이 되어 뒤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타국입니다. 공항에서부터 총격을 당하며 쫓깁니다. 급하게 택시에 오르고 보니 운전자가 한국인입니다. 우선은 그곳을 피해 빨리 떠나야 합니다. 반갑기는 한데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더구나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힘이 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돈으로 사람이 움직입니다. 가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도 현지 상황을 좀 아는 듯한 이 사람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가자고 조릅니다. 역시 돈이 힘이지요.
어쩌다 동행하게 된 이 운전자 ‘김판수’ 덕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 외교부와 연락도 합니다. 외교부에서도 김판수를 알고 있습니다. 알려준 사실은 믿지는 말라는 것이지요. 이제는 이민준이 현금 가방을 짊어지고 움직입니다. 여차하면 다 날아갑니다. 250만 불입니다. 위험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알기만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동행하는 이 김판수를 어찌합니까?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 위험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현재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위험한 동행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당합니다.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도 들지만 큰 액수의 현금은 폭탄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미국비자에 대한 미련이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안기부가 사태를 알고는 마땅히 자기네가 맡아야 할 일을 외교부가 나서서 설치니 곱게 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온 나라가 올림픽 준비로 여타 문제를 만들려하지 않습니다. 그깟 ‘한 사람의 목숨’ 정도로 치부합니다. 테러집단과는 협상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속 터지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결국 다 된 마당에 잔금 송금도 막힙니다. 그냥 위험에 내쳐집니다. 외교부 직원들이 자신들의 3개월 급여를 모아 협력하려 합니다. 장관이 감동을 받아 계속 추진을 합니다. 민준은 이 기회에 판수를 귀국시켜주려 합니다. 그런데 항공 허가는 두 사람만 나옵니다. 구출된 외교관과 민준과 판수, 세 사람인데 어쩌지요? 그런대로 감동도 있습니다. 영화 ‘비공식작전’(Ransomed)을 보았습니다.
평화협정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우리 아버지 곧 하나님을 소개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이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먼저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듯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계의 세상이 있기 전에 이미 영계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홀로 영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영들이 창조되어 있었지요. 그 수도 여기 우리 사람만큼이나 많을 것이고 어쩌면 더 많을 것입니다. 시 103 : 20 - 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이루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늘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영들의 수가 엄청 많았지요. 단 7 :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그 영계의 세상을 모델로 하여 육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창 1 : 26 -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렇게 하여 이 땅에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천사장 중 하나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뛰어나게 지음 받아 스스로 높아지려 하였지요. 결국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사 14 : 12 - 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는 별들 중에도 뛰어난 별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쫓겨납니다. 그 결과 영계가 둘로 나뉩니다. 겔 28 :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하늘에서 쫓겨난 그는 마귀가 되어 육계의 세상을 휘어잡았습니다.
물론 마귀 혼자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고 함께 쫓겨났습니다. 벧후 2 :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 1 :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마귀도 많은 천사들 곧 영들과 함께 자기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나라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영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나타나서 그가 쫓겨남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 악한 자들이 하나님 지으신 육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 세상을 회복하려고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이 친히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계에 당신의 목자를 세워 그에게 임하여 그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고 확장시켜 결국은 땅을 모두 정복하도록 하십니다.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주신 명령이요 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마귀에게 잡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하나님이 당신의 목자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만드십니다. 그러니 마귀가 가만있지 않겠지요. 어떻게든 훼방하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아담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세계에서 다시 노아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본격적으로 하나님 백성,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12지파를 만드십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틈만 나면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만들고 확장시켜 나갑니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고 보다 구체적으로 약속해주십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렇습니다. 세계가 본래 하나님에게 속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되어 그 사명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처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창조하셨고 그들만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그들만이 하나님께로 언약(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약속은 아무나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요. 하나님도 하나님 백성과 약속을 하지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하고는 약속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씨 곧 말씀으로 태어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있는 자들이 됩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외인에 불과합니다. 엡 2 : 11 - 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복음을 듣고 그 씨가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과 상관있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니 마귀가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훼방하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발버둥 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곧 육적인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나라들이 계속해서 침공하였습니다. 다윗에 의해 견고하게 세워졌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나라가 분열됩니다. 그 후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결국 최후에 남았던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을 등졌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했습니다. 아담 때부터 약속하신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나라는 없어졌어도 하나님 백성은 대를 이어오고 있었지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약속하신 목자, 메시야가 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게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이 깨뜨립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래서 육적인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끝납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 백성이 됩니다.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니 마귀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목자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마귀는 이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그곳에 자기 목자를 세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 두 세력이 맞부딪칩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곳에서 두 세력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어디이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어디입니까? 예수님 오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이끌던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하려 그들과 맞섰지만 일도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잡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그들과 맞섰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고 목자라 칭하였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마귀의 종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일 4 : 1 “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의 세계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도 영이 들어 역사하는 목자가 둘로 나뉘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고합니다. 마 7 : 15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지만 사실은 마귀의 종들이 백성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 백성을 건져내려 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가만있겠습니까? 야단나지요. 백성들을 단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하십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야 천국에 입성하는데 그 길을 막고 있으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누가 그 짓을 합니까? 바로 백성의 목자라 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훨씬 위풍당당합니다. 성전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그들이 쫓아낼까 두려워합니다. 출교는 곧 사회에서의 추방과도 같습니다. 살기 힘들게 됩니다. 그러니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더 하나님의 종답습니까? 비교가 안 되지요. 그러나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렇습니다. 증거하는 말씀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16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하나님의 종은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20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목자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과연 성경대로의 하나님 말씀인지 아니면 제 것으로 말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들어봐야 압니다.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나라는 구분되고 판별됩니다. 참과 거짓의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전쟁은 3차 대전도 아니고 핵전쟁도 아닙니다. 공산주의 나라와 민주주의 나라의 전쟁도 아닙니다. 모슬렘 나라와 기독교 나라의 전쟁도 아닙니다. 부족 간, 민족 간의 전쟁도 아닙니다. 예수 초림 이전 육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육적으로 가르치고 육적으로 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스스로 마귀의 종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보고 들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도 두 가지 씨 곧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진작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예수님의 밭에 두 가지 씨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뿌린 좋은 씨가 있는가 하면 원수 마귀가 뿌린 가라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가 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밭 곧 교회에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 안에 하나님의 목자와 사단의 목자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목자가 ‘나는 사단의 목자다,’ 하고 일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선포한다면 그에게 갈 성도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고후 11 : 13 - 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당당하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멋지게 치장이 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경력과 아름다운 언변 그리고 그 행사하는 능력은 성도들로 의심의 여지를 갖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나라는 두 나라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목자 편에 있는 민족과 마귀의 편에 속한 민족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과 방패, 총과 칼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송가도 부릅니다. 찬송가 393장(개정 350)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 그렇게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3차 대전을 이야기하고 핵전쟁을 운운합니다. 지구가 박살날 날을 기다리며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읽고 노래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눈을 뜨고 있어도 소경입니다. 그런 소경을 따라가면 따라가는 자들 역시 소경이고 결과는 똑같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전쟁을 이야기하다보니 더불어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전쟁을 하면 종전이 있고 휴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화해협상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6.25 발발 후 우리나라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긴 휴전 기간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언제든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종전선언이니 평화협정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영구 평화를 원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 확신이 설 수 있습니까?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깨버릴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사람이 그랬고 역사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도 당한 일입니다. 한 마디로 다 빼앗깁니다. 나라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이미 겪었습니다. 지금도 중동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이 당하는 아픔을 보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일까지 생긴 줄 아십니까? 신 28 : 52 - 53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왕하 6장에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우리도 임진왜란 때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전쟁은 그런 세상 전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 때 전쟁은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 곧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바로 하나님 편과 마귀 편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탄을 터뜨리는 전쟁이 아니라 참과 거짓 곧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입니다. 한 마디로 ‘말싸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교리 싸움입니다. 단순한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먹으면 생명과 영생이지만 마귀의 말 곧 비진리를 먹으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 화려한 목자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대인들이 자기네는 노예가 된 적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뭘 모르는 말이지요. 무엇에서 자유입니까?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야 구원과 천국에 들어갑니다.
때문에 우리는 거짓과 싸워야 하고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이 전쟁에는 협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협정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승리해야만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때 예수님은 계속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2, 3장에서 이기는 자에게만 복이 약속되어 있음을 봅니다. 무엇으로 이깁니까? 계 12 :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피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증거하는 말’이라 하였으니 보고 들은 것이 없다면 어찌 증거하겠습니까? 자기가 연구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니 보고 들은 자를 찾아서 그에게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이 교회들을 위하여 당신의 사자를 보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계 22 :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8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렇습니다. 2천 년 전의 그 요한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그 요한의 일을 행할 목자가 나타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가서 들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