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1일 수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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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 13,44-46)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말씀의 초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십계명이 새겨진 증언판을 들고 백성에게 계약의 말씀을 전한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있었기에 그의 얼굴이 빛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이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하신다. 곧 하늘 나라는 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으며, 이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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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요한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남겼다는 ‘하피첩’이라는 편지는, 후대에 남겨진 기록에 이름으로만 전해 내려올 뿐 실존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귀한 보물이 200년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공영 방송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느 건설 현장의 소장이 들고 온 헌 책자를 전문가들이 감정하였는데, 그게 다름 아닌 ‘하피첩’이었습니다. 현장 소장이 ‘하피첩’을 발견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수레를 끌고 와서 폐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장 소장은 할머니의 수레에서 심상치 않게 보이는 헌 책자를 발견하였고 할머니에게서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정을 의뢰하였더니, 역사적 가치가 대단한 ‘하피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입니다.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 농부가 보물을 제대로 볼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보고 보물인 줄 알았기 때문에 보물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마치 현장 소장이 ‘하피첩’을 발견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보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폐지로 취급했던 것과는 달리, 현장 소장은 그것을 보고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쓰레기로 폐기될 뻔한 소중한 보물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속에 있는 보물들을 우리 스스로가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배우자, 가족, 직무, 신앙 등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지요?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배에 올라 군중을 향해 하시던 설교를 마치고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이제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데, 보충 설명을 곁들여 가면서 한결 자세하게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제자 교육에 특별히 공을 들이셨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무엇 무엇과 같다.’고 하시는 표현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세상 이치에 따라 설명하시는 공식이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세상의 일들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비춰주는 거울이고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일을 통해 천상의 은총을 깨닫게 해주신다. 세상의 일들은 그저 속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흔적이요 얼굴이 된다. 성 이냐시오는 양심성찰로 이런 성사적 의식과 영적인 감수성을 나날이 우리 안에 자라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Finding God in all things’ 경지에 이르는 것이 영성 생활의 중요한 목표라고 가르쳤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은 사람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의 비유는 우리 영성 생활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하는 초대다. ‘남이 못 본 것’을 본 사람의 기쁨과 확신이 없다면 내 신앙의 순도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도’ 하나도 아깝지 않아야 진짜다. 진짜 사랑은 아까운 것이 없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다 내어주고 싶은 사랑이 있다면 그는 행복하다. 그는 이미 하늘나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의무와 윤리의 나라가 아니라 내부에서 샘솟는 확신과 긍정, 기쁨이 있는 나라다.
성 이냐시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며 ‘저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으로 저는 족하옵니다.’라고 기도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산 것이 나에게 있는가?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것이 나의 하늘나라다. 없다면,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처럼 구하고 찾아야 한다. 한 번 주어진 이 인생을 어정쩡하게 살고 말 수 없다. 값진 진주를 꼭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자.
함께 일하는 두 명의 도둑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호흡이 척척 맞았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훔친 장물을 숨길 곳이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없으면 저 많은 보물들을 다 내가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도둑이 같이 일하는 도둑을 제거하기 위해 독이 들은 술병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도둑을 본 다른 도둑이 먼저 칼로 찔러 죽였지요. 함께 일하는 도둑이 죽자 이제 자신의 소원대로 모든 보물들이 다 자기 것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방금 전 죽임을 당한 도둑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을 열어 맘껏 마셨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다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 두 도둑 모두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새벽에 문득 이 동화책의 내용이 생각나더군요. 왜냐하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자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게 되면 많은 범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범죄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부분이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운다고 한들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악마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너는 아직도 부족해.’라고 유혹합니다. 조금만 더 채우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부족함에 불행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행복에 대해 기준을 세우려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추어야 하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해서 틀을 만들면 만들수록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내어 놓을 때, 그래서 빈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보물과 진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파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힘을 쏟아 붓고 있었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아직도 하느님 나라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더 많은 힘과 정신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다(마틴 루터 킹).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양승국신부-
<불멸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
가끔씩 잘 준비되지 않고, 분위기도 전혀 아니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상태에서 미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축제와 기쁨의 잔치가 미사인데 참석하고 있는 얼굴들은 소 닭 보듯이 심드렁합니다. 눈동자는 오래되어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앞두고 기대감도 가슴 설렘도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에 숙제해치우듯이 후다닥해치웁니다.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드리는 미사, 사실 이거 보통 보물이 아닙니다.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매 미사를 통해 우리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바다를 건너는 파스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매 미사를 통해 죄와 죽음의 땅에서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매 미사 때의 영성체를 통해 황송스럽게도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만납니다.
오래 전부터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미사에 참석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미사 없는 하루, 영성체 없는 하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답니다. 미사는 그분에게 있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이요, 에너지요, 마지막 보루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 안에 미사는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하는 No.1이었습니다. 그분은 미사가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잘 깨닫고 계셨습니다. 이렇듯이 우리 인생에 값진 보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이미 파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보려고 해도 결코 보지 못하는 천국을 이 세상에서부터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른 봄 입양해온 강아지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바라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강아지들이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개밥’입니다. 먹을 것을 들고 다가가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꼬리뿐만 아니라 온 몸을 흔듦으로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데리고 놀아주는 것, 산책시키는 것, 이 정도가 그들에게 큰 가치입니다.
그러나 강아지들에게 있어 우리 인간이 큰 가치를 부여하는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강아지에게 5만원짜리 한 장을 선물로 줘보십시오. 그것의 가치를 모릅니다. 고급 개 사료 한 달 치 살 수 있는 대단한 돈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입으로 물어뜯어 찢어버립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고, 값지고,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잡동사니 취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잠시 쥐고 있었지만 즉시 날아가 버릴 재산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는 불멸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통이 다가와도 울부짖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다시 획득해야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회개의 곡괭이로 자신의 그릇된 과거를 갈아엎는 사람, 믿음의 쟁기로 자신의 부끄러운 하루를 뒤집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전인적 투신
-정희완 신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신앙은 우리에게 전인적 투신을 요구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올인 하는 일이 신앙임을 우리는 익히 압니다. 하지만 그 번연한 신앙적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 신앙의 길에서 확신을 가지고 걷기가 힘들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우리 생이 때때로 흔들리는 것처럼, 신앙도 때때로 갈피를 찾지 못해 허둥거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확연한 것입니까? 한 치의 흔들림과 갈등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저는 가끔 신앙에 대한 확신 부족을 여실히 느낍니다. 신앙이 정말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지 때론 확신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길이 옳은 것인지, 정말 우리에게 참기쁨과 희망을 주는 길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또한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흔들림도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움직이는 듯한 세상, 아무런 구체적 응답도 없으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부재를 느끼게 합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야기와 우주의 신비를 생각하면 “이거 무無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모든 게 먼지와 우연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의심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움직여 신앙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흔들리지 않고 더 빨리 신앙의 길을 잘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고 희망합니다.
나날이 새로운 삶
-김찬선신부-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저는 오늘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이 부럽습니다. 저는 좋은 진주를 찾아다닐 마음이 그리 없기 때문입니다. 좋게 이해하면 지금, 여기에 제가 만족하기 때문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현재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현재를 만족치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향상에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이 없이 현재에 안주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가 우리에게는 천국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는 새로운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 맛본 사람, 그래서 맛을 아는 사람이 더 나은 맛, 새로운 맛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맛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병이 깊어 그럴 수도 있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것이 즐거움이고 그래서 맛 기행을 하거나 외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면 옛날에 먹던 것, 늘 먹던 것이 더 좋습니다. 입맛도 그렇지만 배도 늘 먹던 것을 먹어야 편합니다. 저도 나이를 조금 먹은 표시인지, 외식이 옛날만큼 좋지 않고 어떤 때는 나가서 먹는 것이 고욕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죽을 때가 가까이 오면 저도 모든 것에 입맛이 없겠지요.
日日新又日新, 나날이 새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일상이지만 매일을 새롭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지겹지만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이 늘 새롭고 의미 있습니다. 사랑은 창조적이고 그래서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이 부분만으로는 묵상을 해야겠습니다. 그만큼 깊이 말씀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여러 복음에서도 하늘나라에 대해 이런저런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 ‘하늘나라’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깊이 제대로 알아듣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곧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깊게 알아들어야겠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이해 여부는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과 방향을 건드리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를 두고 밭에 숨겨진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밭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 보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할 터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 그러곤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
다음으로는 하늘나라가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역시 좋은 진주가 상징하는 의미, 상인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곤 값진 진주를 찾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 그것을 샀다고 하는데, 이 말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울림으로 공명하고 있는지 깊이 머물며 알아들어야겠습니다.
그저 단순한 반성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현 모습을 정확하게 알고 다듬어 나가기 위해, 내게 있어 보물은 무엇이며 진주는 무엇인지 되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 바꿀 만한 가치를 지닌 내 보물과 내 진주는 무엇인지요 ? 그게 만약 하늘나라가 아니라면, 내 보물이나 진주는 하늘나라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도 더듬어 봐야겠습니다.
중국집에 가면 항상 갈등하는 것이 있지요.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라는 고민입니다. 아마 이러한 고민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짬뽕을 시키면 남의 자장면이 맛있어 보이고, 자장면을 시키면 짬뽕국물 냄새에 침이 넘어갑니다. 이러한 갈등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짬짜면이라는 것도 나온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선택의 갈등을 우리는 매순간 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의 순간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것이지요. 정말로 내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내가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길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바램이지요. 그러나 내가 한 선택이 최악의 선택일 때도 참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선택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주님의 선택 역시 그렇게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택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어떤 회사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 분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하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토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아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덜어진다. 시몬은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 많은 사람이다. 제자들 가운데 그래도 적격자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험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교회를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도저히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판단으로는 가장 유능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배신자가 되었지요.
주님의 선택은 언제나 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택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이 세상의 길일까요? 아니면 겉으로는 힘들어 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인 주님의 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얻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팔아 밭을 사는 농부처럼, 또한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사는 상인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투자하는 위험한 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지요. 즉,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할 수 있는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투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한 투신을 통해서만이 주님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라는 큰 보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징징거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다만 이해하라(스피노자).
밭에 숨겨진 보물, 하늘 나라
-김 맛세오 수사-
제가 있는 성거산에는 금을 캐냈다던 광산과 곳곳에 금을 찾기 위해 파헤쳤던 흔적이 여럿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여기서 금을 많이 채취해 갔다는 것이 결코 입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광부로 일하면서 캐낸 금을 조금씩 숨겨 모아 제법 갑부가 되었다는 80세 넘은 노인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분이 금광을 채취하던 주변의 돌을 분석해 보겠노라 돌 비늘을 주워가기까지 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금광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황금만능주의로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일확천금이 될 만한 구석이 엿보이면 -주식 투자다 아파트 투기다- 부자가 되는 관심사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화가 많이 쌓여도 궁극적인 행복은커녕 오히려 그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이란, 바로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만이 깨닫고 차지할 수 있는 최상의 무형자산無形資産이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면, 내 삶의 최고의 보물이 하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이 귀한 보물을 어떻게 간직해야 할지 그 방법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양승국신부-
<선택과 집중>
한 10년 전 쯤의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살아계실 때였습니다. 한 리서치 기관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현존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여성,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두명을 꼽으라고 했더니, 당시 1위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2위는 누구였겠습니까?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의 균형 잡히고, 인간미 넘치고, 호소력이 있는 말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세계적인 토크쇼의 여왕으로 군림해왔습니다. 지금은 큰 언론기업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기부도 많이 하면서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지만 어린 시절의 삶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 가족들로부터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량청소년의 길을 제대로 걸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녀의 발은 늘 맨발이었고 옷은 감자 포대를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도 친구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없다보니 바퀴벌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가축들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이런 오프라 윈프리였는데, 지금은 전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토크쇼의 여왕으로 변신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비결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기업들이 많이 강조하기도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언어에 대한 감수성, 독서에 대한 열정을 발견했습니다. 오로지 독서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자신의 비참한 인생 안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열악한 환경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녀의 성공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성공을 위한 로드맵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1. 장점, 경쟁력, 가능성에 대한 파악
2. 우선순위 포착
3. 정확하고 간결하며 가능성있는 목표 설정
4. 모든 에너지를 투입한 전력투구
5. 옆으로 새어나가는 에너지 차단
오늘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이곳 기웃 저곳 기웃하지 말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우선적 가치를 먼저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우선적 가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대상입니다.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참 사랑입니다.
보다 우리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고, 보다 우리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고, 보다 우리 나날을 행복하게 만드는 대상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미래이고 보물인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집시다.
-김기현신부-
2박 3일 동안 곤지암에서 초중고 하계수련회를 했는데, 하계수련회를 위해서 고생하시고 희생하시고 후원해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먼저 교리 교사들이 많은 노력과 고생을 했습니다. 봄부터 캠프 준비를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캠프를 앞두고는 매일 성당에 나와 물품을 제작하고, 프로그램을 연습하고, 캠프가 잘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습니다. 또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서 휴가를 낸 분도 계시고, 군대 휴가를 캠프에 맞춰 나온 교사도 있었습니다. 또 캠프 기간 동안 준비하고 진행하고 관리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잠잘 시간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모회 분들이 2박 3일 동안 아이들 먹을 밥을 해주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160여명의 아이들의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도, 매 끼니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목회 어른들과 본당의 다른 많은 어른들이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시고 후원을 해 주셨습니다. 캠프 기간에 방문해서 격려 해 주시는 어른들도 계셨고, 간식이나 다른 지원을 해 주신 어른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주임 신부님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당에 신자들이 아이들 캠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지하시고, 캠프를 위한 물품들을 지원해 주시고, 고생한 분들에게 신경쓰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녀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죠. 회합이나 기도에 항상 함께 하시고, 캠프에 가서는 자모회나 교사회나 어른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분주히 돌아다니시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수련원이 계약사항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꼼꼼이 확인하고 신경쓰셨죠.
그분들의 관심과 희생과 노력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농부의 행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농부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 가진 것을 다 팔아 ...’ 그 밭을 샀듯이, 신부님, 수녀님, 교리 교사들, 그리고 많은 어른들도 본당의 아이들이 교회의 미래이고 숨은 보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진 시간과 재능과 힘을 아이들에게 투자하고 희생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교회의 미래이고 보물인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짝퉁과 보물
-김찬선신부-
가짜와 진짜. 짝퉁과 보물.
저희 수도자들에게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합니다. 명품의 소유가 그 사람의 품격을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아무튼 사람들은 명품을 그리도 좋아하고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사도 아깝지 않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싸게 산 명품이 짝퉁이라면 그 돈이 얼마나 아깝고 속이 쓰릴 것이며 짝퉁에 속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여기 진짜 귀중한 물건이 있습니다. 국보급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귀한 보물인 줄 몰랐기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고 사갔습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아깝고 속이 쓰리며 보물을 몰라 본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 비교를 해 봅시다. 짝퉁을 몰라본 것과 보물을 몰라본 것 중에 어떤 것이 문젭니까? 짝퉁을 비싸게 주고 산 돈이 더 아깝습니까, 보물을 몰라보고 못 산 것이 더 아깝습니까? 짝퉁을 비싸게 주고 산 자기가 더 한심스럽습니까, 보물을 몰라보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 자신이 더 한심스럽습니까?
짝퉁을 속아서 산 것은 돈도 잃고 보물도 사지 못한 것이고 보물을 몰라보고 사지 못한 것은 보물은 얻지 못했어도 돈은 잃지 않은 것이니 짝퉁을 속아서 산 것이 더 한심하고 보물을 몰라보고 사지 못한 것은 덜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 영성생활에서는 그게 그것입니다. 짝퉁에 속은 것이나 보물을 몰라본 것이나 사실은 같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짝퉁에 속아서 보물을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짝퉁에 현혹되어 보물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는데 하늘나라의 보물은 이 세상의 짝퉁들에 가려지고 숨겨져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듯하지 않으면 누가 짝퉁에 속겠습니까? 그럴듯하면 누가 보물을 사지 않겠습니까? 보통 짝퉁이 더 그럴듯하고 보물은 허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반짝이는 눈이 필요합니다. 짝퉁에 속지 않고 보물을 알아보는 빛나는 눈, 지혜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보물을 알아봤으면 이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 투자는 사실 과감한 포기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도 잃지 않고 보물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네요.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가진 것을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보물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가 진정 나에게 그런 보물인지 자문하는 오늘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
-전삼용신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연아 선수가 은퇴를 하느냐, 선수 생활을 계속 하느냐를 두고 본인은 물론 온 국민이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물론 김연아 선수는 선수 생활을 계속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비록 나이가 스무 살밖에 되지 않지만, 어쩌면 김연아 선수는 자신이 꾸었던 꿈보다 더 많이 이루었습니다. 그 꿈이란 바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넘기 힘든 기록을 세우며 세계인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 나이에 돈도 명예도 더 이상 성취할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을 보며, ‘내가 이 작은 거 하나 따려고 이렇게 달려왔던가?’라는 ‘공허함’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야식을 먹어보는 것이라 합니다. 체중 관리를 위해 저녁 때 과일 한 두 개 먹는 것 이외에는 태어나서 야식이란 것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고생으로 따낸 금메달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한 고생에 비해 생각만큼 보상을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젊은 나이지만 은퇴를 한다고 했어도 뭐라 할 국민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몇 년 동안 온 국민, 아니 이제는 온 세계인들의 무거운 시선을 안고 다시 경기에 임해야 하는 부담감을 다시 떠안게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선택을 한 김연아 선수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또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높이 뜬 태양은 지는 일만 남은 것처럼, 최고에 오른 사람은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만큼 더 힘든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김연아 선수를 부러워합니까? 아이들의 마음에는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들어있습니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결국 가진다해도 공허함만 남을 그런 보물을 심어주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 마음의 보물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아깝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택이 아닌 부모님들이나 세상이 심어놓은 그 보물의 허무함을 알게 될 때는 그 책임은 누가 질수 있겠습니까?
사제들도 갱년기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사제품을 받고나서 갱년기를 바로 느끼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김연아 선수와 마찬가지로 사제가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목적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사제가 되고나니 추구해야 할 꿈이 없어진 것입니다.
또 사제 생활을 한 15년 정도를 한 분들은 그 사제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제로 살아도 남는 것이 없는 것 같고, 심한 외로움을 느낀다고도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목숨을 바칠 만큼 소중한 보물을 가슴에 지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비록 짝사랑일지라도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한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보물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에너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즉 자신이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성취하고 싶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냥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찾는 보물이 마음 안에 존재하더라도 제대로 된 보물이어야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성취했지만 공허감만 남는 것이라면 길에서 발에 차이는 아무 가치 없는 돌멩이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평생 모든 것을 바쳐 찾아 헤맨 것이 결국 죽을 때 다 놓고 가야하는 명예나 돈, 인기 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 안에 묻혀있는 보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그 보물을 ‘하느님나라’라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나라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분과 함께 있는 행복이 바로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모든 것,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바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보물은 바로 우리들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얻기 위해 당신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보물로 삼아, 그 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명예, 목숨을 버리며 그 분을 찾았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그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밭에 묻힌 보물임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의 결말은 헛된 것을 보물로 여기며 평생을 산 사람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진정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라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 그것을 얻기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쓰는 그 대상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이라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요 하느님나라의 행복이 되도록 합시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여행을 하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도 다 떨어졌지요. 강렬한 태양빛에 사흘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그는 살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끝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사막 한가운데서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하여 급히 물을 마시고 나니 주위에 몇 개의 천막들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혹시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 조각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작은 알맹이들이 만져졌습니다. ‘치즈나 초콜릿이나 빵 부스러기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주머니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 움큼 꺼내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값비싼 진주알이었습니다. 그는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절규했습니다. “이것이 빵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겨우 진주란 말인가?” 그리고 그 사람은 사막에 누워 죽어갔습니다. 사막에서 목숨이 다급할 때는 아무리 값진 보석도 필요 없지요. 바로 이 순간에는 500원짜리 빵 하나만 살 수 있다면 모든 재산을 다 주어서라도 사려고 하지 않을까요? 이는 아무리 불행과 시련이 계속되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생명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조건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살펴보지요. 복음에서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이는 어떻게 행동을 취했습니까? 그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두 사람 모두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팔아서 원하는 밭과 진주를 샀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의 일부를 팔아서 또는 다른 이들에게 빛을 내어서 밭과 진주를 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돈 많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돈 많은 부자 청년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라는 답변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지요.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보다는 재물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주님보다 귀하신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밭에서 발견된 보물보다도 또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값진 진주보다도 더 귀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결코 아깝지 않은 분이 주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며,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불행과 시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을 우리는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까요? 재물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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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보거든
-여상훈-
살다 보면 창졸간에 인생관이 뒤바뀌고 상식이 뒤집히는 계기를 몇 번은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런 사건으로 지혜로운 눈을 뜨기도 하고, 때로는 인정사정없는 망나니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인도에서 피팔라야나라는 젊은이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기가 파놓은 흙구덩이에 벌레가 한 마리 꿈틀거리는 걸 보는가 했는데 새가 날아와 벌레를 물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같은 시각에 그의 아내도 다른 곳에서 참깨를 널어 말리는데, 참깨 사이에서 꿈틀거리던 벌레를 새가 날아와 잡아먹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같은 순간 젊은 부부는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살생의 죄악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체득했습니다. 그 커다란 깨달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 두 사람은 출가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 남편이 바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하카샤파입니다. 그리스도교에도 그런 소중한 각성과 구원을 향한 초대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가장 유명한 예가 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수도자·성직자·신자들이 영생의 신비를 발견하고 극적인 인생 반전을 겪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는 보석에 방점을 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차지할 가치가 있음에 밑줄을 긋겠지요. 제 오랜 친구도 할머니 모시고 루르드로 효도관광을 갔다가 순백의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뭘 보기라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할머니 어깨를 안고 무릎을 꿇었는데 이렇게 사는 게 아니지, 하는 독백이 나오더라고 하더군요. 정말 그것뿐이었는지 짓궂게 묻는 제게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듣거나 보지 못했다. 다만 구원의 영광을 내가 왜 마다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언젠가 신부님의 강론 가운데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가 모두에게 숨겨져 있으니 열심히 찾아보라고 하시는 말씀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자꾸 여쭈어 봅니다. 그 보물, 정말 제 안에도 숨겨두신 건가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요? 말씀과 표징의 기록과 무수한 증언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헤매지만, 그래도 낙담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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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보물 찾기 -김찬선신부-
지금도 그런 것이 없지는 않지만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 포기에 대한 강박이 있었고 그것은 저뿐 아니라 형제들 거의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가난하고,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도 그때는 덜 가난하다, 왜 포기하지 않느냐 하며 자책도 하고 다투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가난하지 않다고 미워하기까지 하였으니 가난이 사랑보다 더 가치우위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분위기가 어두웠습니다.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목적이 있기 마련인데 가난을 살고, 포기함에 있어서 왜 가난해야 하는지 왜 포기해야 하는지 그 목적이 없었던 것이고, 목적이 없었기에 목적 성취의 기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가난, 포기 그 자체가 강박적으로 목적이 되어 가난, 포기는 상실,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다 포기하고,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한 무엇을 포기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데 잃기만 하고 얻는 것이 없으니 상실감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기쁘지 않은 가난, 우울한 가난은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하느님도 그런 가난은 기꺼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괜히 가난해질 필요가 없고 괜히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가난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난하고 포기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하늘나라를 위해 가난하고 포기하라 합니다. 하늘나라야말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도 좋을 만큼 값진, 모든 것 팔아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귀한 보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보물은 밭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고 보통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나서야 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값진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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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보물, ‘사람’ 보물
-이수철 신부-
눈만 열리면, 욕심만 비우면
하느님의 보물로,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하느님의 보물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는 참 좋은 보물이 ‘사람’입니다.
아주 예전 초등학교 시절 도덕책에 나왔던 이야기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어머니들이 모여 제 각기 보물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 자랑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한 어머니의 당당했던 자세입니다.
“제 가장 좋은 보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얘들아 이리 들어와라.”
그 어머니의 말에 건강하고 선량해 보이는 세 아들들이 들어오자
즉시 어머니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이 세 아들들이 저에게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입니다.”
제 각기 보물을 자랑하던 어머니들,
이 어머니의 자식 보물 자랑에 머쓱해져
말문을 잃었다는 요지의 일화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자식들은 눈에 보이는 최고의 보물일 것입니다.
저에게는 저희 수사님들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입니다.
좋은 운동선수야 거액을 주고 스카우트라도 해 올수 있지만
아무리 거액을 지불하더라도
하느님의 보물인 수도자는 사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참 좋은 보물이 ‘사람’입니다.
하여 좋은 스승이나 좋은 친구, 좋은 자녀나, 좋은 반려자를 만나면
모든 것을 바쳐 올인(all-in)하지 않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이런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람’ 보물이 있습니까?
우리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 보물을 발견하면
우리처럼 올인(all-in)하십니다. 오
늘 복음의 예수님, 1독서의 예레미야,
그리고 모든 성인성녀들이 하느님이 올인(all-in)했던 보물들입니다.
아니 이분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 하느님의 보물들로
역시 우리를 향해 올인(all-in)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사람’ 보물로는 부족하고 불안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물은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이 지칭하는 보물은 바로 ‘하느님’ 보물을 뜻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간절히 올인(all-in)하여 찾을 때 '하느님' 보물을 발견합니다.
삶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말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보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보물을, 진주를 찾았습니까?
찾고 있습니까?
찾기를 포기했습니까?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하느님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찾지 못하면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에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이 ‘하느님’ 보물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깨어 항구하게 ‘하느님’ 보물을 찾는 삶,
바로 믿는 우리 모두의 수행생활입니다.
성경이야기들 대부분 ‘하느님’ 보물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니 살아있는 ‘하느님’ 보물과
‘사람’ 보물의 만남의 이야기들입니다.
만남을 통해 서로의 관계는 깊어지고
보물의 진가 역시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주님과 예레미야 예언자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하느님께는 둘도 없는 당신의 보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요,
예레미야 예언자에겐 둘도 없이 귀한 보물이 하느님이십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제가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정직하고 솔직할 때 구원입니다.
고상한 기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스트레스를 푸는
투정, 탄식, 원망의 기도도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가 아니 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보물을 만난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보물이
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하느님 보물과의 깊은 관계가
모든 힘과 지혜의 원천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당신의 보물들인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 모두 최고의 보물인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로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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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예레미야 -경규봉 신부-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들과 다투지도 않았고, 그들로부터 고발당할 만한 짓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시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쁨에 겨워 행복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 때문에 자기가 외롭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에 대해 환멸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소명에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예언자를 훈계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예레미야가 다시 확실하게 하느님께 돌아오고, 경솔하게 말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만 계속 하느님의 예언자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언자는 굳세어야 하고 백성에게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구해주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진리를 수호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땅히 그러해야 하고,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꾸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그러한 이들이 가진 자들로부터 박해와 모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진리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진리를 따라 살기보다 자신들의 이익과 탐욕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않는다. 옳고 그름보다는 자신에게 이익과 불이익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온갖 불의와 죄악이 넘쳐난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백성에게 선포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옳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권력자들은 아닐지라도 백성의 대부분이 자신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리라고 믿었다.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것처럼 백성도 그러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백성들까지도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지만 참 예언자의 선포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는 백성으로부터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백성의 박해와 저주로 인하여 하느님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해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통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에 대해 저주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그를 악인들의 손에서 구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도록 격려하신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행복을 얻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구하는 신앙인이 오히려 하느님과 그 말씀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 때, 대부분이 하느님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쉽다. 이는 하느님을 믿기보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행복을 기대하는 자신의 믿음을 믿기 때문이다. 신앙인도 하느님을 믿기보다 자신을 믿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흔들리기 쉽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요한 15,18) 하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하느님을 미워하고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진리를 행하는 신앙인이 박해를 받을 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그 말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그 말씀을 전하는 신앙인은 박해를 각오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임을 믿고 자신의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소명에 따라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한다. 오늘, 그러한 굳은 믿음을 주십사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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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보화를 얻기위한 길 -조욱현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런 이야기였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은행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중품을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땅에 묻어두는 것이었다. 마태 25,25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 자기 주인에게 받은 1달란트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대 스승들은 자기 제자들에게 "돈과 보물을 숨기는데 가장 안전하고 유일한 장소는 땅이다!"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시끄럽지만 역사적으로도 잦은 전쟁으로 재난을 겪은 곳이라서 불안한 생활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불시에 도망을 가더라도 나중에 되돌아 와서 되찾게 될 것을 바라고 자신들의 귀중한 보화를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다. 그러면서 감추어진 물건에 대한 그들의 율법은 "발견한 물건은 발견한 사람에게 속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보화란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깊숙이 묻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다. 첫째로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기까지` 매일 매일 자기 일을 성실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하는 가운데 영원한 우리 삶의 보화를 발견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귀중하게 가지고 있었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여야 자신이 발견한 그 값진 보화를 정당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집착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 나아 가는데 장애가 되는 인간적인 집착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집착은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 있고,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보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일 수 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숨이다. 그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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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경국 신부-
목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목적하는 것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목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하며,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은 부수적인 수단에 불과하므로 그것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삶에서 설정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냥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가끔씩 우리가 스스로 설정한 삶의 목적을 상기하면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목적에 맞게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로 표현되고 있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평생을 바쳐서 도달해야 할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대가로 치르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며, 아까운 일도 아닙니다.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 지불할 수 있는 수단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 부합하게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에 의거하여 이웃에게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남은 삶을 살아갈 때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늘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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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를 위한 투자는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호신부-
한참을 복음 말씀을 생각하다 보면, 하늘나라가 얼마나 귀한가? 우리가 얼마나 탐낼만한 곳인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천당이란 곳이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보물을 찾아낸 사람처럼 있는 것을 다 팔만할까?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또 가진 것 모두를 팔만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본적도 없고, 단 하나의 경험조차 없기에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짐작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 하늘나라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이 더 커보이는 우리의 현실은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움켜쥐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송한 마음에 조금씩이라도 하느님께 내어 놓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메우려 하거나 혹은 그 양을 가지고도 싸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은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부를 우리는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 우리가 대답을 준비하기 전, 우리는 오늘 우리가 들은 또 하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한 번 내용이나 들어볼까요?
"너의 마음을 돌려 잡아라. 나는 다시 너를 내 앞에 서게 하여 주겠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은 말을 하여라.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운다.
백성이 너에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백성에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그런 놋쇠로 든든하게 만든 성벽처럼 세우리니, 이 백성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너를 꺾지 못하리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며 악한들의 손아귀에서 빼내 주리라."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몰려드는 생명의 위협, 조롱 속에 괴로움을 당하던 예레미아에게 하느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하느님은 아주 어리고 작은 예언자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 여린 예언자를 꺽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대단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의 훌륭한 미래를 하느님이 지켜주고 싶어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런 눈으로 보면 우리는 예언자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이 예언자를 지켜주고 싶어하셨던 것은 당신의 뜻과 사람이 살아야 할 참 사랑의 길이 이 어린 사람에게서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만 전부를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조차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려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무조건 받기만 하시고 판단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말하며 그것이 이루어진 상태가 곧 하늘나라의 상태일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의 삶이기에 이 삶이 완전히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란 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그 삶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미 걸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요,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부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도 함께 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 사랑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심을 우리 모두 체험하는 시간들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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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떤 분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분의 요즘 어려움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요즘 이(齒)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하도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풍치라고 하네요.” “풍치면 이제 형제님 좋아하시는 술과 담배도 하시면 안 되겠네요. 풍치에 술, 담배가 그렇게 나쁘다면서요?” “맞아요. 그래서 의사선생님도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이 좋은 것을 어떻게 끊죠?” “그래도 빨리 나으려면 술, 담배부터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병을 빨리 고치려면 의사 선생님께서 처방하시는 것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 힘들어도 꾹 참고서 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끊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순간적인 만족을 얻을지는 몰라도, 자기 병의 치료는 더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육체의 병을 고치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병을 고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 우리 자신의 최선의 노력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을 말씀하시지요. 어떤 사람이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자기 밭도 아닌 남의 밭에서 발견된 보물이라면, 그 밭주인에게 말해주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몸이 힘들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순간적인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쁨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보물을 뒤로 미루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보물인지 알면서도 ‘나중에 찾지 뭐...’라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깊이 묵상하는 오늘이 되어 봅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삽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빠다킹신부
우리 안에 숨겨진 보화
-서현승 신부-
최근의 통계를 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현상은 중산층으로 갈수록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신자 수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예산을 대충 비교해 보면, 우리가 개신교의 1/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개신교는 십일조를 철저히 바치도록 하는 데 비해, 우리는 본당 운영에 필요한 액수를 신자들이 분담하도록 하는 ‘교무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개신교는 하느님께 받았으니 당연히 돌려드려야 한다는 ‘감사의 정신’을 전제로 하고, 우리는 ‘의무감’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니 비교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일은 신앙의 기쁨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처럼,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 밭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다 팔 수 있게 되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투자에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게 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구원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의 진부한 일상을 바라보고 체념할 것이 아니라,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보화를 먼저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박혜원-
◆주일학교에서 달란트 잔치를 했다. 아이들은 그동안 모은 달란트를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산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샀는지 물어본다. 그 아이의 성격이나 가치 편향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동생이 다가왔다. “언니야, 욱이 뭐 샀는지 알아?” “로봇 샀다면서?” “그것 하나만 달랑 샀대. 나머지 달란트는 다 남, 줘버렸대.” 조카는 잔치를 준비할 때부터 로봇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시작하자마자 그것만 사고 끝이었단다. “멋진데? 오직 보물 하나만을 위해서 전재산을 판 사람과 같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하나씩을 가슴에 담고 산다. 그것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리는가 하면, 이것저것 뒤섞여 어느 게 중요한지 모르고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보물이, 쓰다 보면 망가져 없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만 즐거운 것도 있고 나눌수록 많아지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도 있다. 장난감 로봇 하나로도 하루 종일 행복한 것임에야 참된 보물이 주는 기쁨은 비길 데 없을 것이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영원한 보물 하나만 지니는 삶은 진정 향기로울 것이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보물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보물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진정 아름다운 것일까?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양승국신부-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하더라도>
가끔씩 지극한 정성으로 ‘그 뭔가’를 열심히 수집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우표수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외국돈수집, 병뚜껑수집, 성냥갑수집, 열쇠고리수집, 지나간 만화수집, 과자 상표수집, 옛날 음반수집... 정말 다양합니다.
그분들 가만히 생각해보니 훌륭한 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지난 우리의 역사를 수집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우리의 지난 추억들을 수집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삶을 정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이런 분들도 만납니다.
거의 전 재산을 다 바쳐 ‘그 뭔가’를 수집합니다. 어디 ‘좋은 물건’ 나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 물건을 손에 넣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그 물건이 어디 있든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비싸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획득하기까지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뭔가’를 손에 넣고 난 후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 역시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중요한 것’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의 총력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할지라도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할지라도 단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나라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들 수집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소중한 것들을 손에 넣었다할지라도 하늘나라를 얻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종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실패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목표들 가운데, 별 의미 없는 것들은 옆으로 밀쳐두고 우리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것, 하늘나라를 가장 중심에 두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표수집도 좋습니다. 화폐수집도 좋습니다. 음반수집도 좋습니다. 연예인 사진 수집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가장 첫째가는 수집 대상 물품은 바로 하늘나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참 보물
-이수철신부-
여러분은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까? 무슨 보물입니까?
보물도 사람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잘난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식이,
죽마고우와도 같은 친구가 보물일 수도 있고,
고가의 부동산이나 고액의 예금한 돈이,
장롱 깊이 감춰 놓은 금붙이 패물이 보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누구엔가는 자기만의 전문 기술이나 지식이,
심신의 좋은 건강이 보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이들이 참 보물일 수 있겠습니까? 진정 이들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는 보물들이요,
또 이 보물들 지키려다 보면 여기에 매여 자유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물들 영혼의 갈증을 결코 해갈시켜 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보물은 없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참 보물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하느님, 하늘나라,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 명칭만 다를 뿐
똑같은 하나의 보물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믿을만한 영원히 지닐 수 있는 참 보물 하느님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여기 수사님들
참 보물 하느님을 찾아 낸 분들입니다.
예로부터 숱한 성인성녀들의 삶이나,
오늘 날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많은 수도자들이나,
세상 한 복판에서 무소유의 정신으로
가난하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이 참 보물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외관상 가난해 보여도,
내면의 마음 밭에는 하느님 보물을 지닌
참 부자들이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부러울 것, 아쉬울 것 하나 없는,
하느님 보물 하나만으로 행복한 부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봅니다. 하느님 보물을 찾은 행복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 보물을 찾는 중인 사람들,
셋째는 세상 보물에 탐닉하여 하느님 보물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보물이,
거액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
스스로 찾아야 하는 보물이 하느님 보물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이요,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이듯이,
하느님 보물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보물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기쁨, 행복, 희망,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 하느님 보물 발견할 때
세상 보물의 덧없음을 속속들이 깨달아
저절로 따라오는 이탈에 무욕의 청빈한 삶입니다.
이 하느님 보물을 지닌 이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상처나 타격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관상 외롭고 고독해보여도
절대 우울증이나 치매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자가
성령의 은총으로 마침내 마음의 눈 열려 하느님 보물을 발견합니다.
사실 어디에나 하느님 묻혀있는 보물 밭이기에,
내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하느님이기에,
굳이 하느님 보물 찾아 밖으로 나갈 것 없습니다.
하느님 보물찾기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보물에 현혹되어 끊임없이 방황하다가
시간과 정력 다 탕진해 버리고 몸과 마음 망가진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돈을 잃어버리면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고,
명예를 잃어버리면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요,
건강을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란 말도 있는데,
하느님 보물을 잃어버리면 그 손실은 얼마나 크겠는지요?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심한 팔자타령하다 하느님 보물을 발견하고 환호하지 않습니까?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찾지 않으면 금방 하느님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쁨에 환호하던 예레미야
변덕스럽게 또 금방 하느님 탓하며 신세타령하지 않습니까?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은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어도 하느님 앞에서 풀면 구원이 있고,
이런 신세타령도 하느님 앞에서 하면 기도가 됩니다.
이 또한 하느님 찾는 과정 중의 하나였고
즉시 하느님의 응답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보물은 한번 발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찾지 않으면 하느님 보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수도자들 하느님 보물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립니다.
평생 죽을 때 까지
끊임없이 하느님 보물을 찾고 새롭게 확인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복된 미사 중에
참 보물인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모시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부자들입니다.
아멘.
신앙은 보물이다.
-신은근 신부-
복음 말씀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다. 밭에 묻힌 보물이라 했다. 보물이 묻힌 것을 알면 누구나 살 것이라 했다. 값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보물이 묻힌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여기에 있다.
해답은 신앙 생활이다. 믿음의 길이 보물의 밭으로 가는 열쇠다. 이 길을 걸으면 누구나 보물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 그분의 힘과 권능을 깨닫게 된다.
남은 일은 밭을 사는 일 뿐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기쁨의 신앙 생활이다. 삶의 어려움을 맡기는 일이다. 두려움을 벗어난 신앙이라면 이미 보물의 밭에 발을 디딘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하느님의 힘을 깨달아야 두려움이 극복된다는 사실을. 그들에겐 믿음이 아직도 현실이 아니다. 이론과 생각 속에 머물고 있다.
그러니 믿음의 길에 보물이 있다 한들 곧이 들리겠는가. 신앙 생활을 보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보물은커녕 짐으로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귀찮아 떠나고 싶지만 겁나서 못 떠나는 사람도 있다. 삶의 멍에로 바뀐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몰라서 그렇다. 신앙이 보물로 바뀔 수 있음을 모르기에 묻어두고 산다. 보물이 인생의 짐으로 바뀐 것이다. 묻어둔다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 생활을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두려움 때문에 한다는 말이다. 하다가 그만 두면 벌 받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니 깨달음이 오겠는가. 기쁨이 느껴질 리 있겠는가.
신앙은 습관이 아니다. 매일의 고백이고 다짐이다. 그러기에 날마다 보고를 드린다. 주님 다시 시작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렵니다. 이것이 매일의 기도다. 하루의 첫 행동이 기도라면 어찌 신앙이 보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기도의 위력을 아는 이에겐 신앙은 보물이란 말이 금방 이해된다. 기도의 힘을 모르는 사람에겐 아무리 신앙을 보물이라 해도 건성으로 들린다. 보물은 밭에 묻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물이 묻힌 것을 알면 모든 것을 팔아 산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알려 주신다. 무엇이 보물이며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살면서 부딪치는 사건과 만남이 그것이다. 그 안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인 것이다. 왜 이 만남이 있었는지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연습인 것이다. 이런 생활이 보물이 묻힌 밭으로 가는 행동이다. 사건과 만남은 우연인 듯해도 모두가 필연인 것이다.
신앙 생활도 노력해야 한다. 늘 새 마음을 지니는 작업이다. 이런 시도가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의 밭은 사는 첫 걸음이다. 보물은 하느님의 권능 안에 있다.
그분의 힘과 능력을 깨달으면 삶을 괴롭히는 것들의 의미 또한 깨닫게 된다. 십자가가 있기에 믿음이 있는 것이다. 신앙을 통해 고통은 보석이 되는 것이다.
왜 이 고통을 주셨는지. 왜 이 시련을 주셨는지. 답을 만나는 것이다. 답을 깨닫게 되면 보물의 밭을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은 의미를 깨달은 이에겐 더 이상 아픔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석이 되어 앞날을 밝게 한다. 신앙 생활은 그런 보석이 묻힌 밭이라 했다.
가진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했다. 믿음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자. 정성과 애정을 드린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올 것이다.
- 이영훈 신부 -
절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 있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데, 가방에는 맛있는 음식과 새로 산 최고급 등산복, 각 종 신용카드, 최신형 카메라, 자동차, 아파트 열쇠, 부와 권력을 담고 있는 각종 회원권과 신분증 등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의 손은 그 어디에도 아닌, 바로 별 볼 일 없는 밧줄을 잡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연히 이 밧줄을 놓는 그 순간 그는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은 맛있는 음식도, 좋은 옷도, 돈도 아니라, 바로 밧줄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만약 그가 평소 생각처럼 밧줄을 그리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려고, 옷을 입으려고, 돈을 만지려고 밧줄에서 손을 놓는 그 순간 그는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오히려 그가 살기 위해서는 무거운 가방을 던져 버려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절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밧줄에 자신의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힘을 다해 그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가방 속에 있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밧줄을 놓고 가방 속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입장에서 밧줄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리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더 소중하겠지만, 내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그 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보물이며, 생명 자체이며, 희망이다. 그러면 우리가 절대 놓아선 안 될 줄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될 생명줄이다. 삶의 행복과 영원함을 바라는 우리에게 이것은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보고 있고, 정말 소중히 받아들이며 간직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주신 그 모든 사랑과 은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얼마나 감사드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보여 주신 그 사랑의 길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밭에서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평소 보아 온 그 밭을 그리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얻는다. 그 사람처럼 이미 우리는 복음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최고, 최상의 보물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복음을 얻고자 그리고 사랑하고자,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걸까? 예수님의 말씀과 삶만이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려고 하지 않고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가? 세상의 이윤을 얻는 데에는 날쌘 독수리와 끈질긴 진돗개와 같으면서도 왜 하느님 나라를 얻고자 하는 데에는 태평세월일까? 우리 앞에 하느님 나라 열쇠가 있다. 이미 우리 손 안에 그 열쇠가 있다. 그런데 그 열쇠는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겁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을 힘도 모자라고 여유가 없는데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또 무엇을 얻으려고 천국의 열쇠마저도 던져 버리려고 하는가?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무엇인가?
보물과 진주
-강영구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대에게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가 생각납니다. 문부성의 하급관리 루아젤의 부인 마틸드는 친구 포레스티에로부터 빌린 가짜 보석 목걸이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빚을 내어 꼭 같은 목걸이를 사서 되돌려줍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빚을 갚기 위해 하녀처럼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폭삭 늙고 만다는 줄거리입니다. 사치와 허영심이 인간을 어떻게 눈멀게 하고, 어떻게 허망하게 젊음과 세월을 낭비하게 하는가를 잘 말해주는 단편입니다.
보석감정사는 진짜와 가짜 보석을 가려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값비싸고 고귀한 것일수록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진짜 보석과 진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탐욕, 어리석음, 허영심, 미움과 증오, 자기과시 따위는 사람을 눈멀게 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눈먼 사람은 엉뚱한 가짜에 매달려서 시간과 젊음과 정력을 낭비하고, 하늘나라마저도 잃게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은 진짜 보석과 진주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진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보물과 진주에 비유된 하느님 나라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군중을 떠나 다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밀과 가라지가 성장기간에는 서로 섞여 자라지만 추수 때가 되면 철저한 추수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가라지 비유의 설명 안에는 마음의 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성장하는 동안에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여건과 조건을 잘 활용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경고와 독려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밀알이 좋은 밭에 뿌려졌다 하더라도 그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추수 때 따로 묶여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따라서 신앙인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제로 실천하며, 그 나라를 세상의 무엇보다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또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마태 25,34)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강제나 의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강요되는 나라가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만이 그 진실을 알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비유설교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마태오복음 고유의 비유로서 아주 짤막한 문장으로 비유가 원하는 명쾌한 뜻을 전달하고 있다.
‘보물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묻혀 있는 그 밭을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하루의 노동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소작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지주(地主)의 밭을 갈다 보물을 발견하고는 다시 묻어둔다. 보물이 묻혀있는 그 밭이 자기 소유가 아니므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는 것이다.
‘진주의 비유’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장사꾼’은 앞의 소작인과는 달리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자일 수도 있다. 그가 늘 좋은 진주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구도자에 비유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보물과 진주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언어(比喩言語)라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가 보물이나 진주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로 비유(比喩)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원관념)을 다른 대상(보조관념)에 빗대어 나타내는 것을 말하며, 그런 방식을 비유법이라 한다. 비유법(比喩法)에는 직유법(直喩法), 은유법(隱喩法), 환유법(換喩法), 제유법(提喩法), 대유법(代喩法) 등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직유법은 “대나무처럼 키가 큰 사람”, 은유법은 “내 마음은 호수다.”, 환유법은 “나는 괴테를 모두 읽었다.”, 제유법은 “바다에 돛이 떠 있다.”, 그리고 대유법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백의의 천사” 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비유를 대하면서 조심해야 할 점은, 자칫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귀한 보물이나 값진 진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을 그런 좋은 보물이나 진주, 즉 귀한 물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그런 보물과 진주에 빗대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고 하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은유법(隱喩法)임을 알아야 한다.
하늘나라와 보물(진주)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보물이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므로 하늘나라를 보물에 비길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결코 인간의 소유가능한 대상물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더욱 더 그렇다. 하느님은 사물(事物, res)이 아니라 위격(位格, persona)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위격이시라는 말은 마치 인간이 가진 인격(人格)과 흡사하다. 인격은 인간에게서 비교적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성격이나 경향, 또는 자아의식으로서 하느님의 위격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이 돈으로 몸을 살 수 있어도 마음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위격도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위격은 오직 그분과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고 소중하게 깨닫고 사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얻은 자는 가난한 소작인처럼 보물을 발견하고 그렇게 기뻐하면서(44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다.........◆
<숨겨진 보물>(마태 13,44-46)
- 유광수 신부-
한 수피 선생이 집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그는 그 열쇠를 밖의 잔디밭에서 찾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손가락으로 잔디 잎사귀 사이사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의 제자 여남은 명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집 열쇠를 잃어버렸네."
"저희도 함께 찾아볼까요?" "그래 주면 좋겠구먼."하고 스승은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무릎으로 기며 손가락으로 잔디 잎 사이사이를 뒤졌다.
해가 떠서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그 중 영리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그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 선생은 대답했다. "물론 알고 말고. 집 안에서 잃어버렸지."
그러자 제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집 밖에서 찾습니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분명하지 않은가, 여기가 더 밝거든."
우리 모두는 집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집 안에서
살고 있지 않고 밖에서 찾고 밖에서 헤메고 있다.
하늘 나라란 행복한 나라이다. 우리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하늘 나라를 발견하면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찾아 나서고자 하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여기 저기 행복을 찾아 헤메이고 있기 때문에 바쁘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고,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여기 가서 무엇을 듣고 보고, 저기 가서 듣고 보고 하자니 얼마나 바쁜가? 열쇠를 잃어버렸으나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른 채 엉뚱한 데에서 열쇠를 찾느냐고 모두들 부산을 떨고 있다.
우리가 하늘 나라(행복)를 발견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하늘 나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즉 하늘 나라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찾아 나서지 않으면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 하늘 나를 찾아나서는 자 만이 발견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이 흡족하리니."(마태 5,6)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 나라를 찾고자 하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발견 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 또는 求道者라고 할 수 있다. 안주하고 있는 이는 결코 하늘 나라를 발견할 수 없다.
둘째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즉 찾고자 하는 보물 또는 값진 진주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나서지만 무엇이 보물인지 값진 진주를 모르기 때문에 하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을 찾고 있다. 하늘 나라인 숨겨진 보물 또는 값진 진주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가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8-10)라고 말씀하셨고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수피 선생처럼 집안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듯이 보물을 숨겨둔 곳이 어디인지 값진 진주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야 찾아 낼 수 있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은 복음이다. 복음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보물을 발견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활동에서 또는 일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하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복음은 하늘 나라를 찾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늘 나라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를 발견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우선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보물을 발견한 데에서 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기쁨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요, 하늘 나라를 차지 발견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이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시편 33,10)
둘째, 마음에 평화를 얻는다. 찾고자 했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욕망이 없다.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로워 진다. 어떤 곳에 있든 불안하지 않고 늘 평화롭다. 그리고 고요 속에 머문다. 고요 속에 머물면서 주님을 보고 맛들이고 음미한다.
셋째, 충만함을 느낀다. 찾고자 했던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만족스럽고 충만해진다. 그래서 더 이상 배 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외롭지 않다. 충만하니까. 늘 여유가 있고 관대해진다. 짜증 내지 않는다.
왜? 충만하니까.
넷째,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찾고자 했던 것을 발견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별견한 보물만으로도 배부르고 충만한데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는 일은 즐거움이다. 아니 버리라고 하지 않아도 버리게 된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값진 진주를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물은 결코 멀리 있는 곳에 있지 않다. 값진 진주는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복음인 바로 여기에 지금이라도 찾아 나서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발견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이미 그 보물을 발견하고 충만함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보물을 발견 한데에서 오는 기쁨과 충만함과 관대함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 때 가장 좋은 복음선포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축복에로 불리움 받은 복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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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