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 국내 유가는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출퇴근길 지나치는 서울 노원구 한 주유소의 경우 일반 휘발유 가격은 1,700원, 고급 휘발유는 2,0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 휘발유는 1,500원 대, 고급 휘발유는 1,800원 대 수준이었다. 잠깐 사이 많이도 오른 셈이다. 실제로 국내 유가는 8주 연속 상승세다. 그런데 엎치락뒤치락 하는 그래프를 잘 살펴보면 이미 1년 전부터 꾸준히 오르고 있다. 지난달의 경우 전년 동월 대비 가격이 휘발유는 11.8%, 경유는 14.6% 상승했다.
기자는 지난달 큰 맘 먹고 현대차의 고성능 해치백 벨로스터 N을 구입했다. 출중한 성능과 주행모드를 다섯 가지나 갖춰 출퇴근은 물론 가끔 주말엔 경주장을 방문해 스트레스를 풀기 제격이다.
하지만 신나게 달리고 나면, 근심이 밀려온다. 기름 값 때문이다. ‘과거 연애할 때도 이렇게 돈을 많이 썼을까?’ 싶을 정도로 유류비가 많이 나간다. 심지어 이번 달은 주유 포인트로 공짜(?) 치킨을 먹기도 했다. 이런 소심한 걱정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 즈음, 기아차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에 마련한 시승 행사장에 도착했다.
이날 만난 기아차 니로 EV는 벨로스터 N과 정반대 콘셉트다. 기아차는 키워드로 ‘친환경’, ‘경제성’, ‘가성비’ 등을 내세운다. 현대차 코나 EV와 비슷한 경우다. 기아차는 지난 7월부터 니로 EV 판매에 돌입했다. 지난달에만 976대나 팔아 니로 전체 판매량에 크게 기여했다. 기아차에 따르면 니로 EV는 출시 두 달 만인 지난 9월 10일까지 8,500건의 계약을 기록해 대박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하루 이틀 충전 하지 않아도 출퇴근 걱정이 없을 만큼 넉넉한 항속거리와 뛰어난 파워를 꼽을 수 있다. 니로 EV는 1회 충전으로 385㎞ 주행 가능하고, 100㎾ 급속충전기를 이용하면 54분 만에 배터리의 80%를 충전한다. 최고출력은 150㎾. 환산시 204마력으로 현대차 아반떼 스포츠와 같다. 강력한 파워를 바탕으로 정지상태에서 100㎞ 가속 또한 7.8초로 준수하다. 차체 길이는 4,375㎜로 현재까지 출시된 국산 전기차 중 가장 크기도 하다.
니로 EV를 타고 왕복 100㎞ 가량 되는 시승 코스를 달렸다. 혼잡한 서울 홍은동 일대에서는 가고 서고를 반복하는 굼벵이 주행을 하다가 제2 자유로에 차를 올려 가속 페달을 바닥 끝까지 밟아보기도 했다. 강북 주민들의 출퇴근 길 묘미인 내부순환도로까지 관통하며 이 차가 실제로 얼마나 주행 가능한지에 대해 알아봤다.
니로 EV는 물리적 연결 대신 전기신호로 작동하는 ‘쉬프트 바이 와이어(SBW)’를 탑재했다. 다이얼로 P(주차)-R(후진)-N(중립)-D(주행)를 넘나든다. 개인적으로는 형제차 현대 아이오닉 EV의 버튼식보다 조작이 편했다. 특히 주차나 유턴 등 전진과 후진을 오가는 상황에서 보다 빠르게 조작할 수 있다. 다이얼을 돌리는 느낌도 훌륭하다.
니로 EV는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과 달리 기어 박스가 사라지면서 엄청난 수납공간이 생겼다. 각종 공조장치 아래에는 무선충전을 위한 스마트폰 전용 공간까지 마련했다. 여자 친구 혹은 어린 자녀들과 먹거리를 쌓아놓고 드라이브를 떠날 때 걸리적거릴 일이 없다.
다이얼을 돌려 주행에 나섰다. 스티어링 휠은 게임기처럼 가볍고 가속 페달을 밟아도 굉음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밟아도 훅훅 치고 나간다. 모터 회전수에 상관없이 최대 파워를 뿜는 전기차 특유의 강점이다.
니로 EV의 주행모드는 총 4가지. 에코와 노멀, 스포츠가 기본이며 드라이브 모드를 길게 누르면 에코 플러스 모드로 바꾼다. 각 모드별 주행 느낌은 큰 차이가 없다. 가속 페달의 느낌만 달라진다. 스포츠 모드는 배터리 잔량에 개의치 않는다. 밟는 만큼 차가 튀어 나간다. 노멀과 에코, 에코 플러스로 내려갈수록 가속 페달 조작에 따른 차의 반응이 둔해진다. 고무줄 장력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랄까. 강제로 경제적인 운전을 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패들 시프트를 더했다. 사실 모양만 패들 시프터지 실은 회생제동 컨트롤이다. 제동 시 발생하는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총 4단계로 왼쪽 레버를 당길수록 강한 회생제동을 건다. 오른쪽 레버는 반대 역할을 한다. 왼쪽 레버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출퇴근길에 쓰기 좋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차가 알아서 제동을 걸며 배터리를 충전한다. 상황에 따라 좌우 패들 시프터를 슬기롭게 조작하면, 주행가능 거리를 늘릴 수 있다.
유의해야 할 점도 있다. 코너 진입 전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동시에 제동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한 다운 시프트 용도로 쓰는 덴 한계가 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있으면 작동이 안되기 때문이다. 미리 패들을 당겨 놓고 브레이크 페달을 조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오른쪽 레버는 쾌적한 고속도로를 정속으로 달릴 때 사용하면 좋다. 왼쪽 레버 조작은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느낌이라면, 오른쪽 레버는 반대로 탁 풀어 놓아주는 느낌이다. 니로 EV는 폭발적이진 않지만 택시의 미터기 요금 올라가듯 서서히 속도가 올라간다. 계기판에 표시된 시속 200㎞ 도달은 어렵진 않아 보이나, 빠르게 줄어드는 주행거리를 보고 이내 가속페달을 놓았다.
대부분 전기차가 그렇지만 니로 EV는 회생제동 시스템과 기본 옵션인 ‘드라이브 와이즈’를 결합해 혼잡한 출퇴근길이 오히려 즐거워진다. 기아차의 반자율주행인 드라이브 와이즈는 상당히 똑똑하다. 내비게이션과 연계해 과속 카메라가 있는 지점에선 설정속도와 상관없이 속도를 줄인다. 완전 정차와 재출발까지 지원한다. 차선과 앞 차와 간격유지도 기본이다.
여느 현대차 그룹 차종에서 쓸 수 있는 기능인데, 니로 EV와 만나니 장점이 더욱 두드려졌다. 패들시프트를 미리 교통흐름에 맞춰 조작해 놓으면 가속 혹은 브레이크 페달 조작이 거의 불필요한 까닭이다. 정체가 극심하다 싶으면 왼쪽 레버를 길게 눌러 ‘원 페달 드라이브 시스템’을 활성화하면 된다.
파주에서 홍은동으로 돌아 올 때 시각은 오후 4시. 슬슬 퇴근하는 차들로 도로에 빈틈이 줄었다. 그럼에도 니로 EV는 만족할 만한 연비를 자랑했다. 출발 전 주행가능 거리는 320㎞.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보기도 하고, 극심한 정체구간을 달려보기도 했지만 도착했을 때 남은 주행거리는 180㎞였다. 다음날 또 다시 파주를 ‘신나게’ 다녀와도 배터리가 남는 셈이다.
현재 서울시는 전기차를 구입하는 소비자에게 정부 및 지자체 보조금을 합쳐 최대 1,700만 원을 지원한다. 보조금 받는 기준으로, 니로 EV의 가격은 프레스티지 3,080만 원, 노블레스가 3,280만 원이다. 기아차에 따르면, 소비자의 70% 이상이 노블레스 트림을 선택한다. 추가옵션인 히팅 패키지(118만 원)의 선택율도 높다. 겨울철 배터리 방전을 방지해준다.
차를 반납하고 다시 벨로스터 N의 시동을 걸었다. 이 차의 꽉 막히는 출퇴근 시간 연비는 6㎞/L 남짓. 50L인 연료통을 가득 채우면 300㎞ 정도 간다는 이야기다. 50L를 고급유로 가득 채우면 약 9만 원이 든다. 갑자기 배가 아파온다. 전기차 충전 요금은 ㎾h 당 34.56원에서 337원까지 다양해 정확한 계산은 어렵다. 그러나 통상 1만 원이면 1,000㎞ 정도를 탈 수 있다. 9만 원이면 몇 ㎞를 달릴 수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벨로스터 N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