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요트에 미친 남자… 난 바다의 스티브 잡스
어드밴스드마린테크 대표 '요트 匠人'
이상홍
문갑식기자/조선일보 : 2012.05.12.
#살인의 추억
경기도 화성 석포산업단지는 음산했다. 트럭만 분주한 미로(迷路)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빈 공장도 꽤 됐다. 이상홍(李相泓·44)의 어드밴스드 마린테크는 그 귀퉁이에 있었다. 주소만으론 찾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할 그 입구에 발을 디디자 개가 컹컹댔다. 공장은 180평 남짓했다. 그 2층에서 나타난 사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좀 험하죠. 원래 염전(鹽田)이었는데…. 혹시 영화 '살인의 추억' 보셨습니까? 여기가 그 무대였어요." 그러고 보니 이상홍은 왼손 검지 윗마디가 없었다. 전기톱에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전곡항(前谷港)의 반전
변변한 작업장 가진 장인(匠人)을 별로 본 적 없다. 배에 미친 그도 그랬다. 마당은 뒤집힌 배, 안 팔린 배, 먼지 수북한 배, 만들다 중단한 배, 누군가 고쳐달라고 보낸 배 천지였다. 그런데 거기서 20분을 달리자 상황이 일변했다. 전곡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비욘드 36', 뭍에 걸린 이 세일링 요트(Sailing Yacht) 여섯 척은미스터코리아처럼 미끈한 몸매였다. 오는 30일 열릴 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할 이 배를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코리아매치컵도 그가 오기로 유치해왔다고 했다.
#그 기원, 8학군 어느 고3의 선택
그는 전형적인 강남의 8학군 고3생이었다. 다 알 만한 대기업에서 잘나가던 아버지 덕에 열심히 공부했지만 기대했던 성적에는 못 미쳤다. 그래서 목표였던 서울대 기계공학과 대신 조선공학과를 택했다. 그는 "지금이나 그때나 점수로 전공을 정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택한 과(科)에 관심이 생길 리 없었다. 수업 빠지고 관악산 주변만 어슬렁거렸다. 성적은 엉망이었다. F학점에 D학점이 대부분이었다. "1987년 호헌(護憲) 파동으로 학교가 뒤숭숭했지만…. 말하다보니 핑계 같네요." 그런 삶이 요동치며 방향을 틀었다.
경기도 화성 전곡항 요트 계류장에 세일링 요트들이 미스터코리아처럼 미끈한 몸매를 뽐내고 있다. 요트의 장인 이상홍 대표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이다. / 명장(名匠)의 작업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이상홍 대표의 작업장도 그렇다. 뒤집힌 배, 안 팔린 배, 먼지를 뒤짚어 쓴 배, 만들다 중단한 배 등 작업장엔 온통 요트 천지다 / 이덕훈 기자
스무 살, 딩기요트와의 첫 만남
학교 연못에 떠있던 그 자그마한 배 홀딱 반해 요트부 만들어 선수까지···
국내 요트 설계하는 사람 한 명이 없더라 명색이 조선공학과… 3학년 때 첫 창업
◆요트와 조우(遭遇)
―그렇게 조선(造船) 공부를 싫어한 사람이 왜 배를 만듭니까.
"1학년 때 인연이 찾아왔어요. 선배 한 분이 혼자 만들었다는 4m짜리 당기요트라고, 바람 힘으로만 가는 요트를 공대 뒤 연못에 띄운 겁니다. 그 자그마한 것이 떠다니는 걸 보는 순간, 아!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떤 기분이었기에.
"그냥 확 미쳐버렸지요."
―어떻게 하면 미치는 겁니까.
"그 뒤 양수리와 서해 연포해수욕장에서 요트를 타 본 뒤 '이 길로 가자'고 결심했어요. 즉시 선배와 동기들 모아서 요트부를 창설했습니다. 온종일 요트만 타다 보니 대학 대표가 됐고 나중에는 서울시 대표까지 지냈습니다."
―요트가 꽤 비싸지요.
"국가대표팀에서 쓰다 버리는 중고가 한 척당 300만~400만원쯤 했습니다. 그걸 4대 구해야 했어요. 부원(部員)들이 별의별 일을 다했습니다. 세차도 했고 학교 지원도 받았고 과외도 했지요."
―학점 대부분이 D 아니면 F였다면서요.
"대학 공부는 소홀히 했어도 과외 계통에선 꽤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요트를 사자 창설할 때 8명이던 멤버가 1년 지나니 40명으로 늘더군요."
―운동하던 사람이 어떻게 요트 설계를 하게 됐습니까.
"한참 운동만 하다 들어보니 국내에 요트를 설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명색이 조선과 출신이잖아요.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조선과 관련된 기초를 다지게 된 거지요. 대학원에도 가게 됐고요."
―서울대 대학원은 학부 성적을 안 보나요?
"전 학년 평균이 2.5 이상이어야 하는데 제가 2.0을 가까스로 넘는 정도였어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망친 과목 재수강해서 겨우 채워넣었죠. F는 다 지웠는데 D는 미처…."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창업(創業)을 했습니다.
"'토털 마린 퍼포먼스'라는 회사였는데 2년 만에 말아먹었지요. 딱 배 두 척 만들었는데 한 대도 안 팔렸거든요. '팜(Palm)'이라는 6인승 보급형 배였습니다. 그 배는 지금 사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회사는 선수 출신 한 명과 2500만원씩 출자한 거였고요."
―안 팔려서가 아니라 성능이 부실했던 거 아닙니까.
"기본적인 성능은 갖췄습니다. 오래 못 버틸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는데 폐업도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배를 그냥 버리면 가져가는 사람이 없거든요. 전부 해체해 산업폐기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때야 뭘. 그런데 그 후에도 실패를 반복했어요. 지금도 아버지는 기분이 조금 언짢아지면 그러세요. '네 동기들은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 억대(億臺) 연봉 받고 잘 지내는데 넌 왜 그리 사느냐'고요."
◆물과 맺은 인연
당시 한국은 해양 스포츠 후진국이었다. 요트 설계가 안 되니 제작은 엄두도 못 냈다. 돈 있는 소수가 일본·미국에서 중고 요트를 사들여와 끼리끼리 즐기는 수준이었다. 씁쓸한 실패를 맛본 이상홍은 아버지가 준 돈을 몽땅 날리고 1992년 대학원에 진학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게, 한국이 조선 분야에선 최강국 아닌가요? 그런 나라가 왜 요트 같은 배는 못 만드는 겁니까.
"조선은 설계도만 나오면 그대로 만들어집니다. 워낙 복잡하니 주문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쉽게 말하면 설계도→시뮬레이션→건조→납품으로 끝납니다. 소형 선박은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요.
"아파트 인테리어 비슷하다고나 할까, 구매자의 주문이 많지요. 이건 이렇게 바꿔달라, 나중에 또 말이 변하고. 그걸 일일이 따라야 하니 힘든 겁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시장 규모가 작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대형 선박의 연간 세계시장 규모가 600억~700억달러입니다. 문 기자님, 해양 레저용 선박의 연간 세계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일 것 같습니까."
―그 100분의 1쯤?
"500억달러 정도예요. 제가 처음 창업했던 1989년에 세일링 보트를 타는 분이 200~300명 정도였습니다. 낚싯배를 포함해 등록된 레저용 보트가 국내에 1만척이었고요. 지금은 어떤 줄 아십니까? 세일링 요트만 400~500척에 모터보트가 1만5000척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지요."
―현대중공업이나 대우조선 같은 회사가 뛰어들면 금세 석권하겠네요.
"요트나 모터보트 만드는 게 비유하자면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 같다고나 할까요, 모든 것을 혁신해야합니다. 생각부터 디자인까지요. 아이폰을 요트라고 생각하면 맞을 겁니다. 추상적인 생각에 기술을 접목해야 하는 부분에서는요. 어떻게 보면 이 분야가 문화를 파는 사업인데 그걸 대기업이 하기는 조금 그렇죠."
―94년 2월 대학원을 마치고 이듬해 두 번째 회사를 세웠습니다.
"MID라는 회사였습니다. 이번엔 어선(漁船)에 도전했지요. 같은 엔진을 달고도 다른 어선보다 빨리 달리는 배, 같은 속도를 내면서 잡음은 덜한 배를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비결이 있었어요. 과거 어선은 목선(木船)이었는데 전 그걸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들었거든요."
―그게 히트했나요.
"처음 만든 8대가 확 팔렸고 16대를 더 만들었는데 그것도 완판됐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조선소에서도 부랴부랴 FRP로 어선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런데 왜 또 망했습니까.
"잘나가고 있었는데 IMF 외환 위기가 시작됐어요.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어부들이 견딜 재간이 있겠습니까. 자연히 새 배를 살 사람도 없어졌지요. '박사 학위나 해야겠다' 싶어 교수님 만나러 갔다가 잔뜩 혼만 났어요. '넌 공부 체질이 아니니 계속 배 만들라'고 하시더군요."
―MID 폐업이 99년 6월인데 그 직후 지금의 '어드밴스드마린테크'를 설립했네요. 혹시 사주(四柱)본 적 있습니까.
"'물장사하며 살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어요. 하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아요. 조선공학과 간 거나 지금까지 배 만드는 거나, 위스키 회사에서 장인으로 선정한 것을 보면. 아! 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OB맥주에 다니셨거든요."
―그럼 수영도 잘하겠네요.
"제가 수영을 못해요. 떠있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만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제게 수영 가르친다고 물에 휙 던진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수영 선수를 했는데 물에 빠진 순간 어찌나 무섭던지. 사실 물을 무서워해요. 대학 4학년 겨울방학 때 부산 앞바다에서 요트가 부서져 3시간 동안 표류한 적도 있거든요. 구명조끼도 없었는데. 그런데도 지금 배를 만들고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이상해요."
―그러고도 살아난 게 신기합니다.
"요트가 부서져도 가라앉지는 않거든요. 그거 붙들고 있으니 파도에 밀려 얕은 곳으로 오더군요."
요트는 혁신 덩어리… 아이폰 같다 소형선박, 추상적 생각에 기술 접목해야
木船인 어선, 플라스틱으로 바꿔 히트 자동차 모하비 엔진으로 모터보트를···
지금은 쓰레기 청소선 구상 중
◆내 꿈-아메리카스컵 제패
이상홍을 주목한 것은 '조니워커'라는 양주 회사였다. 그들이 31일 국내의 독보적 장인 5명을 발표하는데 거기 포함된 것이다. 이상홍이 선발됨으로써 150년 전통의 아메리카스컵 요트대회에 한국 대표로 처음 출전할 '화이트 타이거' 팀은 그를 대신해 지원을 받는다.
―프로필을 보니 지금껏 만든 배가 900척이나 됩니다.
"세 번째 회사를 만들고서 다행히 경정(競艇) 선수들이 쓰는 배를 전량 납품하게 됐거든요. 한 해에 100척씩 만들어 공급하니 회사도 안정됐지요. 사실 그때 밤샘하다 손가락이 잘리긴 했지만요."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경정이 시작된 게 2002년인데 지금까지 거래하고 있으니.
"경정은 매년 업체 공개 입찰로 공급자를 정합니다. 경정이 만들기가 꽤 까다롭습니다. 가장 빠른 배와 느린 배의 속도 차가 0.2~0.3초 정도여야 하고 길이의 오차(誤差)도 1㎜ 이내여야 합니다. 경정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만든 배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몇 인승인가.
"제일 큰 것이 108인승이고 작은 것은 1인승이지요. 사실 108인승 유람선이 지금도 군산(群山) 앞바다를 다니는데 제가 그 배 때문에 망한 적도 있습니다. 건조하는 데 든 비용이 10억원이 넘었는데 받은 건 4억원이었으니까요."
―그럼 돈을 더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세계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관습에 따른 주문 제작(Custom order made)'이라는 겁니다. 선주의 주문이 워낙 많고 자주 바뀌어 4~5개월로 예상했던 건조 기간도 1년 반으로 늘어났고요."
―원래 요트로 시작했는데 거의 모든 선박을 만들게 된 데 무슨 사연이 있었습니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서울 마리나에 떠있는 22인승 유람선도 제가 만든 겁니다. 바이크페리(Bikeferry)도 제가 제작했습니다. 지금은 쓰레기 청소선을 구상 중입니다. 지금도 목표는 세계 최고 요트인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그래도 제가 이룬 건 하나 있어요. 세계대회를 유치한 겁니다."
―소형 선박 건조 분야의 강국은 어느 나라입니까.
"영국, 미국, 캐나다, 독일입니다. 일본은 예전엔 강했는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동안 많이 쇠퇴했고요. 소형 선박은 좋은 엔진을 만드는 나라들이 역시 잘 만듭니다. 일본이 많이 뒤처졌다고는 하지만 야마하, 도요타, 닛산, 혼다의 엔진 부문에선 아직도 수출을 많이 하지요."
―소형 선박에 자동차 엔진을 쓴다면 우리도 현대자동차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모하비에 사용하는 S엔진을 써서 '아우라'라는 모터보트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 대표의 경력을 보니 특허도 많습니다.
"가진 기술을 다 특허 내지는 않습니다. 아직 공개 안 한 걸 합하면 그보다 더 될 겁니다."
―열심히 해온 건 사실이지만 아직 선진국 수준이 아닌데 국제대회 유치는 무리 아닐까요.
"국제적인 수준의 선수들을 봐야 수준도 향상되니까요. 2006년 제주도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그 1년 전에 개최가 확정됐습니다. 제가 뛰어다닌 건 2003년부터고요. 세계선수권대회를 끌어왔으니 코리아매치컵도 성사된 겁니다. 워낙 돈키호테처럼 하니 나중에 팀 코벤트리라는 요트계의 거물이 그러더군요. '내가 제일 반대했는데 너한테 졌다'고요. 그분이 결과적으론 제게 큰 도움이 됐어요."
―왜요?
"절 영국으로 초청해 쇼 비즈니스의 세계를 보여주셨거든요. 세계 4대 보트 쇼가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을 도는. 전 그런 걸 몰랐어요. 지금은 꿰뚫었지만."
취재 며칠 후 사진 촬영을 위해 전곡항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배에 미쳐 청춘을 보내고 돈도 벌어보지 못한 채 궁상을 떠는 이 사내는 몇 마디 칭찬을 건네자 완전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해풍(海風) 속에 주고받은 잔이 쌓여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