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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은 그대로 고백하지만 성자 하나님을 별도로 고백하는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즉 성자 하나님으로 구분할 필요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하나님이심을 함께 고백하는 것인데,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원전부터 성자하나님과 연합한 상태셨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20624
#요한계시록 #Revelation 14:12-13
12 聖徒들의 忍耐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誡命과 예수에 對한 믿음을 지키는 者니라
성도는 하나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잃고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쫓겨나는 등의 강도높은 고난과 핍박을 받은 144천 명 뿐만이 아니라 평온한 때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신앙생활을 해 온 모든 신자들, 즉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로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평온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144천 명의 성도들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고난과 핍박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평온한 일상에서 오는 은근하고 교묘하며 간접적이나 지속적인 가랑비 같은 죄와 유혹들을 끊임없이 거스르고 대적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성도들이건 아니건간에 남들도 다 비슷비슷하게 겪는 것처럼 보여서 유별나 보이지도 않고 드러낼만한 것도 아니라서 어쩌면 더욱 더 고독한 견인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고 주일 예배를 잘 드리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한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종교에 열심인 사람들도 어쩌면 우리 이상으로 종교행위에 열심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부모를 공경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극 정성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믿음으로 부부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것이나 믿지 않는 부부가 금슬이 좋은 것이나 그 수준은 별반 다르지 않다. 믿음으로 부모가 자녀를 돌보고 양육하는 것이나 믿지 않는 부모가 본성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믿음으로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해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본성적인 박애정신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나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믿음으로 음욕을 제어하고 간음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믿음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집 택배나 분실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나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믿음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항상 진실하고 정직을 행하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진실하고 정직한 것이나 별반 다른 것은 없다. 믿음으로 내가 갖지 못한 것에 욕심내지 않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형편에 만족해 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믿음으로 개인의 빈천한 환경이나 질고를 이겨내는 것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나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 이처럼 평온한 시절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특출나게 보일만한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이나 위로나 격려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성도 자신들 조차도 내가 과연 믿음대로 살아가는게 맞는건가 의아함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무언가 내세울만한게 없기 때문에 냉수 한그릇에도 상급을 주신다는 말씀을 알기는 하면서도 차마 민망해서 상급을 기대하지도 못하고 그저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 여길 뿐이다. 믿음이 없었던 때에 비하면 분명히 인격 수준이 나아진 것 같기는 한데 그 정도가 너무나 미미해서 그것이 과연 믿음 덕분에 나아진 것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가끔 옛 본성대로 욱하게 되면 역시나 자기 수준이 이정도밖에 안된다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성질환자가 좀 더 원활한 일상을 누리고 건강을 유지하며 질환이 심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조절하고 적절히 운동하며 안좋은 생활습관을 매일 고쳐나가면서 관리하듯이, 가정주부가 매일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청결을 유지하듯이, 평온한 시기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죄악된 요소는 없는지 점검하고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경과 성령의 기준으로 점검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려 노력한다. 자신들의 신앙의 행위나 수준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기 때문에 그저 주님 앞에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신앙을 위해 점검하고 노력할 뿐이다. 단순히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종교나 신을 섬기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가르친 바 하나님 그리스도보다 앞서고 우선하는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잘 드렸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주일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서 평일을 예배드리듯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기준에 따라서는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형제로서 자매로서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을 끊고 살아도 무방하더라도 계명에 따라서는 부모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형제와 자매이기 때문에 성도인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의무를 기꺼이 행한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갈갈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만큼 보복해도 될만한 원수지만 계명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할 수 있는대로 선을 베풀어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으며 모든 정죄나 심판은 하나님 그리스도께 맡기려 한다. 세상의 남자들은 결혼 전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 했는지를 자기의 능력이라 여겨 과시하고 자랑하지만 신앙있는 남자들은 변변한 연애도 못해본다는 조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혹여나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하지 않기 위해 간음을 저지르게 될만한 기회나 상황을 조심하며 회피한다. 세상의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어떻게든 성기능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려고 애를 쓰지만 신앙있는 남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욕이나 성기능이 감퇴되는 것을 간음을 저지를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으로 알고 감사한다. 세상 사람들은 육적인 부귀영화와 입신양명을 위해 교묘하게 남의 것을 가로채기도 하고 거짓말과 중상모략을 저지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상급을 위해 육적인 손해와 억울한 누명을 감수해 나간다.
성도의 견인, 즉 견고한 인내는 성령의 의지와 성도의 의지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성도의 돌과 같은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변화시키시면 성도는 성령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심령을 기반으로 자신의 의지도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한다. 복음을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과 역경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낸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처럼 성령의 의지를 배제하고 성도의 의지만 주장해서도 안되고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처럼 성도의 의지를 배제하고 성령의 의지만 주장해서도 안되며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의지와 성도의 의지 모두를 고려해야만 한다. 성도의 견인은 신앙의 요소이므로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나중은 심히 창대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音聲이 나서 이르되 記錄하라 只今 以後로 主 안에서 죽는 者들은 福이 있도다 하시매 聖靈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行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순교를 당하건 사고를 당하건 질병에 걸리건 수명이 다하건간에 죽음으로써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지킨 자들로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구원이 영원 전부터 불변하게 예정되었다고 해서 죄짓는데 담대해지고 방자하게 살아가는 교인들은 사실 주 안에서 죽지 않고 주 밖에서 죽는 자들이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영원불변하게 예정되었다는 진리에 감격하고 매일 매순간 자신들이 복음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나날이 자신의 신앙을 장성하게 한다. 교계를 대표하는 많은 나이먹은 목사들은 자기들의 사역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는 달리 자기들의 목회와 개인의 신앙이 심각하게 변질된 모습을 보이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 서서히 거룩하게 성화되지 않고 불결하게 악화된 목사들은 스스로 옳다 여기며 회개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므로 주 안에서 죽지 못하고 주 밖에서 죽게 된다. 주 안에서 죽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는 선행으로 수고하고 천국에서는 상급과 쉼을 얻으나, 주 밖에서 죽는 변절자와 배교자들은 이 땅에서는 안락함을 누리고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한 수고를 겪게 된다.
#20210624
#신명기 #Deuteronomy 23:2.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혈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더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사생자라는 외적인 배제 기준 또한 폐지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마음껏 사생자를 낳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적인 사생자가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경계하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과학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 등을 혼합하는 것은 사도가 다른 복음이라 일컫는 사생자 복음을 출산하는 것이다. 목사가 재정충당을 위해 복음과 무관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사생자 목회를 하는 것이다. 목사가 목회를 뒷바라지 해줄수 있는 돕는 배필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끌리는대로 아내를 들이는 것은 사생자 목회를 하는 것이다. 신자가 신실한 신자를 배우자로 맞으려 하지 않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배우자를 맞으려 하는 것은 영적 사생자를 낳으려 하는 것이다.
교회의 미혼 남녀가 결혼을 약속했다고 해서 결혼 전에 임신을 먼저 하는 것이나 임신을 하게 되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사생자의 부모가 사생자를 낳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그 남녀의 가정과 태어날 아기의 인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끄시고 섭리하실지는 알 수도 없고 단정할 수도 없으나 부부와 아이가 이 땅의 삶에서 모종의 죄책을 지게 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의 젊은 미혼 남녀는 결혼 전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 일인지를 깨달아 끓어오르는 육체의 정욕과 유혹대로 행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억제해야만 한다.
#20140624 #창세기 3: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아담에게 건넸을 때, 아담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받아 먹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담이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아무 생각없이, 더 나아가서 하와와 같이 너무나 먹고 싶은 마음에 잘 됐다 생각하고 덥석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아담이 절망과 고뇌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먹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담은 하와와 같이 생활하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을 들은 자였다. 때문에 그는 이를 어길 경우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끄셨을 때,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하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스러운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심지어 자신에게 건네주기까지 한다. 이 순간 아담은 다음의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을 것이다.
첫째,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산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와는? 자신이 그토록 지극히 사랑하는 하와는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은 살지만 사랑하는 자는 죽는다. 설령 하와 대신해서 자기가 죽는다 하여도 하와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아담 없이 영원히 죄책감에 빠져 살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나만 살고 하와 혼자만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을, 또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 죽게 두고 볼 수는 없다. 때문에 모든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받아 먹었을 것이다.
아담은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물으신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대부분 이 아담의 대답을 가지고 아담이 하나님께 변명하고 자기 잘못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떠 넘기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대답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여자에게 잘못을 떠 넘긴다는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 아담은 그저 하나님께 사실 그대로를 말씀 드린 것 뿐이다. 세속 법정에서도 피고나 원고나 증인들은 재판관 앞에서 사건의 경위를 빠짐없이 낱낱이 고해야 한다. 하물며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아담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숨길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이제 여자에게 물으신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는 대답한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는 뱀이 유혹한다는 것을 알고도 이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건네 주었다.
만약에 전통적 해석대로 아담이 자기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고 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아무런 질책도 안하셨을까? 도리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엄중한 책망을 하시지 않았을까? 또한 그럴 경우 하와는 아무리 자기 죄가 크다 하더라도 자기를 지켜주지 않으려는 남자 아담에 대해서 사랑과 신뢰를 잃게 되지 않았을까?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상실한 가운데서 동산에서 쫓겨나 900년이 넘는 그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서로 의지하며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을 전수할 수 있었을까?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문들이다.
아담의 잘못이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하와를 더 사랑한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감상에 젖은 것일까?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심지어 나쁜 일 까지도) 저지르는 바보가 되는 것은, 어쩌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속성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