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3] 야구가 왔습니다

[1번선발]

1988년의 어느 초가을로 기억합니다. 거실에서 TV를 보다 무심코 채널을 돌렸는데, 그 순간 어떤 뚱뚱한 남자가 방망이를 휘두르자 흰 공이 푸른 하늘로 쭉 뻗어 나갔습니다. 작은 공을 저렇게 가느다란 방망이로 정확히 때려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한동안 그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만일 채널이 돌아가던 그 짧은 순간에 다른 화면이 보였다면, 그 타구가 그저 파울이거나 내야땅볼이었다면 저는 야구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1990년 어느 봄날,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들이 잠실 야구장으로 소풍(?)을 갑니다. TV로만 보던 야구를 경기장에서 직접 본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표를 사고 언덕을 돌아 경기장에 들어선 후 게이트를 나선 순간,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푸른 하늘과 초록 잔디나 눈앞에 쫙 펼쳐지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거기서 내려다 본 풍경이 우중충하거나 답답했다면 저는 야구장을 그렇게 많이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2000년 어느 가을날, [다음카페 한화이글스 팬클럽]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잠실야구장에서 처음으로 정모를 했습니다. 게시판이나 채팅창에서만 보던 사람을 야구장에서 보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다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니 주변에 빙그레팬 한화팬 친구는 없었습니다. 맨날 LG팬 OB팬 친구 따라 잠실구장 1루에서 소심하게 이글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화팬 여럿이 모여 야구를 본 것입니다.장종훈 얘기, 송진우 얘기, 정민철 얘기를 그렇게 마음껏 누군가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날 한화팬들이 같이 모여 야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경기 끝나고 신천에서 맥주를 마시며 밤늦도록 야구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글이글이 창립 15주년을 맞이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2006년의 쌀쌀했지만 뜨거웠던 가을날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리그 최강자가 된 삼성과 최근 몇년간 꼴찌를 독식하고 있는 우리 한화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시즌입니다. 팔꿈치에 철심을 밖아 공 몇번 던지면 팔 통증 때문에 잠도 못잔다던 플레잉코치 지연규가 가을 마운드에서 투혼을 던졌습니다. 그날 잠실구장 3루에는 우리 카페 회원 수십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두어시간 후에 시작될 카페 회원의 결혼식에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워낙 치열해 그라운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결국 몇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원들이 잠실에 남았습니다. 그날 이글스는 졌고 결국 06시즌 패권도 삼성에게 넘겨줬습니다. 만일 그날 우리 선수들이 조금만 더 힘을 냈더라면, 우리 선수층이 조금만 더 두꺼웠더라면 최근 몇년간 한화의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지난 몇년간 우리 회원들이 "오늘도 지겠지 뭐" 하는 마음으로 야구를 보지는 않았겠지요.    

야구팬으로 28년을 살았고, 그 중 15년을 [한화이글스 팬클럽]에서 보냈습니다. 올해부터는 '야구 좋아하던 학생'의 기억보다 '이글이글 운영자'로서의 기억이 더 많아집니다. 구단 홈페이지 문자중계를 우리가 진행했던 2001년, 생수통을 북처럼 치고 꽹과리를 불며 서포터를 자처했던 2002년, 개막전을 보겠다며 새벽 6시 차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던 2003년의 기억이 여전합니다. WBC를 응원하려고 회원들과 함께 도쿄행 비행기에 오른 기억도 아직 생생합니다. 해운대에서, 전남대학교 앞 먹자골목에서, 군산앞바다와 대구 동성로에서 회원들과 보냈던 시간도 바로 어제처럼 기억나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야구가 우리 앞에 옵니다. 야구를 여전히 못할 수도 있고 올해는 예년보다 더 잘할 수도 있지만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심심하던 4개월을 지나 뜨겁고 활기찬 8개월이 시작된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8개월을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같이 해야 할 일들이 이제는 많습니다.

불의의 병마로 마음 다쳤을 정현석이 그깟 병 따위 훌훌 털어버리고 신나게 치고 달리는 모습을, 

고졸 성공신화를 썼던 까까머리 김태균이 어느덧 믿음직한 캡틴이 되어 팀을 이끄는 모습을,

06KS에서 소금같은 역할을 하던 젊은 고동진과 한상훈이 이제는 최선참이 되어 훌륭한 수비로 팀에 기여하는 모습을,

'결정적 한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최진행-김태완-송광민이 지난 몇년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모습을.

이용규와 정근우가 과거 우리 팀에는 조금 부족해 보였던 강한 근성과 승부욕을 심어주는 모습을,

오래전 부터 팀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안영명과 윤규진이 완숙한 기량으로 드디어 꽃 피우는 모습을,

손가락에 피가 돌지 않아 다시는 공을 던질 수 없을거라던 송창식이 스스로를 엄하게 담금질해 팀의 주축으로 다시 선 모습을,

그리고 겨우내 진땀 흘린 모든 선수들이 작년보다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장면을

우리가 다 같이 따듯하게 지켜보고 신나게 응원해주면 됩니다.   

다시, 야구가 왔습니다.

그들의 야구가, 나의 야구가, 그리고 여러분의 야구가 우리 눈 앞에 왔습니다.

앞으로 남은 8개월이 모두에게 뜻깊고 의미 있기를

그 안에서 우리가 모두 신나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야구장에서 뵙겠습니다.

[빛과소금]

저도 혼자서 야구를 잘보는 스타일이 엿는데,,, 올해 부턴 회원님들과 같이 볼려고함 ㅋㅋ

[FACE]

매일이 4월이고 5월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늘푸른하늘]

장종훈 선수가 친공이 가운데 전광판을 라인드라이브로 때리던 장면을 보며 충격을 받았던 순간이 없었다면, 저도 이렇게 야구에 빠져있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옥수이글스]

우리 선수들 다치지 말고 멋진 경기를 보여주기를 바래봅니다.

[일구이무V2]

한화가 타 팀들의 공공의 적이 되기를...

[Forever♥이글스]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습니다.
작년 시즌은 빨리좀 끝나길 바랬는데..올시즌은 내내 즐거움과 행복하게 야구를 볼 수있길 기대해봅니다.

[新창천항로]

연습생 신화를 이뤄냈던 그의 모습에서 저는 이글스의 노예가 되어버렸네요... 2번째는 대성 선수의 안쪽으로 꽂히는 직구에... 진짜... 얼마를 더 이글스의 노예로 살아갈까요?

[The포수]

go eagles!!

[타임월드이글스]

아빠 손잡고 처음으로 갔던 청주 구장이 생각나네요. ㅋ 너무너무 기다렸던 야구가 왔습니다!!^^

[allyson]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경기 결과를 떠나서 이글스 팬이라서 행복했던 것 같아요. ^^
열심히 훈련한만큼 선수들이 부상 없이 좋은 모습으로 그라운드에 있기를 바래봅니다.

[정우아빠]

올해는 몇번 직관을 갈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항상 응원할겁니다~~

[우진]

감동적인 글입니다.. 이글스 화이팅 !!!!!!!!!!!!!

[짠한야구]

올해처럼 시범경기 전부터 야구때문에 마음이 설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행복합니다. ㅎㅎ

[조규수광팬!]

전 사정상 한화가 문학 올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ㅠ.ㅠ 흑